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름이 가려나? 완연한 가을 날씨다. 오랜만에 밤 산책을 나섰다. 집 앞 공원 벤치에 앉아 한동안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사이로 몇몇 별들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공원의 나무들을 어루만지며 지나가는 바람의 옷자락엔 약간의 스산함이 배어 있었다. 언뜻언뜻 비치는 달빛에 가슴이 하얗게 물드는 것 같았다. 울타리 쪽에서 들려오는 귀뚜라미 울음소리에 잠시 취해 있다, 고양이 한 마리가 가을의 문 앞을 서성이는 듯 공원 안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것을 나는 유심히 지켜보았다. 처음 보는 녀석이었다.
"너도 나와 같은 거니? 무언가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무심코 거리로 나서서 시간의 틈을 메우고 있는 거니?"
내 말을 알아들었을까?
녀석은 내가 앉아 있는 벤치 위로 휙 올라서곤 자세를 고쳐 앉는다. 앉음새가 꼭 아내를 닮았다. 보온병에 담긴 원두커피 향을 맡는가 하면 뚜껑을 앞발로 툭툭 건드린다. 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눈치다. 나는 달을 더 바라다보았고, 녀석 또한 내가 바라보는 쪽을 멀거니 응시하는 듯했다.
녀석과 눈이 마주쳤다. 녀석의 배는 동그랗게 불룩해져 있었다. 새끼를 밴 것이리라. 목 아래를 쓰다듬어주자, 녀석은 눈을 감은 채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울대의 떨림이 그대로 손에 전달됐다. 그르렁거리는 숨소리가 듣기 좋았다. 고양이는 따뜻했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는 대화를 나눴다. 약간 망설여졌지만, 녀석에게 이름을 붙여 주고 말았다. '묘심(猫心)', 고양이 '묘(猫)'에 마음 '심(心)'.
"심아, 가을이구나! 이젠 어디로 갈 거니?"
"……"
벤치 아래로 사뿐히 내린 묘심은 내 다리를 한 바퀴 빙 돌더니 나를 한 번 올려다보곤, 어슬렁어슬렁 길을 떠났다.
오늘 난 과묵한 녀석 하나를 친구로 얻었다. 내일 또 볼 수 있을까? 바람이 한결 차다. 곧 노란 은행나무 잎들이 거리를 술렁거리다 겨울의 숲 쪽으로 우우우 달려갈 것이다. 아내의 재를 이 곳 화단에 뿌린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다.
동사무소 직원이 방문하여 이것저것 캐묻고 갔다. 통장인 옆집 여자가 신고한 탓이리라. 무의탁 독거노인 판별을 위한 방문이었을 게 분명했다. 멀쩡한 자식이 셋이나 있고 일시불로 받은 연금으로 생활비 걱정은 하지 않는다는 말로 돌려보냈지만, 다음 날부터 문 앞에 도시락을 두고 가기 시작했다. 어떤 날은 쌀을 가져다 놓았고, 반찬통도 두고 갔지만, 일절 내다보지 않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시점부터 다행히도 발길이 뚝 끊겼다.
정년 퇴임한지도 어느 새 4년이 흘렀다. 38년간 초등교사로 일했지만, 지금은 아침마다 집 앞 공원과 그 주변을 청소하고, 폐품수거로 돈벌이를 하며 지낸다. 쓰레기를 종류별로 분리수거하고 비질을 마친 다음, 말쑥해진 공원 주변을 바라보는 감회는 말로 다 설명하기 어렵다. 반평생 교직에 있었지만 국가에 헌신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내가 헌신할 상대는 나와 함께 생활하는 아이들이지 국가가 아니었다. 더 많은 월급을 바라거나 승진을 종용하지 않던 아내에게 늘 고마웠다. 대신 아내의 고생이 컸다. 퇴임식을 사양하고 조용히 학교를 떠나던 날, 모든 게 후련했다. 인생의 먼지를 모두 털어낸 심정이었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기분이었다.
2.
"돈이 좀 필요해요."
둘째아들 원석이 전화로 한참 뜸을 들이다 한 말이다. 한 달 전 수술 중 환자가 사망하는 의료사고를 낸 막내 원호가 합의금으로 연금의 밑바닥 잔고까지 싹 쓸어가 버린 일은 아직 모르는 눈치다. 환율이 올라 적게 송금한 돈이 마음에 걸렸다. 음대를 졸업하고 3년간 사립 고등학교 음악교사를 하다 미국 유학을 떠났다. 서른이 다 돼 집안에 처음 여자를 데려와선 결혼을 공포하곤, 한 달 만에 파혼했다. 그 뒤론 그나마 있던 말수마저 줄었다. 죽기 전 아내는 짧은 통화로라도 목소리 듣는 걸 감지덕지하곤 했다.
10년 전 원석이 제대하던 날, 퇴근 후 현관에서 나를 맞은 건 원석이 아니라 망치였다. 검은색 털에 늙수그레한 삽살개 혼혈이었다.
"부대에 그냥 두고 오기 뭣해 데려왔어요."
원석은 2층에서 내려오다 층계참에 다소곳이 서 있던 망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머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원석아, 와서 잡채 간 좀 봐라."
들뜬 아내의 목소리에서 오랜 시름 하나가 사라진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행동이 굼뜨고 느린 데다 숫기도 없고 말수마저 적어 아내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원석의 제대는 아내에겐 기적 같은 일이었다. 둘째가 부엌으로 간 사이 망치와 나는 거실을 사이에 두고 잠시 대치했다. 그게 녀석과의 첫 대면이었다. 녀석은 고개를 뻣뻣이 든 채 내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꼬리를 흔들어 반겨하지도 않았고, 주눅이 든 것 같은 표정도 아니었다. 침착하게 주변을 살피는 시선에서는 약간의 호기심도 엿보였다. 그런 태도가 왠지 모르게 기품이 있어 보였다.
