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김태성기자]수원지역 향토 기업으로 출발해 세계 최고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전자가 오는 11월1일 창립 40주년을 맞는다. 대한민국
대표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전자는 국가 경제를 이끄는 최 일선에 나선 기업임 은 물론, 새로운 기업문화를 선도하며 우리 사회의 또 하나의 기둥으로 우뚝 섰다. 설립 당시만 해도 합작 등을 통해 복제품에 가까운 제품을 만들어내기 급급했던 '제조업체'였지만, 글로벌 개척정신으로 무장한 지금은 세계 모든 기업을 통틀어 브랜드 가치가 19위(2009년 현재)에 오를 정도로 세계인이 사랑하는 기업으로 자리잡았다.

▲ 삼성전자 수원디지털시티 전경.

■ 자본금 3억3천만원의 중소기업=지금은 세계 최고의 글로벌 기업이지만 삼성전자도 40년전 출범 당시에는 중소기업으로 시작했다.

현재 창립기념일로 삼고 있는 11월1일은 삼성전자가 주요 계열사를 합병한 지난 1988년 새롭게 제정됐다. 정확한 삼성전자의 창립은 1969년 1월로 당시 자본금 3억3천만원에 종업원 36명의 작은 회사였다.

하지만 삼성의 출발은 시작부터 남달랐다. 일본 산요전기와 자본과 기술을 합작한 삼성전자는 흑백TV, 라디오 등을 본격 생산하며 수직 성장의 기틀을 마련한다.

또한 기술 습득과 개발도 초기부터 집중해 나가기 시작해 사원들의 해외기술 연수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 삼성전자가 지금의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게 만든 주역인 고 이병철 회장(사진 왼쪽)과 이건희 전 회장.

지금도 국내 최고 수준의 급여를 자랑하는 삼성전자지만 당시도 삼성전자의 급여는 국내 평균보다 높았다. 1974년 기준으로 삼성전자 사원의 월급은 3만9천188원. 당시 국내 근로자 평균 월급 3만6천34원보다 10% 가량 높았다.

삼성전자가 처음 수출을 시작한 1972년의 연간 매출은 18억4천만원, 영업이익은 1억4천만원이었다. 올해 예상되는 10조원의 영업이익을 고려하면 당시보다 7만배 이상으로 실적이 늘었다.

■ 수출로 세계를 꿈꾸다=삼성전자는 내수시장을 기반으로 함은 물론, 해외시장 개척을 통해 기업의 세계화를 꾀했다. 지금의 글로벌 정신 역시 당시 이같은 방침에 부합된다.

1982년 포르투갈에 첫 해외 생산기지를 마련하면서 글로벌화를 시도한 삼성전자는 1983년 2월 고 이병철 회장이 반도체 산업의 본격적 진출을 발표한 '도쿄 선언'을 통해 세계 시장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이러한 삼성전자의 행보를 지켜보는 해외 기업들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았다. 자본도, 기술도 없는 변방국의 기업이 초일류 산업에 겁없이 뛰어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

하지만 삼성전자는 보란듯이 용인 기흥공장 착공에 나섰고 공장 착공후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등에 이어 세계 3번째로 64K D램 개발에 성공하는 신화를 기록하게 된다. 이후 10년뒤인 1992년에는 64M D램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며 D램 시장 1위에 올라서는 기염을 토했다.

▲ 1970년대 초반 삼성전자의 히트작중 하나인 이코노TV 생산라인.

이후에도 세계 최고 제품을 만드는 기업이 되기 위한 삼성전자의 노력은 끝나지 않았다.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회자되는 '신경영 선언'은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는 강도 높은 혁신 정신으로 반도체를 넘어 전체 전자시장에 핵심으로 자리잡는 결실을 맺게 된다.

1994년 첫 아날로그 휴대전화를 내놓은 삼성전자는 '애니콜 신화'를 탄생시켰다. 이때부터 삼성전자는 싼 값에 물건을 잘 만드는 기업이 아닌, 세계 그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최고 품질의 제품을 만들어내는 회사로 변모하게 됐다.


■ 향후 40년, 더 밝은 미래를 위해=삼성전자는 이후에도 전자산업에서 다양한 혁신 경영과 제품군들로 시장을 지배해 나갔다. 10여년전 국내에 불어닥친 외환 위기는 물론 지난해 시작된 금융 위기에도 흔들림 없이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약세를 보이던 TV 시장에서도 삼성파브 'LED TV' 등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대히트를 치면서 또다시 '메이드 인 삼성'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중이다.

