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나라의 옛 도읍에 세워진 강태공의 조각상
[경인일보=글·사진/유중하 연세대 중문학과 교수]

10월 중순을 넘긴 무렵, 중간고사 기간을 이용하여 자장면의 뿌리를 찾아나서는 세번째 산둥행 길에 오른 것은 옛적 제나라로 접속하기 위해서다. 린쯔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나는 늘 그렇듯이 한자 뜻풀이를 하고 있었다. 물고기(魚)가 달다(甘)는 뜻으로부터 노(魯)라는 나라 이름이 말미암았음은 본 연재가 시작될 무렵에 이미 언급한 바 있거니와, 이른바 산둥 땅을 이루는 제로(齊魯)라는 두 나라 이름 가운데 제나라의 이름자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齊)라는 한자는 '벼와 보리의 이삭이 위에서 보면 평평하다'(象禾麥穗上平之形)는 뜻이다. 말하자면 제나라는 곡창지대라는 뜻으로 풀이하면 그리 어긋난 해석이 아닌 게다. 산둥요리가 바로 이 곡창지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풀이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제나라의 옛 도읍인 린쯔(臨淄)는 무슨 뜻인가. 쯔(淄)도 그럴 듯하다. + 川 + 田 = 淄'라는 등식에는 물이 많이 흐르는 곳에 밭이 있다는 뜻이니 곡식이 풍부하리라는 암시를 받는 것은 억지가 아니다.

택시 안에서 배낭에 있는 산둥 지도책을 펼쳐 든다. 지난 4월 첫 산둥행에서 들른 린칭(臨淸)을 떠올리며, 산둥의 지형을 그린 페이지를 돋보기 너머로 훑는다. 지도에는 린쯔, 린칭 이외에 린이(臨沂)와 린무(臨沐)라는 지명이 '나를 봐주세요' 하면서 별처럼 소곤거린다. 청(淸), 치(淄), 기(沂), 목(沐) 등 임(臨) 옆에 붙은 기호에는 하나같이 물 수(水)가 붙어 있다. 강물을 끼고 있는 도시라는 코드인 것이다. 배산임수(背山臨水)라고 했을 때, 그 '임'은 물을 위에서 굽어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린쯔는 '오악지수'(五嶽之首-중국에서 높은 다섯 산 가운데 으뜸)로 일컬어지는 태산(泰山) 자락 북쪽에 위치한 도시. 임수의 수는 물론 쯔허 강물이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태산 자락으로 북면하여 앉혀진 린쯔 앞으로는 또 하나의 강물이 흐른다. 그것은 황허(黃河) 본류다. 황허 본류가 하베이와 산둥의 평원을 이루는 것이다. 그 일대에서 주로 밀농사가 이루어졌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 강태공 공원 입구에 세워진 솥

택시가 린쯔 가까이에 이르면서 다리를 건너려는데 강 저 편으로 예전에 못 보던 조각상이 서 있다. 기사에게 물으니 강태공(姜太公)의 조각상이란다. 강태공은 누구인가. 주나라 무왕이 최초로 제나라의 제후로 봉한 인물. 물론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짠스팅처바'(暫時停車-잠깐 차를 세우자)라고 기사에게 주문을 한 다음 조각상에 다가가노라는데, 강변을 따라 새로 조성한 강태공 공원입구에는 커다란 솥이 세워져 있다. 솥이라…. 저 솥이라는 물건은 뭘 하는 물건인가. 사마천의 '사기'를 검색하여 '솥 정'(鼎)을 뒤져냈을 때 몇 글자가 나오더라…. 67회던가. 그 '사기'에 등장하는 솥에 담긴 사연을 풀면 서양의 제법 굵은 콘텐츠인 '나니아 연대기'나 '반지의 제왕'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담겨 있거늘.

중국이라는 나라에서 치수(治水)로 하(夏) 나라를 세운 우임금이 중국 전국을 발에 물집이 잡히도록 싸돌아다니면서 모아들인 것이 구리였다. 당시 구주(九州)로부터 거두어들인 구리로 만든 것이 바로 솥이었다. 그 솥은 물론 밥을 짓거나 고기를 삶거나 하는 데 쓰이는 것이다. 솥은 중국의 이른바 '문물'(文物)을 대표하는, 우리로 치면 국보 1호에 해당되는 기물이다. 당시만 해도 구리는 귀한 것이어서 그 쓰임새는 주로 무기였는데 그 구리를 거두어 들여 밥 짓고 고기 삶는 솥을 만든 것이다. 이건 무슨 뜻인가. 무(武)를 멀리하고 문(文)을 빚은 것이다.