망치는 생각보다 적응력이 빨랐고, 나름 애교도 있었다. 집안에 자식 하나가 더 생긴 것 같았다. 아내는 망치를 꼭 둘째 대하듯 했다. 일을 마치고 귀가해서도 망치부터 찾았다. 원석아, 이리 온. 어떨 땐 망치를 그렇게 부르기도 했다. 아내는 살뜰하게 망치의 잠자리를 보살피고 끼니때마다 밥을 해 먹였다. 욕실에서 정성껏 망치를 씻기는 아내의 눈빛엔 애정이 가득 서려 있었다. 둘이 함께 손을 잡고 뒷산으로 산책 겸 운동을 나갈 때에도 아내의 눈은 항상 저만치 앞서 걷는 망치를 향해 있었다. 한 번은 그 눈빛이 하도 끈끈하고 친근하여 뜬금없이 질투가 치솟을 지경이었다.
망치는 죽기 1년 전부터 치매를 앓았다. 노환이었다. 어느 날부턴가 아내와의 산책을 거부하곤 정원만 빙빙 맴돌았다. 느닷없이 하늘을 향해 짖어대기도 했다. 그렇게 좋아하던 참치 통조림도 마다하고 아내가 직접 밥을 떠 입에 넣어줘도 도통 먹으려 들지 않았다. 나중엔 더는 삼킬 힘이 없는지 입 밖으로 연방 밀어낼 뿐이었다. 기력이 쇠해 더는 거동조차 못하게 된 망치는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그러나 똥오줌만큼은 신기하리만치 잘 가렸다. 그것이 습관의 위력인지 망치의 의지인지 분간할 순 없었지만, 누가 되지 않으려 애쓰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철저했다.
"치맨데 흔치않은 경우죠. 드물지만, 간혹 그런 녀석들이 있어요. 영물이 따로 없죠."
망치의 안락사를 돕던 광태가 한 말이었다. 광태는 성형외과 의사인 막내 원호의 고교동창으로 강남 반포동에서 동물병원을 운영한다. 좀 덜렁대긴 해도 똑똑하고 싹싹한 아이였다. 안락사 주사제는 색깔별로 구분된 각기 다른 병에 담겨져 세 개가 한 세트인 듯 별도의 케이스 안에 들어 있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는 모양이구나."
"예전에 비하면 많이 늘었어요. 사람에겐 안 되는 일이지만, 동물한텐 다반사인 게 안락사예요."
수술대 위에 맥없이 누워 있는 망치의 안색은 몹시 초췌해 보였다. 광태는 망치의 왼쪽 앞발 겨드랑이 근처에 링거를 꽂고 천천히 붕대를 감아 고정했다. 뜻밖에도 안락사 방법은 간단했다. 곁에서 잔뜩 긴장을 하고 지켜본 것에 비하면 싱겁기 짝이 없었다. 진통제, 근육마비제, 심장마비제 순이었다. 주의할 점은 순서였다. 세 번째가 먼저 주사되면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인해 극심한 통증을 겪을 수 있다는 것이 광태가 들려준 말의 요지였다.
"갔군요."
동공을 주의 깊게 살피고 청진기를 귀에서 뗀 광태는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망치는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깊은 잠에 빠져든 것처럼 보였다.
광태는 한사코 돈 받기를 거절했다. 망치를 편안히 보내준 답례로 내가 대신 동물병원을 봐주기로 하고 원호를 불러 고급 한정식 집에서 비싼 점심을 사게 했다. 광태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몰래 주사제 한 세트를 챙겼다. 아내가 죽기 석 달 전의 일이었다.
3.
아내는 초등학교 졸업 후 스물 셋이 될 때까지 서울 평창동 큰집에서 할머니의 병수발을 들며 살았다. 가난한 집 팔남매 중 둘째로 영월에서 태어났다. 오빠와 동생들의 교육비를 대기 위한 상경이었고, 집안 어른들의 거래에 따른 것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사촌동생들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보낸 뒤, 할머니 방에서 내온 기저귀와 이불을 빨아 넌 다음, 집안 청소를 하고 시장을 보고 반찬을 만들고 저녁밥을 지으며 살았어요. 말이 좋아 손녀고 조카에 사촌 누나지 식모나 다름없는 생활이었죠. 10년 동안 같은 일을 반복했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할머니를 미워해 본 적은 없어요. 차라리 어른들이 미웠죠.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제게 미룬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어떤 날은 할머니가 측은하기도 했지만, 미워하진 않았어요. 연탄가스 중독으로 하반신 마비에 치매까지 앓았거든요. 할머니는 가끔씩 나를 알아보고 웃기도 했지만, 기저귀에 똥을 싼 채 앉은 자세로 방바닥을 쓸고 돌아다니기도 했고, 기저귀를 벗어 벽에다 똥을 발라 놓기도 했어요. 그런데 정말 이상했던 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딱 일주일 전에 제 정신이 돌아왔다는 점이에요. 여느 때처럼 기저귀를 갈고 방청소를 하고 이부자리를 정리한 다음 방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이러는 거예요. 영심아! 대야에 물 좀 떠 오너라. 깜짝 놀랐어요. 할머니가 제 이름을 부른 건 그때가 처음이었거든요. 할머니는 손수 세수를 한 뒤 머리를 빗고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어요.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조카들은 물론, 기별을 받고 황급히 올라온 부모님까지 다 알아봤고, 이름을 불러가며 두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으셨죠. 그렇게 일주일을 아무렇지 않은 사람처럼 지내곤, 장독마다 수북하게 눈이 쌓이던 1월의 어느 날 아침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잠에서 깨지 않았어요. 장례 절차를 마친 후 큰집을 나서면서 전 맹세했어요. 사랑하는 이들에게 똥오줌을 받아내게 하고 아랫도리를 내보이는 짓은 하지 않으리라, 때가 되면 고귀하게 삶을 마무리하리라 다짐했어요."
