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자각에서 올려다 본 순릉(공혜왕후) 능침. 공릉(장순왕후)과 비슷하게 그다지 높지 않은 능선에 자리잡고 있다. 조선역사를 통해 자매가 나란히 왕후가 된 일도 전무후무한 일이지만 죽어서까지 나란히 묻힌 것도 흥미롭다.

현재 강남의 중심이며 천정부지의 땅값을 자랑하는 압구정(狎鷗亭). 이 압구정이란 단어는 30대 후반까지 백수로 살다가 이후 최고 권력자로 등극하면서 인생역전에 성공한 한명회(韓明澮)의 호이다. 한명회에게는 슬하에 아들이 1명, 딸이 4명 있었는데, 그 중 넷째 딸이 공혜왕후이며 공혜왕후가 잠들어 있는 순릉이 바로 오늘 우리가 찾아갈 곳이다.

#언니의 뒤를 이어 단명하다

파주삼릉의 주출입구를 들어서면 안쪽 깊숙이 자리잡은 능이 나타나는데, 조선 제9대 성종의 왕비인 공혜왕후(恭惠王后·1456∼1474)의 순릉(順陵)이다. 공혜왕후는 지난 회에 소개한 공릉에 묻힌 장순왕후(제8대 예종의 왕비)와 친자매 사이다. 두 사람은 자매간이었지만 왕실에서는 언니와 동생 사이가 아닌 시숙모와 조카며느리의 사이였던 것이다. 자매가 나란히 왕비에 오른 예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로서 이를 통해 두 왕비의 아버지인 한명회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 파주 삼릉에 자리잡은 순릉은 조선 제9대 성종의 왕비인 공혜왕후의 능으로 앞회에 소개한 공릉에 비해 석물이 더 많이 설치돼 있고 공릉 동쪽에 있다.

공혜왕후는 1456년(세조 2) 10월 11일 상당부원군 한명회의 막내딸로 연화방 사저에서 태어났다. 1467년(세조 13) 1월 12일 12세의 나이로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잘산군과 가례를 올려 천안군부인이 됐다.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왔으나 예의 바르고 효성이 지극해 세조비 정희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예종의 계비 안순왕후의 귀여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왕비의 자리에 오른 지 5년 만인 1474년(성종 5) 4월 1일 열아홉의 나이로 소생 없이 창덕궁 구현전에서 승하한다. 그는 "죽고 사는 데는 천명이 있으니, 세 왕후를 모시고 끝내 효도를 다하지 못해 부모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을 한탄할 뿐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한다.

순릉의 지석에는 공혜왕후가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리 총명했으며, 커서는 온화하고 의순하며 나이에 비해 어른스러웠다고 씌어있다. 또 1467년 세조가 성종을 잘산군으로 봉하고 배필을 가릴 때 뜻에 맞는 사람이 없었는데, 왕후가 덕 있는 용모를 지녔음을 알고 혼인을 정했으며 이후 왕후로 들여와보니 언동이 예에 맞으므로 세조와 대왕대비가 매우 사랑했다고 한다.

▲ 순릉 문·무인석. 안정적인 신체 비례와 복식과 갑주의 표현이 정밀하며 얼굴표정 또한 사실적으로 조각돼 있다.

#4차례 1등 공신의 영화를 누린 공혜왕후의 아버지

순릉의 주인공인 공혜왕후를 이야기 하면서 그의 아버지인 한명회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한명회(1415∼1487)는 세조(世祖)의 즉위에 일등 공신이 돼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던 인물이다. 그의 어머니 이씨는 임신한 지 일곱 달 만에 한명회를 낳았는데, 배 위에 검은 점이 있어 그 모양이 태성(台星)과 두성(斗星) 같았다고 전한다. 또 일찍이 개성에 있는 영통사(靈通寺)에 놀러 갔었는데 한 노승이 사람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그대의 두상에 광염(光焰)이 있으니 이는 귀하게 될 징조이다"라고 말해 일찍부터 출세할 조짐이 나타났다고 한다.

한명회는 세조 즉위 이래 왕들의 총애를 받아 성종대까지 고관 요직을 역임, 군국대사에 많이 참여했다. 그리고 4차례에 걸친 1등 공신으로 많은 토지와 노비를 상으로 받아 호부를 누렸다.

한편 한명회는 정부인 민씨(閔氏)와의 사이에 1남 4녀를 둔 것에 그치지 않고 부실(副室)과의 사이에서도 7남6녀를 두었으니 자식 복은 이래저래 타고 났던 것 같다. 그 중에서 첫째딸은 한명회와 막역한 사이이자 정치적 동지였던 영의정 신숙주(1417∼1475)의 큰아들 신주와 혼인하고, 둘째딸 역시 한명회와 정치적 운명을 함께 했던 충경공 윤사로(1423∼1463)의 장남인 윤번과 혼인했다. 윤사로는 파평윤씨로서 당대의 명문거족 중 하나였다. 셋째딸은 예종과 국혼해 장순왕후에 봉해지고, 넷째딸이 바로 성종의 왕비로 공혜왕후가 되었으니, 가히 국중 제일의 혼맥(婚脈)을 이뤘다고 할 수 있다.

▲ 순릉 혼유석.

#성종대의 우수한 석조 예술 고스란히 담겨

순릉은 1474년(성종5)에 조성됐다. 봉분 뒤쪽으로 곡장(曲墻)을 둘러친후 앞쪽으로 3단의 계체석(階체石)을 마련해 각종 석물을 배치했다. 전체적으로 공릉과 거의 동일하지만 순릉은 왕비의 능이므로 공릉에 비해서 석물을 더 많이 설치했고 병풍석만 생략했다. 상석 앞에 설치된 8각형 장명등은 태조 건원릉때부터 계승해온 조선 왕릉의 장명등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능의 좌우에서 시립하고 있는 문무인석은 안정적인 신체 비례를 갖추고 있으며 복식(服飾)과 갑주(甲胄)의 표현이 정밀하다. 문무인석의 얼굴 표정 또한 사실적으로 조각돼 있어 성종대의 우수했던 석조 예술 수준을 가늠할 수 있다. 이외에도 망주석, 마석, 양석, 호석 등이 능을 외호(外護)하고 있다. 한편 정자각의 오른쪽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로 지은 팔작지붕 건물의 비각이 있다. 내부에는 능표석이 안치돼 있는데 1817년(순조17) 공릉 표석과 함께 제작된 것이다. 비석의 앞면에는 큰 전서로 '조선국공혜왕후순릉(朝鮮國恭惠王后順陵)'이라고 써 놓았으며 뒷면에는 단정한 해서 글씨로 음기(陰記)를 기록해 놨다.

▲ 서울시 강남구 압구정1동. 조선 세조 때의 권신 한명회가 지은 정자 압구정(狎鷗亭)이 있던 터. 지금은 압구정 현대아파트 11동 뒤에 터를 알리는 비석만 서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순릉은 1648년(인조26) 혼유석과 문·무인석 등이 훼손되고 정자각의 신문(神門)이 부서졌으며 1667년(현종8)에는 제기(祭器)를 도둑 맞기도 하는 등의 수난을 겪었다. 또한 순릉에 큰 호랑이(大虎)가 출현했다는 기사가 1699년(숙종25)과 1757년(영조33)에 나오고 있어 상당히 흥미롭다. 당시 순릉 주변에 큰 호랑이가 출몰할 정도로 수목이 울창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의 호랑이가 다시 한번 출몰할 수 있을 정도의 수풀을 가꿔야 하는 것이 우리 후손의 사명이 아닌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글 /이민식 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 sung5dang@korea.kr
사진/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