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원군제도 탄생시킨 첫 방계혈통의 왕
선조는 재위기간 동안 많은 인재를 등용해 국정 쇄신에 노력했고 여러 전적을 간행해 유학을 장려했다. 그러나 치열한 당쟁 속에 정치기강이 무너져 치정의 방향을 잡지 못했고 두 차례의 야인(野人)의 침입과 임진왜란을 당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에는 민심을 안정시키고 적의 재침을 막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백성들의 진휼에도 힘썼다. 전후 복구사업에도 힘을 기울였으나 실제적인 복구사업은 그의 뒤를 이은 광해군에 의해 추진되었다. 말년에 영창대군으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잇게 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운궁(慶運宮)에서 승하한다. 평상시의 생활이 다른 왕들과는 달리 매우 검소하였으며 학문 뿐만 아니라 그림과 글씨의 재능도 뛰어났다고 한다.
# 동구릉 깊숙한 곳서 국난 풍파잊고 안식
동구릉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목릉(穆陵)에는 14대 선조(宣祖·1552~1608)와 의인왕후(懿仁王后·1555~1600) 박씨, 계비 인목왕후(仁穆王后·1584~1632) 김씨 세 사람이 잠들어 있다. 같은 능역 안의 각각 다른 언덕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제일 왼쪽에 보이는 것이 선조의 능이고, 가운데가 의인왕후, 오른쪽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선조의 능에는 3면의 곡장이 둘러져 있고,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가 조각돼 있다. 여기에 난간석과 혼유석, 망주석 1쌍과 석양, 석호 2쌍이 배치되어 전형적인 상설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의인왕후릉은 병풍석이 생략된 채 난간석만 둘러져 있다. 임진왜란을 치른 후 능을 조성했기 때문에 석물들의 크기만 클 뿐 사실적이지도 입체적이지도 못하다. 그러나 망주석과 장명등 대석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인조 장릉의 병풍석에까지 새겨지는 등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인목왕후릉 역시 의인왕후릉과 같은 형식을 따르고 있지만 좀 더 생동감이 있어 보인다.
목릉의 능역은 원래 1600년(선조 33)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자 왕비릉인 '유릉(裕陵)'의 터로 정해진 곳이다. 1608년(광해군 즉위) 선조 승하 후 선조의 능인 목릉은 원래 건원릉의 서편에 조영되었는데,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심명세(沈命世)의 상소에 따라 1630년(인조 8) 현 위치로 천장되고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칭해 '목릉'이라 부르게 됐다. 그 후 1632년(인조 10)에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계비의 능을 왕릉의 동편 언덕에 조영하게 되면서 오늘날의 세 능을 이루게 됐다.
#목릉의 터가 잡히기까지 풍수관련 이야기
목릉의 위치는 조선왕릉 최고의 길지로 알려진 건원릉(태조 이성계의 무덤)이 있기에 풍수상 크게 특징지을 만한 것은 없이 그저 편안한 자리이다. 이 터에 대한 현대 풍수학인의 평가가 흥미롭다. 선문대에서 풍수지리를 강의하는 최낙기 선생은 목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힌바 있다. "목릉의 입구를 들어서다 보면 전형적인 소시민의 유택(무덤)처럼 느껴진다. 능이 밖에서는 은폐돼 왕이 두 왕비를 거느리고 자기들끼리 오손도손 지내는 듯한 분위기이다. 청룡 끝은 등을 돌려 달아나기 때문에 자신을 진심으로 끝까지 섬기는 신하 하나 없는 형국이다. 전체적으로는 우유부단함의 땅이라고 할까?"
조선왕릉 선정에는 예외 없이 풍수지리가 중요한 근거로 작용했다. 능의 위치를 정할 때는 지관(地官)이 전문가로 참여하게 되는데 훌륭한 임금일수록 훌륭한 지관을 선별해 왕릉선정이나 천릉(遷陵)에 참여하게 했다. 나라가 흥성할수록 풍수 논쟁도 격렬하였고 등장하는 지관의 숫자도 많았다. 목릉의 주인공 선조임금도 풍수사에서 보면 아주 독특한 인물이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1600년(선조 33) 6월 선조임금의 부인 의인왕후 박씨가 죽었다. 이때 선조는 나중에 자기가 죽으면 함께 묻힐 자리를 찾되 다음과 같은 곳이어야 한다고 했다. "내 천성이 산천이 깊고 경내가 그윽하며 겹겹이 둘러싸여 속세와 서로 멀리 떨어진 곳을 좋아한다. 만약에 길가의 천박한 땅으로 비바람에 깎여져 벼랑이 있는 산이라면 비록 아주 좋은 명당일지라도 나는 취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지시에 어울릴만한 땅이 하나 찾아졌다. 현재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신평리 산 46의1에 위치한 인평대군의 무덤이 바로 그곳이다. 이 자리가 본래 선조의 부인 의인왕후 박씨의 무덤자리로 정해졌고, 선조 자신도 훗날 죽어서 이곳에 묻힐 요량이었다. 포천 신평 땅이 능후보지로 결정된 후 40여일 동안 연인원 5천명이 동원돼 능이 조성된다. 그런데 능 조성이 다 끝나갈 무렵, 능참봉 출신인 박자우가 그 자리는 '흉지'라는 상소를 올린다. 당시 박자우가 흉지라는 근거로 내세운 풍수이론은 호순신의 '지리신법'이었다. 조선 초기 경기관찰사 하륜이 계룡산 도읍지를 철회시킬 때 이 책을 근거로 삼았기 때문에 조선조에 널리 유명해진 풍수 이론 가운데 하나였다. 현명한 군주는 이때 훌륭한 대신이나 종친과 상의해 그 이론의 장단점을 취사선택하거나, 어느 지관의 의견을 최종적으로 수용해야 할지를 결정한다. 그러나 선조임금은 그 어느 의견도 독자적으로 취하지 못한다. 결국 박자우의 상소로 찜찜해 하던 선조임금은 이곳을 포기하고 다른 곳을 찾게 한다. 한 달 넘게 능을 찾다가 시간에 쫓겨 결국은 태조 이성계가 묻힌 건원능 옆으로 자리를 정하고 만다.
그렇게 해서 선조의 부인 의인왕후 박씨의 무덤이 정해졌고 그후 조성되는 선조 임금과 계비 인목왕후 김씨의 무덤은 의인왕후 박씨 무덤 곁을 맴돌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선조임금이 포기한 포천 신평 땅은 어찌 되었을까? 훗날 이곳에 인조의 셋째아들이자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이 묻히게 되는데, 인평대군의 6대손이 남연군이다. 즉 흥선대원군, 고종, 순종황제도 결국 이들의 후손인데, 이들은 모두 조선 말기에 권력을 잡았다. 이것이 인평대군묘의 발음(發蔭·조상의 묏자리를 잘 써서 그 음덕으로 운수가 열리고 복을 받는 일)때문은 아니었을까.
사진/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