▲ 1994년 첫 출시된 '애니콜'도 이제는 명품이란 말이 수식어로 불릴만큼 오랜 기간 사랑받는 휴대폰 브랜드가 됐다. 당시 '한국 지형에 강하다'는 광고 문구로 유명했전 'SH-770'은 삼성전자의 휴대폰 사장 진출에 비단길을 깔아놓은 효자상품이었다.

이러한 순항에도 삼성전자는 올초 조직 개편과 더불어 대대적인 조직 변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자율복장제', '자율출근제', '순환휴가제' 도입 등이 바로 변화의 중점으로 그동안의 조직과 관리 문화의 상징이었던 삼성전자가 창조 경영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대비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또한 삼성전자의 상징이자 중심이 되는 수원사업장을 디지털시티로 전환, 대학 캠퍼스보다 낭만적이고 자유로운 사내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목표다. 이는 직원들에게 최대한 자율과 편의를 부여하는 대신 창의적인 아이디어 발굴을 통해 소니, 노키아 등의 제품은 물론 콘텐츠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두기 위한 필승전략중 하나다.

한편 삼성전자는 30일 서초동 사옥에서 이윤우 부회장 및 현직 임직원과 윤종용 고문, 진대제 전 사장 등 옛 경영진이 참석한 가운데 40주년 기념식을 열고 새로운 40년을 위한 미래 계획을 밝힐 계획이다.

※ 첫 사업장 인연… 전자산업 메카된 '수원'

'수원은 삼성의 도시이고, 삼성은 수원의 기업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삼성전자가 수원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 그리고 수원시민이 삼성전자를 사랑하는 마음은 애틋하다.

삼성전자의 설립일은 1969년 1월 13일. 당시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로 설립등기를 마친 삼성전자는 첫 사업장으로 수원을 택했다.

설립 초기 삼성전자는 도쿄에 소재한 산요전기단지를 첫 사업장의 표본으로 삼았다.

▲ 1972년 당시 삼성전자 수원사업장 전경. 사업장 주변은 논밭에 둘러싸여 있다. 공장도 지금의 환경과는 다르게 양철 소재로 지어져, 초창기 맨손으로 시작된 삼성전자의 모습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에 당시 산요전기 단지 면적인 132만㎡보다 더욱 큰 부지를 찾았고, 이를 소화해 낼 수 있는 수원과 현재의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울주군, 경남 양산시 등을 1차 후보지로 삼았다.

7개월간의 사업장 조사와 검토 끝에 최종 결정된 지역이 현재 수원으로 당시 소문으로는 풍수지리, 부동산 개발 등 다양한 가능성이 고려됐다는 설도 있었지만 창업 구상에 적합한 부지였다는 게 정확한 견해다. 당시 삼성전자는 '전자단지의 대형화, 공정의 수직계열화, 기술개발 능력의 조기 확보'를 창업 구상의 기본계획으로 삼았다.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공업용수 및 전기공급 사정, 수송상의 지리적 여건, 공해문제, 지역사회와의 관계를 적절히 조화하는 것을 중시해 수원에 최고점을 줬으며, 이같은 확신은 삼성전자가 회사의 심장을 수원에 심은 결정적 계기가 됐다.

149만㎡ 대지에 조성된 수원사업장은 진공관 흑백 TV, 스테레오 리시버, 세탁기, 에어컨, 라디오 등을 국내 최초로 생산하며 국내 전자산업의 메카가 됐다.

▲ 1984년 64K D램 첫 수출 당시, 수출물량을 실은 화물 차량.

※ 창립40주년 삼성전자 주요史

■ 1969년 회사 설립
■ 1974년 첫 흑자 전환 (매출 134억원, 순이익 6억1천700만원)
■ 1984년 첫 조단위 매출 달성(매출 1조5천억원)
■ 1994년 첫 10조 매출 달성(매출 11조5천억원)
■ 2004년 최대 이익실현 (영업이익 12조169억원, 순익 10조7천867억원)
■ 2008년 연결기준 매출액 100조원 돌파 (연결매출 121조2천900억원)

사진/삼성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