1969년 가을, 첫 번째 데이트 장소였던 경복궁 중궁전 뒤뜰 툇마루에 앉아 아내가 처음으로 내게 들려준 이야기였다. 어찌나 확고하게 말하던지 아내의 목소리엔 강한 힘이 서려 있었다.
아내의 유일한 취미는 독서였다. 주로 인문학 관련 책들을 선호했지만, 활자가 박힌 거면 뭐든 읽어치우는 습벽이 있었다. 책을 읽다가 까맣게 태워먹은 냄비가 한 둘이 아니었을 정도로 집중력 또한 대단했다. 아내는 제도권 공부를 못한 자신의 한을 자식들을 통해 풀려 하지 않았다. 반찬가게에서나 집에서나 틈만 나면 책을 봤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대입고사를 볼 때까지 자식들 하나하나를 길러내는 아내의 정성은 나로선 도저히 흉내조차 못 낼 정도였다. 아이들이 시험 때마다 벼락치기로 밤을 샐 때면, 곁에 나란히 앉아 책을 읽었다. 대입고사 날도 남들처럼 간절히 기도하는 법도 없었고, 하릴없이 대학 정문에 엿을 붙이러 가지도 않았다. 그런 날은 반찬가게 문도 열지 않고, 꼼짝도 않은 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아내는 오직 제 힘으로만 나로선 도저히 꿈도 꾸지 못할 다양한 책들을 섭렵해 나갔다. 서가를 가득 메운 책들이 아내가 남긴 유일한 유품이었다.
막내 원호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시작한 반찬가게 수입은 나보다 나았다. 아무리 고단해도 피곤한 내색 하나 없이 새벽같이 일어나 일터에 나갔다. 그런 탓에 그 전보다 커피 섭취량이 늘었다. 아내가 만든 음식은 점심 한 나절이면 다 팔려 나갈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전셋집 옥상 텃밭에서 자신이 정성껏 가꾼 유기농 야채들을 재료로 쓰는 것이 비법의 핵심이었다. 또한 부족한 재료들은 직접 산지를 돌며 거래농가들을 선별하고 다녔을 만큼 심혈을 기울였다.
아내의 실력은 3년간 천천히 입소문이 났다. 부촌의 잔치음식들까지 도맡아 하게 된 후로는 수입이 눈덩이처럼 불었다. 그런 만큼 늘 잠이 부족했고, 식사 또한 불규칙했다. 시간에 맞춰 잔칫상을 내기 위해 이집 저집을 끼니도 거른 채 먹는 둥 마는 둥 뛰어다녔고, 남의 음식은 공들여 만들어 놓고 정작 집에 돌아온 자신은 지쳐 아무 것도 못 먹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하루 4시간도 못 자고 돌아다니던 바쁜 와중에 생각지도 못한 원호의 가출과 오토바이 사고가 잇따라 터져 아내의 속을 뒤집어 놓고 말았다. 유학 간 큰딸 원희와 군대 간 원석에 대한 걱정 또한 끊일 날이 없었다. 그렇게 6년을 더 버틴 아내는 4월의 화창한 봄날, 일산 장항동 전원주택으로 입주할 수 있었다.
4.
"복수가 찼어요."
응급실 당직 수련의가 한 말이었다. 처음엔 단순 복통인 줄로만 여겼으나, 뜻밖에도 아내의 병명은 난소암 말기였다.
아내는 유독 병원가기를 꺼려했다. 어차피 죽을병은 의사도 못 고친다는 게 평소 아내의 지론이었다. 현대 의학을 맹신하는 태도에 대해서도 못마땅해 했다. 원희가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날도 그랬다. 느닷없이 쌍꺼풀을 하고 코를 세우고 나타난 원희에게 아내가 처음 한 말은 '고생 많았지'가 아니었다. '수술대 위에 누워 정신을 놓은 채 의사에게 몸을 맡기는 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다신 그러지 마라'였다.
"여기가 자궁이고 이게 난소인데, 이거 보이시죠?"
모니터 속 마우스가 아내의 자궁 끝 난소에 위치한 종양의 궤적을 따라 움직였다. MRI 사진 속 종양의 크기는 상상 외로 커 보였다. 담당의는 원호의 동문 선배로 여성암 분야 국내 권위자다. 그는 공손한 말씨로 말을 이어갔다.
"전이가 벌써 많이 진행됐어요. 여기 보이시죠? 나팔관인데 자궁과 함께 적출해봐야 소용이 없을 정도로 넓게 퍼져 있어요. 생각보다 심각해요. 난소암은 전이 속도가 매우 빨라요. 혈액 검사로도 발견되지 않아 어머님처럼 처음 병원에 오면 대개 다른 부위들로 전이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미국에선 '무언의 살인자'라고 부를 정도로 매우 공격적인 암이에요."
아내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가끔 통증이 있을 때마다 진통제를 먹고 그럭저럭 넘긴 게 저렇게 큰 종양을 키운 원인이리라.
"다른 부위로도 이미 전이됐을 가능성이 높아요. 일단 입원하시고 몇 가지 검사를 더 한 다음에 결과를 보고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죠."
