▲ 숭릉전경=숭릉은 조선의 18대왕 현종(顯宗· 1641~1674)과 명성왕후(明聖王后) 김씨를 모신 쌍릉이다. 동구릉 입구 왼쪽 산언덕에 자리하고 있으며 현재 일반 관람객에겐 출입이 제한돼 있다.

[경인일보=]구리시 동구릉은 언제 가도 늘 청신한 기운이 맴돈다. 600여년을 이어온 역사의 땅이 뿜어내는 지기와 울창한 숲이 정화한 맑은 공기 탓이리라. 태조의 건원릉이 북쪽 깊은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면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가 잠든 숭릉(崇陵)은 입구 가까운 왼쪽 산언덕에 놓였다. 그러나 사람들의 발길은 이 숭릉 근처에도 잘 미치지 않는다. 누구나 일단 동구릉에 들어가면 곧게 북으로 난 길을 따라 수릉(추존 익종과 신정왕후)이며, 현릉(문종과 현덕왕후)을 거쳐 건원릉에 도달하고 목릉(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과 휘릉(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원릉(영조, 정순왕후)을 돌고는 그냥 나오기 때문이다. 숭릉으로 가자면 원릉에서 이어지는 퇴로를 벗어나 남서쪽으로 더 들어가야 하고 아직은 비공개 능이다보니 사람들의 발길이 적을 수밖에.

▲ 숭릉의 정자각은 다른 왕릉에서 볼수 없는 팔작지붕의 특이한 형태로 정면 3칸, 측면 2칸에 정자각 좌우로 벽체없이 기둥만으로 구성된 익랑이 붙어 있다.

#숭릉의 주인공 현종과 명성왕후

현종(顯宗·1641~1674)은 조선 국왕 가운데 유일하게 중국에서 태어났다. 그 아버지 효종이 봉림대군이었을 당시 병자호란의 여파로 중국에 볼모로 끌려갔을 때 태어났기 때문이다. 큰아버지 소현세자가 8년 동안의 볼모생활을 끝내고 귀국해 의문의 죽음을 당하자 아버지가 왕통을 이었고 이 이유로 재위 기간 내내 예송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할머니 격인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1624~1688)가 효종의 국상 때와 효종비의 국상 때 상복을 얼마동안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란이었다.

현종은 아버지가 와신상담하며 추진했던 북벌(北伐)을 현실적으로 바꿔 자주국방에 힘썼고 농업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주와 익산 등지에 저수지를 만들어 관개시설을 확충하는 등 수리면적을 늘렸다. 또한 광해군 때부터 점진적으로 시행해 오던 대동법을 호남지방 일대에 확산시켰는데 이는 왕비인 명성왕후 집안과 관계가 깊다. 대동법을 주창해온 사람이 김육(金堉·1580~1658)이었고 그는 명성왕후의 할아버지 아닌가?

▲ 강화 정족산사고.

김육이 가평의 잠곡에서 10년여 농촌체험을 해서 터득한 국가의 개혁 방안 중 하나가 대동법이요, 동전의 사용이며, 활자의 제작이었다. 그래서인지 현종은 대동법을 확대하고 10만여 자가 넘는 동활자를 제작하게 했고 이를 효과적으로 사용하게 한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의 효율적이고 안전한 보존을 위해 강화도의 정족산성(전등사 서북쪽) 안에다 사고도 지어서 후세에 물려준다. 말년에는 아버지인 효종의 능에 석물이 갈라지는 등 변고가 일어나서 남인과 서인 사이에 갈등이 치열해지는 등 마음 아픈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태조의 건원릉 서쪽(지금의 원릉 자리)에 썼던 효종의 영릉(寧陵)이 여주의 영릉(英陵·세종대왕능) 곁으로 옮기게 된 것이다.

