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윤인수기자]아마 천직을 향유하는 사람이라면 세상 살면서 드물게 보는 행복한 사람이 틀림 없을게다. 타고 나기를 그일을 하게끔 운명지어진 사람, 그리고 그 일로 인간적 성취와 사회적 명망을 쌓을 수 있다면 참 행복한 인생 아닌가. 코리아골프아트빌리지 이동준(69) 회장이 딱 그런 사람이다.

이 회장에게 사업은 운명이다. 그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사업가의 길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정치권의 유혹도 뿌리칠 수 있었고, 부도 직전의 상황에서 도피하려는 비겁한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이 회장은 고희를 목전에 둔 지금도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며 행복한 미소를 짓는 청년이다. 그 청년이 최근에 큼지막한 상을 받았다. 지난 11일 한국중재학회(회장 김석철 경원 무역학과 교수)가 해마다 시상하는 국제거래신용대상을 수상한 것이다. 그동안 삼성계열사, stx, 포항제철 등 국내 굴지 기업들이 대외신인도를 인정받은 상이다.

▲ 코리아골프아트빌리지 이동준 회장은 사업을 시작하려는 젊은이들에게 "근면과 긍정적 사고는 필수"라고 조언했다. /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그 소식을 듣고 지난 13일 코리아CC 클럽하우스 식당에서 이 회장과 마주했다. "사는 날 까지 일이나 하자고 작정한 참인데 공교롭게 큰 상을 받게 됐네. 더 잘하라고 격려 받은 셈이니 이제 죽는 날까지 은퇴하기는 힘들겠는 걸. 허허허…." 축하드린다는 인사말에 되돌아 온 이 회장의 웃음이 투명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잘나가던 군납업체 샐러리맨으로 지내던 이 회장이 무역업체 유성을 세운 건 1969년의 일이다. 안면을 트고 지내던 한 중소기업 사장이 어느날 묻더란다. "미스터 리. 10년 뒤 그 회사 임원할래, 아니면 자네 회사 사장할래?" 결국 그 질문이 그의 인생을 바꾸었다. 세달을 고민한 끝에 형 사무실의 백색전화와 전세금을 밑천으로 사업을 일으켰으니 말이다.

"진짜 낫씽(nothing)이었지. 경험도 돈도 없었어. 있는 거라곤 부지런한 천성하고 싱싱한 몸뚱이 뿐이었지. 또 하나 있다면 절대 남의 돈으로 사업하지 않는다는 신조 정도랄까…." 하지만 그는 그 시대가 요구하는 전형적인 사업가였다. 수출거리라고는 고작 가발과 합판 정도 뿐인 시절, 모두가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동등한 조건 속에서 그는 누구 보다 부지런히 뛰었고 승승장구했다.

포항제철이 서기도 전인 1971년 한국인 최초로 철강재를 수출했고, 1977년 온나라가 수출 100억불에 감격할 때 그는 혼자 1억불을 감당했다. 스물아홉에 사업을 일으킨지 10년만에 그는 산업훈장, 철탑산업훈장,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듯이, 이 회장도 40년 가까이 무역업과 리조트 사업을 일으키면서 속이 사막 처럼 타들어간 고비가 수없이 많았다. 첫번째 고비는 동독해운업체의 사기에 걸려 중동거래선에 100만달러를 물어주어야 할 때였다. "막막했지. 하지만 감당하기로 했어. 당시 중동 사람이 나를 '코리 미스타 리'로 불렀어. 코리아의 이동준이란 거지. 한국대표라는 거잖아. 어차피 나라에서 내준 복수여권으로 사업을 시작한 사람이니, 나라 생각을 한 거지." 자신의 생돈으로 신용을 지킨 덕일까. 중동의 바이어들은 이후 그를 더욱 신뢰했고 유성의 중동 수출선은 더욱 탄탄해졌다.

▲ 국제거래신용대상을 수상한 코리아골프아트빌리지 이동준(사진 왼쪽) 회장과 부인 백혜자 여사.

두번째 고비는 80년 신군부가 득세한 살벌한 시절에 찾아왔다. 합판 수출을 위해 선수금까지 지불한 상태에서 합판생산업체인 동명목재가 신군부에 의해 해체된 것이다. "그땐 정말 재산을 정리해 미국으로 도망갈까 생각도 했어. 암담하기만 했지. 그 당시 돈으로 23억원을 들여 합판을 새로 사서 보내줘야하는 상황이었으니 말이야." 그때 그는 또 한번 운명적인 체험을 하게된다. "하루는 교회를 갔는데 말이야, 목사님이 헬렌켈러 이야기를 하더라고. 그러면서 맹인들의 개안수술 말씀을 꺼내더라구. 갑자기 정신이 나는거야. 아니 사지 멀쩡한 내가 좌절하기에는 너무 억울하다. 힘이 불끈 솟더군."

그는 용단을 내렸다. 기업은 적색업체로 분류돼 도산직전이었으나 전재산을 털어 신용을 지켰고, 한발 더 나아가 시각장애인 100명의 개안수술비를 부담하고 나선 것이다. 글쎄 그 덕분일까. 그 이후 부터는 순조로웠다. 83년 동명목재 담보금액이 나왔고, 허가 자체가 큰 사업권리였던 골프장 건설허가도 떨어졌다. 유성은 40년간 30억불을 수출한 공로로 97년 은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박정희 시대에 기업을 일으켜 노무현 시대 까지 반세기 가까이 수출전선을 지켜낸 셈이다. "윤 부장. 그때 내가 미국으로 도망갔더라면 지금 우리가 이 클럽하우스에서 이렇게 마주하고 있었겠나. 허허허." 근면과 신용으로 쌓은 40년 사업내공이 담긴 웃음은 여운이 짙었다.

요즘 이 회장은 바쁘다. 새로운 사업거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헬스케어 사업이다. 노령화 시대가 사업의 단초가 됐다. 의료와 관광을 접목한 리조트개발 사업인데 이미 입지는 정해진 상태이다. 올 봄에 남대문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점점 초식성으로 변해가는 것 같다"던 그가 헬스케어 분야에서 사업가로서의 육식본능을 되찾은 듯 싶었다. 지난해 매입한 일본 고베의 아와지 골프클럽도 헬스케어 사업의 거점으로 삼을 계획이다.

끝으로 사업을 시작하려는 젊은 청춘들에게 한 말씀 부탁했다.

"사업가에게 근면과 긍정적인 사고는 필수야. 우리 시대는 그것만으로도 못사는 나라를 이만큼 일으켜 세웠지. 그런 점에서 우린 보람된 세대라 할 수 있지. 하지만 이제 사업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은 몸으로만 때울 수 없어. 글로벌 시대에 맞는 사고의 전환이 있어야지. 나도 새로운 세상이 왔으니 새 일거리를 부지런히 찾아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