말기 암환자 선고를 받은 후 아내가 처음으로 한 일은, 정원의 텃밭을 확장하는 공사였다. 장독으로 쓸 옹기들을 사들이고, 인부들을 불러다 벽돌을 쌓고 시멘트를 바르고, 흙을 퍼 나르고 정성껏 옹기들을 묻었다. 가장자리 쪽으로 배치한 화단에 꽃들을 옮겨 심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농산물 시장에 나가 장을 본 후 김장을 하고 된장과 고추장, 간장을 담갔다. 피곤한 기색도 없이, 일사천리로 해치웠다. 그리곤 사흘을 꼬박 몸살을 앓았다.
아내의 노력은 한 달도 못 가 수포가 되고 말았다. 집을 부동산 중개소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던 건 원호 때문이었다. 10년 넘게 살아온 2층 전원주택이었다. 전문의 자격을 따자마자 강남에 병원을 개업해달라는 원호의 우격다짐에 '여보, 당신이 참아요. 그냥 들어 줍시다'는 말이 그만이었다. 아내는 서둘러 이삿짐을 꾸려 뒤도 한 번 안 돌아보고 나섰다.
아내가 새로 정한 보금자리는 부천시 원미구 고강동에 있는 3층 단독주택 반 지하에 자리해 있었다. 서울 변두리와 접경인 지역으로 근처엔 아담한 산도 있어 공기도 맑았다. 다만 김포공항이 가까워 소음이 좀 심한 편이었다. 새로 이사 온 집에서도 아내의 눈썰미가 느껴졌다. 방 두 칸에 좁은 욕실이 딸린 깔끔한 집이었다. 둘이 살기에 딱 좋은 평수였다. 일산 전원주택 정원에 있던 아내의 텃밭은 집 앞 공원 울타리 가장자리로 일부 자리를 옮겼고, 나머지는 장독들과 함께 3층 주인집 옥상에 옮겨 놓았다. 주인집이 옥상의 빈터를 빨래를 널어두는 곳으로만 사용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지만, 아내가 이 집을 고른 데는 그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출입문이 주택가 자그마한 공원의 대각선 맞은편에 위치해 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으리라.
"당신과 다시 결혼해서 새로운 인생을 사는 기분이야."
이사 후 첫날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기지개를 켜며 아내가 한 말이었다. '우리의 첫 보금자리였던 부평 사글셋방보단 훨씬 좋다'며 아이처럼 즐거워했다. 그때 아내의 표정에선 신혼 때 못지않은 열정이 느껴졌다. 예순셋의 말기 암환자라곤 도무지 믿겨지지 않을 만큼 밝고 활기차 보였다.
5.
내 팔에 의지해 암센터 병동 복도를 걷다 말곤 한 움큼 빠진 머리카락을 쥐어 보이며 머쓱하게 웃던 아내의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급속도로 나빠졌다. 난소에서부터 시작된 종양은 아내의 복막과 골반 내 림프절로도 이미 전이된 뒤였다. 전이 속도는 담당의의 예측을 초월했고, 눈 깜짝할 사이에 진행되었다. 흉부와 목의 임파선까지 전이되는 데엔 석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아내는 수술은 단호하게 거부했지만, 큰딸 원희가 닦달하다시피 몰아세운 항암치료만큼은 끝내 만류하지 못했다. 원희의 관심은 아내가 겪게 될 고통보다는 자기 체면을 차리는 데 있는 듯했다. 방사선 치료의 후유증 따윈 관심조차 없다는 말투였다.
"엄마는 내가 나중에 사람들한테 '제 어미가 암에 걸렸는데 돈도 많이 버는 년이 맹추같이 아무 것도 안 하고, 엄마 말대로 곱게 죽게 만든 천하에 못된 년'이란 소리를 꼭 듣게 해야 속이 시원하겠어? 남들 다 그렇게 하는데, 나도 효도 좀 하자.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해라. 엄마."
나는 원희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난생 처음 있는 일이었다. 원희는 아내의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부지불식간의 일이었지만, 달래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자기 생각을 아내에게 관철할 필요가 있을 때, 원희는 말끝마다 '엄마'라는 말을 넣어 발음하곤 했다. 답답해 죽겠다는 표정과 함께. 그 말만 나오면 아내는 즉각 꼬리를 내렸다. 원희는 '엄마'라는 말을 주로 아내의 입막음용으로 썼다. 원희가 한 말은 '고통을 참다 죽어라'는 것과 같았다. 그런 걸 자식이랍시고 끌어안아 달래고 있는 아내를 보곤, 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쟤들도 한이 될까봐 저러는 모양인데, 그냥 하라는 대로 하게 놔둡시다. 그래야 나중에 어미 탓 않고 잘들 살 거 아니우."
원희는 매번 그런 식이었다. 아내가 질색하던 밍크코트를 강제로 입혀선, 기필코 제 자식 돌잔치에 앉혔다. 강남 영어학원에서 유명세를 타고 EBS 영어강좌를 맡게 된 기념으로 최신형 냉장고와 로봇청소기를 집안에 사들였을 때도 그랬다. 그것들을 일러 엄마한테 주는 '선물'이라 말했다.
"멀쩡한 냉장고가 있고, 진공청소기도 쓰던 게 있는데, 뭘 또 사니? 필요하면 너나 써라. 그리고 '선물'은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주는 거지, 필요하지도 않은 걸 강제로 떠맡길 때 쓰는 말은 아니잖니?"