왕비인 명성왕후(1642~1683)는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딸인데 10세에 세자빈으로 책봉되고 이내 현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됐다. 숙종과 세 공주 등 자녀 넷을 두었는데 지능이 비상했다고 한다. 아마도 할아버지 김육과 아버지 김우명, 큰아버지 김좌명의 핏줄 탓이리라. 그러나 비상한 지능을 믿어서인지 다소 과격하고 감정적이며 거친 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한 마디로 뜨거운 여자였던 셈이다. 숙종이 왕위에 오른 다음에는 공공연히 조정의 일에 관여해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현종이 34세, 명성왕후가 42세에 세상을 버렸으니 그들의 운명은 거기까지였나 보다.

▲ 명성왕후의 조부 김육(金堉)선생의 가평 잠곡서원지.


#특이한 모습의 정자각

현종과 명성왕후가 잠든 숭릉에는 무거운 적막감마저 감돈다. 동구릉 가운데 가장 외진 곳이기도 하지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호젓함을 느끼기보다는 어서 나가야만 될 것 같은 중압감이 가슴을 짓누른다. 이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니 일반에 공개해도 좋을 터인데 혼자만 보는 것이 아까울 정도이다. 특히 이곳 숭릉의 정자각은 조선왕릉 가운데 가장 특이한 형태를 지녔다. 숭릉을 제외한 능들은 모두 정자각의 지붕을 맞배지붕으로 만들어 단아한 모습을 보인다. 대개의 사당이나 종묘, 향교의 대성전 등도 모두 맞배지붕으로 조성해 엄숙하면서도 공손한 외양을 갖고 있어 제례공간이라는 목적성이 뚜렷이 드러난다. 그러나 숭릉의 정자각만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팔작지붕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제례공간이라기보다는 날아갈 듯 날렵한 모양의 정자 같기만 하다. 더욱 이 정자각이 돋보이는 것에는 정자각 좌우로 벽체 없이 기둥만으로 구성한 익랑(翼廊)도 한몫을 한다. 익랑을 조성한 능은 이 숭릉 말고도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의 익릉과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휘릉에서도 보이는데 아마도 한 시대의 유행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두 능의 정자각도 맞배지붕인데 이곳만 팔작지붕으로 만들어 더욱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

▲ 숭릉 망주석(사진 왼쪽)과 금방이라도 뛰어오를듯 사실적인 조각 묘사가 뛰어난 망주석의 세호(細虎).

팔도의 승군 2천650명을 징발해 조성했다는 능에 올라가니 잘 다듬은 석물들이 질서정연하게 놓였다. 마치 무른 나무를 깎아 조각한 듯 섬세함이 뚝뚝 묻어나는데 5개월여의 공역기간에 어찌 저토록 오차 없이 조각했는지 감탄사가 절로 난다. 특히 망주석의 세호(細虎)는 그 사실감이 어느 능보다 뛰어나서 살아서 나올 것만 같다. 당대의 문화 수준이 대단하였다는 증거인데 과연 오늘날 우리의 문화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조선의 유교 이념이나 고려의 불교이념에 대비해 보면 오늘 우리의 철학이며 이념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 수준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잔디를 새로 옮겨 심었는지 봉분에는 초록의 비닐로 만든 그물막이 씌워졌다. 그렇다. 전 세계에 왕릉이건 일반 무덤이건 무덤에 떼를 입힌 나라가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그 잔디에 목숨을 거는 듯이 추석 전이면 온 나라가 벌초 바람에 휩쓸리지 않는가? 사실 이 잘 가꾼 잔디 때문에 우리네 조상 묘역은 공원이 되고도 남는다. 하물며 왕릉은 어떨 것인가?

▲ 숭릉 봉분. 숭릉은 쌍릉으로서 이봉이실(二封二室)형태이다.

숭릉의 능침 뒤로 올라가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동구릉을 에워싼 숲 뒤로 아파트 군락이 파노라마 사진처럼 펼쳐진다. 그 아파트들에서는 이곳이 잘 보이지 않겠지만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공간이 이렇듯 가까우니 우리네 인생도 한낱 시간과 공간 속의 작은 먼지는 아닌지. 상념 또한 하릴없이 600년여를 오간다.

염상균 화성연구회 사무처장 sbansun@naver.com
사진/조형기 편집위원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