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채도매시장의 배추 조각상.
[경인일보=글·사진/유중하 연세대 중문학과 교수]10월도 이미 반 넘어 하순으로 접어든 어느 날 산둥의 가을 하늘도 한반도의 그것처럼 맑고 푸르다. 강태공 공원을 뒤로 하고 다시 린쯔의 고속도로 바로 북쪽에 자리잡은 제나라 역사박물관을 향하는데, 동네 어귀에 커다란 입간판이 택시를 세우게 한다. 이름하여 제도진(齊都鎭). 제나라의 옛 도읍이 있던 마을이다. 사진기에 담은 다음, 이미 대여섯 차례는 좋이 들렀던 박물관에서 새로운 것이 있나 눈요기를 대강 하고 나서 다시 택시로 방향을 잡은 것은 소우광(壽光)시. 이번 산둥 행에서 찍어야 할 중요한 점이다.

산둥에서 건너온 화교들 가운데 상당수가 중화요식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점은 상식 비슷한 사실이지만, 한국의 화교들이 요식업에 종사하는 데 결락시킬 수 없는 요소가 식자재라는 점을 짚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식자재 가운데 채소의 공급을 맡아 사시사철 양파나 오이 혹은 배추 따위의 야채를 중국 음식점에 대준 이들 역시 화교라는 점은 제법 의미심장하다. 이른바 화농(華農·화교농사꾼)이라고 해서 산둥에서 배를 타고 한반도로 건너온 이들이 지은 농사는 기존의 한반도의 농사꾼들이 짓던 농사와는 성격이 달랐다. 화농들은 이른바 영농(營農)을 한 것이다. 집 앞 텃밭에 씨를 뿌려 때맞추어 거두어 가내의 식용으로 충당하다가 남은 것은 장날에 내다팔던 식의 자급자족 농사가 아니라 영리와 장사를 염두에 둔, 말하자면 상행위를 염두에 둔 농사였다.

▲ 칭탕자장미엔.
지난 호에 언급한 바 있듯이 제나라의 도읍 린쯔 일대는 곡창지대인데다가 린쯔 바로 옆의 소우광시는 오랜 야채의 생산지다. 그리고 산둥의 채소 재배 기술은 적어도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엽까지, 다시 말해 일본의 신식 영농 기술이 전해지기 전까지는 한반도보다 선진지역이었다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 산둥 화교들이 한반도로 건너와 '청요리집'을 내면서 요리에 들어가는 식재료 가운데 주요한 일부를 차지하는 야채를 바로 이들 화농들이 맡았다. 게다가 산둥에서는 19세기 말 무렵 한해 걸러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 찾아들면서 소우광 일대의 농토를 잃은 야채 농사꾼들이 새 터전으로 찾아든 곳이 바로 만주 평원이거나 아니면 바다 건너 한반도였고, 인천의 주안 등지, 서울의 영등포 아니면 군산 일대가 그들이 터를 잡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농사를 지어 모은 돈으로 사들인 땅은 화교 자신의 이름으로 한국의 등기부에 올릴 수 없었다. 하여 한국인 친구의 이름으로 올렸다가 배신을 당하여 날리거나 혹은 한국인 아내를 맞아들여 그 아내의 이름으로 올렸다가 불미스런 일을 당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옛날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데, 택시가 소우광시 구역 안으로 들어서자 지방도로 위로 자동차 특히 화물차의 통행량이 갑자기 늘어난다. 지나가면서 보니 없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신호등이요 다른 하나는 건널목이다. 중앙선은 신성불가침이 아니라 수시침범. 게다가 산둥의 운전기사는 얼마나 성질이 급한가. 운전하면서 내내 클랙슨을 눌러대니 택시를 타고 가면서도 좌불안석이기 십상이다. 그날 따라 골라잡은 택시 기사는 그런 도로사정인데도 어제 밤 뭘 했는지 운전을 하면서 연방 눈을 붙였다 뗐다 한다. 자장면을 찾아 나섰다가 자칫하면 골로 가는 길로 접어들 차제이다. 별 수 있는가. 젊은 기사에게 일단 껌을 하나 껍질을 까서 입에 넣어주듯이 건넨 다음 계속 말을 붙이려는 찰나, 때마침 창밖으로 이상한 것이 스쳐 지나친다.

