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글·사진/유중하 연세대 중문학과 교수]8월17일 오후 2시. 베이징의 또 다른 푸산(福山) 출신 음식점 퉁허쥐(同和居)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나는 한 개의 한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라오베이징자장면'(老北京炸醬麵)의 라오(老), 라오바이싱(老百姓-일반 시민)의 라오, 역사가 오랜 유명 브랜드를 뜻하는 라오즈하오(老字號)의 라오, 이들 라오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기면 좋을까. '늙을 로'로 훈을 달아 뜻을 풀이하는 이 라오라는 글자를 단순히 늙어서 한물간 그 무엇으로 취급하면 그건 틀린 대답이 되는데….

오후 2시30분 무렵. 퉁허쥐가 들어서 있는 산리허(三里河) 일대의 거리는 한산했다. 택시에서 내리니 길 건너편에 동화거(同和居)라는 간판이 보인다. 길을 건너기 전에 우선 사진 한 방을 찍고, 길을 건너서 간판을 올려다 본다. 제자(題字)를 한 푸지에(溥杰)는 우리에게는 영화 '마지막 황제'로 알려진 청나라 황제 푸이(溥儀)의 아우이다. 1911년 청나라가 망하면서 민국이 들어섰고,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뒤인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면서 일본은 푸이를 만주국의 꼭두각시 황제로 앉혔다.

▲ 同和居 옆으로 제자한 溥杰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일본 육사를 졸업한 푸지에는 일본 천황 가문의 피가 섞인 귀족 집안의 치가히로(嵯峨浩)라는 여인과 결혼했다. 조선의 영친왕이 일본 여인 이방자 여사와 결혼을 한 것처럼 다분히 강제성을 띤 양국의 정략결혼이었다. 졸지에 만주국 황실 가문에 편입된 치가히로를 만주로 떠나보내면서 일본의 천황비가 한 말이 "중국 황실의 음식을 배워 일본 황실에 전수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충고였다. 만주국 수도인 신경(新京 지금의 長春)에서 신접살림을 차린 그녀에게 청나라 시절 어선방의 주방장인 상롱(尙榮)이 1주일에 한두 차례 요리 가정교사로 청나라 황실의 요리를 전수했다.

일본이 패전하면서 푸이는 전범이 되었고, 만주국 황제의 근위대에서 근무하던 푸지에도 마찬가지 신세가 되었다. 푸지에가 전범이 되어 중국의 감옥에 갇히면서 부부는 이산가족이 되었다. 부부에게는 두 딸이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16년째 되던 해 일본에 살던 푸지에의 맏딸은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에게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아버지와의 편지왕래를 허락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저우언라이는 아버지를 보고 싶다는 딸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편지를 읽으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저우 총리는 푸지에를 석방시키는 동시에 부인 치가히로와 딸을 중국으로 불러 베이징에서 살게 했다.

베이징에서 16년 만에 만난 부부. 그들은 국적을 넘은 정략결혼을 통해 이루어진 부부였으나 서로에게 애정이 있었다. 치가히로는 다시 청나라 황실의 요리를 배운다. 저우 총리가 그녀에게 예전 청나라 궁중 요리사 출신들로 이루어진 팡산판좡(방膳飯莊)의 디엔신(點心)을 담당하는 웬스푸(溫師傅)를 그녀에게 보낸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배운 요리로 저우 총리를 초빙했다. 그 자리에는 차오위(曺愚)와 라오서(老舍) 등 일본 유학 경험이 있는 베이징의 내로라하는 문인들도 초청되었다. 저우 총리는 왕년에 일본에서 1년 동안 유학하던 시절 자신이 먹던 양갱 따위의 일본 음식 이야기를 화제로 올렸다. 그러자 치가히로가 일본요리를 만들어 총리에게 대접하고 싶어도 음식 재료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고, 그 자리에 배석한 랴오청즈(廖承志) 외교부장이 즉석에서 일본 주재 중국영사관에 전문을 보내 요리 재료를 보내라고 지시했다는…. 예전 이야기가 아련한 전설처럼 전해져온다.