그러나 가전제품 대리점 직원들이 새 냉장고를 설치하고 전에 쓰던 것을 수거해 돌아갔을 때도 아내는 원희가 진두지휘하는 대로 그냥 내버려둘 뿐이었다. 매사가 그 모양이었다. 원희는 항상 자기 생각만 앞세워 행동했고, 원희가 그럴 때마다 아내는 마지못해 수긍하곤 했다.
아내를 막무가내로 떠밀다시피 국립암센터 병원으로 데려온 것도 원희였다. 그걸 자신이 베풀 수 있는 효도의 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그 덕에 아내는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지만, 항암치료의 고통을 안겨준 원희를 탓하는 말은 일절 꺼내지 않았다. 대신 이를 꽉 깨물고 견뎠다. 어금니가 다 빠져버릴 때까지. 아내는 나로선 흉내조차 못 낼 지독한 면이 있었다.
한 달만 있다 가자던 아내는 원희 덕에 두 달을 더 병실에 머물러야 했다. 아내는 집에 가고 싶어 안달이었다. 주인집 옥상에 둔 장독들과 공원 화단에 옮겨 심은 꽃들 생각에 한시도 시름을 놓지 못했다. 옷가지를 챙기러 내가 잠시 집에 다녀왔을 때도 그것들을 살피지 않고 서둘러 돌아온 나를 들들 볶았을 정도로, 곁에서 간병하는 내 안색보다 멀리서 찬바람을 맞고 있을 그것들의 안부를 살피는 데 더 혼을 쏟았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여보."
퇴원 수속을 마치고 온 내 손을 잡고 병실을 나서던 아내가 한 말이었다. 검정색 니트 모자를 뒤집어쓰곤, 3일째 항암치료로 아무 것도 삼킨 게 없는 아내는, 까맣게 타 들어간 혀를 날름 내보이곤 환하게 웃었다. 아내의 살을 갉아먹으며 아내의 몸 전역으로 빠르게 진군해 가던 종양들도 아내의 환한 미소만큼은 쉬이 점령하지 못했다. 아내는 낯선 병실에서 죽음을 맞고 싶어 하지 않았다. 시내 아이스크림 가게 창가에서 아내는 함박눈처럼 웃으며 퇴원을 자축했다. 죽기 두 달 전의 일이었다.
6.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원주 만종분기점을 지나 제천을 거쳐 영월에 도착할 때까지 아내는 잠에 빠져 있었다. 4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을 40년 만에 온 것이다. 죽기 한 달 전 아내와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동강에 닿자마자 아내는 번쩍 눈을 떴다. 아내는 밖으로 나가 강가를 따라 걷다 얼마 못 가 모래톱 위에 앉아 숨을 골랐다.
"강은 예전 그대로네. 세찬 물살도 여전하고 빛깔도 참 곱다. 당신이 처음 데이트 신청했을 때, 당신 모습이 어땠는지 내가 말했었나?"
"아니?"
"물에 빠진 사자 같았어."
"뭐?"
아내와 나는 마주 보고 깔깔 웃었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밝은 모습이었다.
"당신이 교무실 창문에 노크하고 밖에 서 있었잖아."
"학교에 맨 먼저 출근하던 사람이 당신이었잖아. 아무도 없을 때 말하려고 밤을 꼴딱 새우고 갔었지."
"당신 그때 이렇게 말했어. 내일 시간 있어요? 함께 경복궁에 갑시다."
내 말투를 그대로 흉내냈다. 아내와 난 폭소를 터뜨렸다. 아내는 신기할 정도로 흉내를 잘 냈다. 아이들의 볼멘소리를 그대로 따라 했고, 가식적인 정치인들의 특징만 포착해 잘도 흉내냈다. 아내의 성대모사엔 위트가 넘쳤다.
"교무실에서 청소를 끝내고 화분에 물을 주고 있는데, 당신이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오는 걸 봤어. 모른 척 했지."
"다 알고 있었다는 얘기네."
"곱슬머리에, 머리도 안 감고 나온 게 꼭 웅덩이에 빠졌다 나온 사자 같았거든. 난 당신이 아이들 가르치는 모습이 좋았어. 학교에 제일 먼저 출근한 사람도 당신이었고, 나머지 공부시키고 교재 연구하느라 제일 늦게 퇴근하던 사람도, 애들하고 운동장을 누비며 뻘뻘 땀을 흘리며 공 차던 사람도 당신이었어."
"당신 참 예뻤지. 교무실에 잠깐 들렀는데, 그때 당신 철학책을 읽고 있었어. 아무도 없을 때 틈날 때마다 보는 것 같았거든. 누가 들어오면 금방 덮어버리고 딴 일을 하곤 했으니까. 어찌나 집중해서 읽던지 내가 가까이 가는 기척도 전혀 못 느끼는 것 같더라. 당신 집중력만큼은 지금도 대단하잖아."
"근데 왜 아무 말 안했어?"
"내가 그 쪽엔 젬병이잖아. 아는 것도 없고. 책보단 그림을 더 좋아했지. 그래도 당신, 그쪽에 대해 나한테 뭘 물어보거나 아는 체 한 번 안 했어."
"교무 보조로 일했지만, 난 그때 당신 보는 재미로 학교에 다녔어. 초등학교 졸업하고 큰어머니 따라 서울로 올라가는 차 안에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 중학교에 못 간다고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나는 나대로 나만의 삶이 있을 거다."
그때 마침 수달 한 마리가 나타나 세차게 자맥질을 하곤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낮에 돌아다니다니 배가 몹시 고픈 모양이었다.