저게 뭐냐고 물으니 잠에서 깨어난 듯 하품을 하면서 '웬스다펑'이란다. 웬스다펑? 지방이니 사투리에 적응하려면 언제나 시차가 필요한 법. 한참 동안 추리를 한 끝에 '溫室大棚'이라고 적어 들이밀면서 맞냐고 묻자 젊은 기사가 마치 자기가 낸 퀴즈를 학생이 알아맞혀서 기쁘다는 듯이 "뛔이뒈이뒈이뒈…"라고 '맞다'를 네 번이나 연발하는 거다.

바로 이거다 싶은 것이, 소우광에 온 목표가 바로 택시 안에서 이루어진 게나 진배 없기 때문이다. 왜냐. 소우광 출신의 화농들이 한반도에 가지고 들어온 기술이 바로 저 온실재배였으니까. 일단 차를 세운 다음 내려서 디카에 담고 볼 일. 지금으로 치자면 비닐하우스인데 당시 비닐이 있을 리가 없다. 소우광의 농부들은 닥나무 종이를 여러 겹으로 겹쳐 기름이나 촛농을 먹여 비닐하우스의 비닐을 대신한 것이다. 비가 와도 기름이나 촛농을 먹인 종이에는 빗물이 흡수되지 않았을 터. 그래서 겨울에도 농사를 지어 제철이 아닌 고가의 채소를 청요리집에 납품할 수 있었다.

▲ 흙벽을 쌓아올려 지은 온실. 그 앞으로 배추와 대파가 파랗게 자라고 있다.

한겨울 자장면 위에 얹힌 새파란 오이채가 산둥 혹은 소우광에서 배타고 물 건너온 화교의, 비닐하우스가 아닌 촛농을 먹인 한지 하우스에서 재배한 오이라는 것을 알고 먹은 손님이 얼마나 될꼬 하면서 수첩에 적고 있는데 기사가 차를 세운다. 저걸 보라는 것이다. 차를 세운 곳은 채소도매시장. 젊은 기사는 이제 길 안내를 자임한 모양이다. 차를 세우고 내려 커다란 배추를 조각한 상을 사진에 담는 걸 보더니 이어서 길 건너를 가리킨다. 입간판에 붙어 있는 글씨는 채소망상시장(菜蔬上市場). 우리로 치자면 야채인터넷쇼핑몰이다. 이 때 기사가 담배를 한 대 권한다.

바로 그때 두 사람의 배안에서 동시에 같은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꼬르륵 하는 소리였다. 둘은 담배를 피우다 말고 서로 배꼽을 잡고 웃음을 터뜨리면서 담배 연기에 사래가 들려 같이 기침을 얼마를 했던가. 내가 "조우바!"(가자)라고 하자, 그 친구가 "츠선마"(뭘 드시겠수?)한다. "츠미엔탸오, 전마양?"(국수가 어때?). "팅하오."(좋죠). 이렇게 해서 우리가 얼마 후 자리를 잡은 곳은 소우광 시내의 이(李)선생 가주랍면관(加州拉麵館). 캘리포니아 출신 화교가 중국에 낸 국수 프랜차이즈다. 복무원 아가씨가 메뉴판을 건네는데 기괴한 메뉴가 눈길을 끈다. 이름하여 칭탕자장미엔(淸湯炸醬麵). 이럴 수가…. 맑은 국물에 국수를 말은 다음 거기에 자장 볶은 고명을 얹은 것이다. 우동과 자장을 '짬뽕'하다니…. 하는데 젊은 기사가 칭탕자장미엔이라고 자기가 먼저 주문을 한다. 나도 따라서 '짜이라이이완'(한 그릇 더).

우동과 자장을 '짬뽕'한 이상한 국수를 한 그릇 먹고 나와서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이번에는 내가 한국 담배를 권한다. 몇 모금 빨더니 이 친구, 내년에 소우광에서 세계야채엑스포가 열린다고 귀띔을 해준다. 언제냐고 물으니 10월 전후한 무렵이란다. 옳거니. 내년 이맘때 중간고사에는 상하이 엑스포를 찍고 거기서 소우광으로 와서 야채 엑스포를 보는 동선이 나오는 거다. 그러면서 내년에 다시 올 때도 자네 택시를 타도 좋겠느냐고 물었더니 반색을 하면서 차안에서 명함을 뒤져 내미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내년 택시를 미리 예약을 한 셈이 되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