▲ 왼쪽 것은 조우즈(주子), 오른 쪽은 주티(猪蹄). 우리로 치면 족발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내가 퉁허쥐를 방문한 주목적은 하나의 요리를 맛보기 위해서다. 그것은 이름도 괴이한 '산부잔'(三不粘). 잔(粘)은 점성(粘性)의 점이니 잘 들러붙는다는 뜻인데, 그게 앞의 불(不)이라는 수식에 의해 부정되고 있으니 안 들러붙는다는 뜻이고, 셋은 접시와 수저와 이를 가리킨다. 부연하면 이 음식은 식기에 들러붙지 않고 수저에 들러붙지 않으며 이에 들러붙지 않는다는 뜻을 가진, 그야말로 해괴한 이름을 가진 음식인 것이다. 계란 노른자위에 녹말가루를 풀어 약한 불에 빠른 속도로 400여 번을 휘저으면 '산부잔'이 되는데 그 젓는 솜씨와 화력의 세기에 따라 점(粘)이냐 부점(不粘)이냐가 결정된단다.

중요한 것은 이 '산부잔'이 중일 양국의 가교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중국과 일본이 수교가 갓 이루어지고 난 시절, 치가히로 여사가 일왕에게 권한 중국 음식이 바로 '산부잔'인데, 항공기편으로 공수를 해서 맛을 본 일왕 히로히토가 그 맛에 매료되었다는 거다. 히로히토는 산부잔을 먹으면서 나가사키 카스텔라를 떠올렸을까. 계란 노른자위와 밀가루 그리고 설탕으로 만든 노란 색의 카스텔라, 비슷한 재료인 계란 노른자위와 설탕과 녹말풀로 만든 산부잔은 맛과 색깔이 비슷하다면 비슷하다. 음식 관련 에피소드 치고는 제법 의미가 없지 않다. 전쟁을 치른 적대국이었던 두 나라 사이에 피를 섞은 부부가 동원한 것이 음식, 그것도 후식이었으니 말이다. '산부잔'이야말로 양국을 잇는 보잘것없는 듯하나 실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가교가 아니었던가.

아래층에서 '백년로자호(百年老字號)'라는 간판 사진을 찍고 2층 식당에 들어서니 예상했던 대로 점심 장사를 마치고 복무원들이 홀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다. 지배인도 자리를 비우고 없다. 산부잔을 못 먹으면 헛걸음이 되는 셈이다. 별 수 없이 루차이(魯菜)를 연구하는데 '산부잔'을 시식해볼 수 없겠느냐고 사정을 이야기하니 복무원이 하는 말이 '불을 껐다'는 예의 그 말이다. 그런데 옆에 있던 다른 복무원이 주방에 이야기를 해보잔다. 잠시 후 다시 나타난 그 복무원이 잠시 기다리면 '산부잔'을 내오겠단다. 쾌재라는 게 바로 이런 때 쓰는 단어임을 실감하고….

▲ 부잔 실험.

10여 분을 기다렸을까. 시간이 제법 걸린 것은 주방에서 '산부잔'을 만드느라고 조리사가 팬에 담긴 재료를 휘젓느라고 땀깨나 흘린 시간일 것. 이윽고 식탁 위에 올려진 산부잔. 물론 실험을 해봐야 한다. 들러붙는가 아닌가. 중국식 수저인 사오즈(勺子)로 가만히 밀면서 들어 올리자 노란 푸딩처럼 생긴 음식이 위로 말아 올려지면서 접시에 붙지 않고 얌전히 떨어진다. 숟가락에도 묻지 않고 이에도 들러붙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그걸로 그치지 않았으니 그 '산부잔'을 손가락에 올려놓고 비벼 문질러 본 것이다.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만, 그 차진 점성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므로. 그 차진 점성은 예상했던 대로 풀처럼 들러붙는다. 말하자면 각막 같은 것이 터지면 그 안에 숨어 있던 계란풀이 점성을 드러내는 것은 아마 이 기이한 '계란녹말풀'로 두 나라를 붙이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건 그렇고 이 산부잔에도 녹말이 들어간 것이 혹시 우리 자장에 녹말을 넣어 볶은 것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