"여보, 저기 저 수달에게도 삶이 있어. 그냥 배가 고파서 나온 게 아니라 새끼들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한 낮에 먹이를 구하러 나왔다고 생각해봐. 삶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야. 어미 수달의 마음, 그 깊은 속을 누가 다 알겠어? 삶이란 쉽사리 이해될 수 있는 게 아니야. 잠자코 제 뜻을 펼치는 것이고 혼신의 힘을 다해 정면을 향해 휘적휘적 나아가는 거지. 야생의 수달은 가족의 일을 의사와 상의하지 않아. 병원이나 교회로부터 가족의 죽음을 인준 받지도 않지. 굶어죽을지언정 남에게 먹이를 구걸하지도 않고. 제 힘만으로 혼신을 다해 삶을 영위하다 홀로 생을 마감할 뿐이야. 반면에 인간은 며칠 더 살겠다고 죽을 때까지 병실에 누워 고통을 감수하지. 고통스러워 그만 죽고 싶어도 마음대로 죽지도 못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겪는 일치곤 정말 비인도적인 관행이지. 난 그렇게 살다 죽지 않을 거야, 여보. 강요된 지침을 따르는 건 내 방식이 아니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지?"
그사이 수달이 지나가면서 만든 물길은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아내와 나는 한동안 동강의 흐름과 계절의 흐름이 맞닿아 흘러가는 것을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는 내내 잠에 빠져 있었다. 아내가 한 말은 내 머리를 강타하는 깊은 울림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안락사에 대해 아내만큼 확신이 서지 못한 상태였다. 낮게 코를 골며 잠에 빠진 아내에겐 누구도 범치 못할 고귀한 혼과 힘이 내재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아내의 의지를 가로막을 자신이 없었다.
7.
퇴원 후 그토록 그리던 집에 도착한 아내는 온종일 옥상의 장독들을 정성껏 닦는가 하면, 공원 화단에 옮겨 심은 꽃들에 물을 주었고, 밀린 청소와 빨래를 하고 묵은 옷가지들을 정리했다. 어쩐 일인지 자식들과의 통화를 피했고, 대신 각자에게 부칠 마지막 편지를 썼다. 아내에게서 슬픈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내는 바위처럼 단단해 보였고, 햇살 가득한 잔잔한 바다처럼 평온해 보였다.
드디어 아내가 정한 날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아내의 요구대로 병원에 전화를 넣어 담당의에게 아내의 상태를 설명하고 도움을 청했다. 통증이 심해져 무통주사와 영양제를 더 맞을 수 있도록 병원에서 사람을 보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다음날 오전에 간호사가 다녀간 뒤, 아내는 영양제와 무통주사제가 혼합된 링거액을 덜어내곤 조리개를 조여 두었다가 저녁밥상을 물리고 다시 풀어놓았다. 안락사를 의심받지 않게 하려는 아내의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었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주사액들이 쭉정이같이 말라버린 아내의 겨드랑이 중심정맥을 타고 심장으로 들어갈 터였다.
그날 오후에 아내는 마지막으로 공원의 꽃들을 둘러보았고, 주인집 옥상에 올라 장독들 하나하나를 따스하게 어루만졌다. 아마도 자식들을 무사히 키워낸 데 대한 답례였으리라. 저물녘엔 장독들 곁에 기대 앉아 한참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노을 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곁에서 링거를 들고 따라 나선 나 따윈 안중에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아내의 손등은 항암제 투약으로 생긴 상처투성이였다. 발목과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빼곡히 난 바늘구멍을 따라 피멍이 들어 까만 자국이 줄지어 앉아 있었다. 아내의 손등에 있는 멍 자국들 위로 내 눈물이 뚝뚝 떨어졌을 때, 아내는 힘없이 웃어 보이려 애를 썼다. 그 때 아내의 표정은 처음 만났을 때 내게 지어보였던 미소를 떠올리게 했다.
첫 번째 주사제 10cc를 링거 주입구에 투여하자 아내는 스르르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순서를 바꿔 주입하는 실수를 할까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두 번째 근육마비제 투약을 망설이던 나는 더 이상 울음을 참지 못했다.
"어서요, 여보."
깜짝 놀란 나는 얼른 눈물을 닦고, 두 번째 주사제 20cc를 주사했다. 그 사이 잠이 든 줄로만 알았던 아내가 낮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환청이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이 내가 들은 아내의 마지막 음성이었다. 10분이 경과한 후 심장마비제 주사를 마무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내의 얼굴과 몸은 싸늘히 식어 갔고, 딱딱해진 빵조각처럼 한순간에 쪼그라든 것만 같았다. 체온이 사라진 아내의 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아내의 죽음이 아니라 주검에 불과했다. 아내는 죽지 않았고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주검이 되어 있을 뿐이었다.
병원에 도착한 아내의 시신은 담당의의 검안을 거쳐 냉동실로 옮겨졌다. 아내의 사망은 기대했던 일이 당연히 일어난 것처럼 즉각 확인되고 승인되었다. 담당의가 사망진단서를 작성하는 동안, 나는 아내가 써 둔 메모대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가족들 외엔 조문객은 따로 받지 말라 했으니 아무 데도 연락하지 마라 신신당부를 했건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시부모를 포함한 원희네 조문객들이 속속들이 도착했고, 아내의 시신 앞에서 더 이상 소란을 피우기 싫었던 나는 원희가 하자는 대로 그냥 내버려 두었다. 아내가 죽고 나니 아내의 심정을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딴에는 엄마에 대한 사랑과 도리의 표현임을 어찌하겠는가.