베이징 올림픽의 엠블렘에 새겨진 글자, 붉은 바탕에 하얀 음각으로 새겨진, 사람이 춤을 추는 모양의 글자는 문(文)을 형용한 글자이다. 그 문은 다시 예(禮)와 악(樂)으로 나뉜다. 이채를 발하는 대목은 중국에서 '예란 먹는 행위에서 비롯된다'(禮始于食)는 점이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이를테면 관혼상제라는 예의 주요한 절차가 있다고 치자. 거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먹을거리다. 주나라의 천자는 자신에게 고분고분한 제후에게 제사 지낸 고기(조)를 나누어 줌으로써 황실에 가까운 종친 비슷한 존재임을 확인시키는 것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그런데 이건 약과다. 제나라의 환공은 주나라의 황실에서 제사 지낼 때 쓰는 제주(祭酒)를 거르는 포모(蒲茅)라는 풀을 공물로 바치지 않은 나라를 징벌하여 춘추오패의 첫번째 패자가 되었다.

악은 또 뭔가. 악에도 증빙이 없을 수 없다. 무단통치의 대명사인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자 전국의 무기를 거두어 들여 만든 것이 함양 성 밖에 세울 구리종(銅鐘)을 지키는 동인(銅人)이었다. 솥과 구리종이 합쳐지면 무엇이 되는가. 먹고 마시면서 음악 반주를 곁들이는 그림이 연출된다. 무기를 녹여 종과 솥으로 만듦으로써 중국은 무를 방치하고 결국은 문약으로 흐르면서 '동아병부'(東亞病夫-동아시아의 병든 사내)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21세기 중국은 그 솥을 다시 세웠다. 문의 시대를 맞았다는 시대 감각, 곧 무로 이 세상을 태평하게 다스린다는 강령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일까.

이런 제법 '거창'한 생각을 하면서 이리저리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데 저쪽에 짙은 남색 인민복 차림의 한 노인이 쯔허(淄河) 강가에 낚시를 드리우고 있다. 낚시꾼의 대명사인 강태공의 조각상 앞에서 낚시하는 노인이라…. 어울리는 그림이란 바로 이런 장면을 두고 이르는 것이 아닌가. 강태공의 낚시는 바늘 없는 낚시로 회자된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 낚시를 강물 위에 드리운 것이 아니라 하염없이 지나가는 강물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한 낚시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나타났다. 주나라 문왕이 바로 그다. 말하자면 강태공은 사람 낚시를 하고 있었던 것. 그 사람 낚시는 천하를 낚는 데로 이어졌다.

▲ 제나라 역사박물관 안에 진열된 '제'의 자체 변화

주나라의 천하가 되자 강태공은 제나라로 봉해지고 나서 진짜 낚시를 즐기게 되었는데, 여기에도 음식에 관한 에피소드가 감추어져 있다. 강태공은 낚시를 해서 잡은 물고기를 직접 요리해서 손님들 상에 올리기를 즐겼다는 것이다. 물고기의 뼈를 발라낸 다음 야채를 넣어 함께 볶아내곤 했는데, 그 요리를 먹어본 손님들은 이구동성으로 "제나라 백성들이 부자나라를 이룬 것은 강태공이 물고기 잡기를 게을리 하지 않은 때문이라네"(齊民富國盛, 姜太公魚勤)라는 탄사를 발했단다. 주나라 무왕이 강태공을 제후로 봉하면서 "물고기와 소금의 이로움을 살리라"(便魚鹽之利)는 주문을 몸으로 보여줌으로써 제나라 백성들로 하여금 생업에 힘쓰게 한 본을 보인 것이리라.

흥미로운 것은 후세 사람들이 '어근(魚勤)'의 '근(勤)', 곧 근면함을 '근(芹)'(미나리)으로 바꾸어 지금도 그 요리가 산둥 일대에서 전설의 요리로 전해져 온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강태공이야말로 진정한 츠주얼(吃主兒 - 단순히 음식을 먹으면서 품평을 하는 미식가가 아니라 직접 요리를 즐겨 만들 줄 아는 미식가)의 창시자쯤 된다고 보아도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