입관절차를 마친 후 장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원희는 수목장을 주장했고, 원석은 가까운 납골당에 안치되길 바랐고, 원호는 적당한 장지를 물색해 볕 좋은 곳에 모시자고 했다. 결국 둘째의 양보 없는 고집으로 아내의 뜻의 일부가 겨우 받아들여졌다. 자식들에게도 저마다 타고난 기질과 욕망과 의지가 있어 부모가 바라는 대로 다 되는 게 아니었다. 애들에게 아내의 유언을 설명하다간 그대로 돌지 싶어 나는 잠자코만 있었다. 아내가 든 관이 계속 눈에 밟혔다.
"납골당은 작은 영혼들의 집결지 같아 싫어, 여보. 여기 공원 울타리에 그냥 뿌려줘요. 납골당은 좁아터진 듯 갑갑하지만, 거긴 볕도 잘 들고 내가 좋아하는 꽃들도 있잖아. 거기가 좋을 것 같아. 꼭 내 말대로 해요, 여보. 애들한테 지지 말고."
아내의 유언에 따라 내가 한 일은, 화장장 직원에게 뒷돈을 주고 아내의 유골함을 애들 몰래 바꿔놓는 것이었다. 아내가 선택한 자리는 납골당이 아니라 자신이 손수 일구고 정성을 다해 돌봤던 공원 울타리 옆 화단이었다.
집 앞 공원엔 사시사철 꽃이 피고 바람이 불고 해가 지고 달이 뜨고 새들이 운다. 아내가 마지막 보고 간 꽃은 공원 울타리를 따라 줄지어 늘어선 '가을의 여신'이었다. 아내는 코스모스를 그렇게 불렀다. 그랬던 아내가 가을의 여신처럼 떠났다. 지금 화단엔 가을의 여신이 뿜어내는 아내의 숨결로 가득하다. 모든 게 다 아내의 기획이었고, 아내의 작품이었다.
8.
고물상에게 폐품을 팔아 그동안 모아둔 돈으로 은행에 들러 원석에게 생활비를 송금하고 막 바로 귀가한 나는, 아내가 남기고 간 서적들을 뒤져 읽고 스케치를 하고 밀린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그림을 그린다. 많은 스케치와 몇 점의 유화가 있긴 하지만, 유독 아내의 모습을 담은 그림과 자화상이 많다. 생전 아내의 사진은 단 한 장도 남아 있지 않다. 아내가 다 태우고 간 까닭이다. 사진이나 보며 허송세월 하지 말라는 아내의 간곡한 부탁 때문에 말릴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이었다. 생각하면 아내의 얼굴은 실로 다채롭다. 내 기억 속의 아내는 많은 얼굴과 다양한 표정을 가진 사람이다. 한 두 장의 사진으로만 붙잡아 두기엔 너무나 많은 일들이 있었고, 무시하지 못할 값진 의미들이 담겨 있었다.
고흐가 자화상을 많이 그렸던 이유를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모델을 구할 돈도 없었을 뿐더러 홀로 생활하여 자신과 대면할 시간이 많아서였을 것이다. 물론 내 자화상은 고흐의 방식과는 딴판이다. 그건 아내의 얼굴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다. 인간적인 면모는 최대한 지양하고 동물적인 외관을 갖도록 그리되, 누가 봐도 그것이 아내의 모습임을 직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요컨대 새끼를 밴 묘심과 아내의 이미지가 중첩된 것 같은 느낌으로 묘사하되, 아내의 의지를 잘 살리는 것이다. 연애시절 추억담을 나눌 때 아내의 입에서 터져 나오던 웃음과 퇴원 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한껏 미소 짓던 순간에 얼굴 위로 감돌던 기쁨의 에너지와 그토록 해맑던 미소가 물끄러미 창밖을 보다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사라질 때의 여운과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인한 두통과 구토의 아픔을 호소할 때 머리에서 뿜어져 나오던 고통의 열기와 목에서 울려 나오던 신음까지 최대한 시각적으로 표현하려 애쓴다. 그에 맞는 색과 형태를 찾기 위해 물감들을 혼합하고 수많은 붓질을 하고 덧칠을 한다. 색의 깊이와 붓의 터치에 따라 아내의 모습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건반 위로 빗방울이 튀어 오르는 것만 같은 젊은 피아니스트의 연주처럼 붓을 든 내 손은 캔버스 위에서 춤추듯 노닌다. 어떨 땐 붓끝의 느낌이 분명치 않아 붓을 집어던지고 손끝으로 아내의 얼굴을 직접 터치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캔버스 위에서 살아있는 아내를 만난다.
작업에서 중요한 건 눈이라기보다 손의 감각이다. 추운 겨울날 야외 작업을 대비하여 장갑의 손가락 끝 한 마디를 미리 잘라두는 것은 손끝의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아내가 공원의 꽃들에게 물을 주거나 옥상의 장독들을 닦던 때의 모습이 선명치 않아 바깥에 나가 작업할 때도 영하의 날씨가 아니면 가급적 장갑을 끼지 않는다. 아내를 온전히 기억하는 것은 머리만이 아니었다. 처음 아내를 안았을 때의 느낌과 손을 잡고 함께 거닐었던 때의 감각의 주체는 머리가 아니라 손이었다. 그것은 손의 영역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타인의 손이 아닌 오직 내 손만을 가려잡은 아내의 의지가 그 안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머리가 기억하고 있는 당시의 이미지가 아니라 아내의 온기와 감촉과 섬세한 떨림을 있는 그대로 시각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중요했다. 내가 정말 그리고 싶었던 것은 아내의 이미지가 아니라 삶의 의지들이었다. 나와 함께 살며 아내가 보여주었던 기쁨과 정열의 순간들, 슬픔과 분노의 힘들 말이다. 그런 아내의 실체를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은 언제나 즐겁고 설레는 일이어서 나는 끼니와 밤낮을 잊은 채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다. 밥을 먹지 않아도 힘이 솟았고, 잠을 자지 않아도 피곤한 줄 몰랐다. 그때의 내가 느끼는 희열과 성취감은 교사생활에선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쾌감이었다.
묘심을 볼까 싶은 마음에 보온병에 원두커피를 담아 서둘러 공원에 나왔다. 처음 만났던 벤치에 앉아 묘심을 기다린다. 처음엔 길고양이인 것 같았지만, 사람을 피하지 않는 걸 보면 집고양이인 것도 같다. 생긴 걸로 치자면 보통 고양이와 별로 다를 게 없지만, 뭔지 모를 독특한 매력이 있었다. 서로에게 강한 이끌림을 느낀 우리는 말없이 친구가 되었다.
이윽고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묘심이 나타났다. 공원 왼쪽 출입구를 통과해 대각선을 그리며 당당하게 걸어왔다. 보온병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원두커피 향을 맡곤, 앞발로 요리조리 뚜껑을 가지고 논다. 한 움큼 멸치를 꺼내놨더니 냄새만 맡곤 딴 짓을 한다. 나중에 눈치 챈 사실이지만, 녀석이 가장 좋아하는 건 원두커피 향이다. 식성과 취향이 제법 까다롭다. 처음부터 원두커피 향에 끌려 내 곁에 와 앉았던 게 분명하다. 캐물으니 금세 시치미를 딱 떼고 앞발을 핥는다.
녀석과 함께 있을 때 나는 아내가 떠난 후 사람들에게서 느낄 수 없었던 편안함을 느낀다. 귀찮게 몸을 비비지도 않고 먹이를 구걸하지도 않는다. 항상 홀로 다닌다는 점도 매력적이다. 어떤 면에선 자식들보다 낫다. 성인이 된 후에도 줄곧 아내에게 의존적이었고 자식이라는 핑계와 효도라는 명분으로 자신들도 못할 짓을 아내에게 강요했던 자식들에 비하면 훨씬 고등한 동물이다. 그런 자식들에게 아내는 대체 무얼 바라며 살아왔던 걸까. 그것은 아직도 내가 선뜻 아내에 대해 안다고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는 대목이었다.
9.
"평창동 시절, 시장 사거리에 있던 커피도매점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어요. 그 집에선 커피향이 진동을 했어요. 뜨거운 물에 커피 한 스푼을 갓 풀어 놓은 듯한 향기가 좋았어요. 그땐 왜 그렇게 그 향이 좋았는지 몰라요. 그 냄새를 맡으면 피곤이 싹 가시는 느낌이 들어 좋았던 것 같아요. 항상 찬장에 있었지만 몰래 마시고 싶진 않았어요. 참다가 시장에 가서 대신 그 향기를 맡았어요. 당신은 죽어도 그 향의 진수를 모를 거예요."
아내의 찬장 한 켠엔 각기 다른 종류의 커피들이 즐비해 있었다. 가끔 커피의 혼령이 아내에게 깃든 건 아닌지 농담을 했을 정도로, 커피를 입에 달고 사는 아내의 건강이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아내의 취향과 의지를 가로막는다는 건 애초부터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커피는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보단 녹차가 좋았다. 커피를 먹고 나면 입 안이 텁텁한 게 개운한 녹차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그러던 내 입맛이 변했다. 밤새워 그림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녹차보다는 커피가 더 구미에 당겼다. 요즘은 아내만큼은 아니어도 가공된 정제커피와 갓 볶은 원두커피 향을 감별할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
오늘은 옆 마을 전원주택 단지를 돌고 왔다. 그 곳엔 쓰레기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말끔히 치워졌다기보다 버려진 게 별반 눈에 띄지 않는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부촌의 느낌 그대로다. 이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엔 제법 공들여 지은 고급 인테리어의 비싼 식당들도 몰려 있고, 적당한 크기의 유기농 전문 매장도 있다. 건물 뒤쪽엔 항상 큰 힘 들이지 않고도 얻을 수 있는 게 참 많다. 유통기한이 지난 건 물론이고 포장한 지 일주일도 안 돼 버려진 것 또한 수두룩하다. 바게트와 쿠키, 치즈머핀과 우유식빵, 파프리카와 애호박, 느타리버섯과 호두, 두부까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그대로다. 혼자 사흘을 먹고도 남는 양이다. 공원 한 쪽에 놓아두면 새들도 먹고 길고양이들도 먹는다.
인근 학교에도 건질 게 참 많다. 급식소 납품용 종이상자는 물론 폐휴지, 빈병, 깡통, 우유팩까지 다양하다. 생계를 위해 초등학교 쓰레기터를 뒤지는 것에 부끄러워할 이유도 체면을 차릴 겨를도 없다. 분리수거를 마치고 리어카에 걸터앉아 교실 창 너머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노랫소리와 복도를 뛰어다니는 발소리를 새겨듣다보면 어느 샌가 나도 모르게 또 그림 작업에 대한 생각에 빠져 들곤 한다.
11월 중순에 내리는 첫눈치곤 근사한 함박눈이다. 묘심은 오늘도 공원 화단에 쌓인 눈 위에 제 발자국을 찍고 유유히 사라졌다. 저물녘이면 옥상의 장독들 위에도 제 발자국을 찍어 놓으리라. 요즘은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를 정도로 시간이 금방 간다. 그리다 만 아내의 얼굴에 터치를 더 넣어야겠다. 겉모습이 아닌 아내의 내면에서 살아 꿈틀대던 힘의 뉘앙스를 따라가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뭔가가 손끝에서 펼쳐지리라. 한가하게 있을 겨를이 없다.<끝>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