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서오릉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가 큰 왕릉지구인데 추존왕인 덕종의 경릉부터 시작해, 덕종의 아우인 예종의 창릉이 들어서고, 숙종비 인경왕후의 익릉과, 숙종 및 인현왕후와 인원왕후의 명릉, 그리고 숙종의 며느리이자 영조의 원비였던 정성왕후의 홍릉이 조성되면서 서오릉이 됐다.
또한 명종의 큰아들 순회세자의 순창원,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의 대빈묘,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 이씨의 수경원까지 자리를 잡았다. 수경원은 1968년 연세대학교 구내에서 옮겨왔는데, 2년 뒤인 1970년 대빈묘도 경기도 광주 오포에서 옮겨온다.
이웃한 서삼릉과 파주의 삼릉 등으로 인해 궁궐에서부터 능행로가 열렸으며 나중에 이 능행로를 국도와 지하철 3호선이 묻지도 않고 오롯이 '덮어쓰기' 한다.
따라서 서오릉 주변의 은평뉴타운 개발과 구파발역이며 연신내역, 불광역이 놓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닌 셈이다.

# 세조의 업보가 세자를 요절시켰나?
서오릉 가운데 오늘 만나볼 경릉(敬陵)은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 장(璋)과 그 비(妃)인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의경세자 덕종(德宗·1438~1457년)은 세조의 아들이자 성종과 월산대군 형제의 아버지이다. 그는 1455년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2년 만에 20세의 나이에 요절한다. 세조가 조카인 단종에게서 왕위를 '양보'받고 나중에 그를 죽인 업보를 세자가 받은 것이 아닐까? 의경세자는 사후 둘째아들 성종이 즉위하면서 왕으로 추존됐다.
경릉은 산에서 내려다볼 때 왼쪽이 왕, 오른쪽에 왕비를 모신 동원이강식인데 일반적인 왕우비좌(王右妃左)의 능제와 반대이다. 이는 덕종이 세자로 죽은 반면 비는 생전에 지아비인 덕종이 왕으로 추존됨에 따라 왕비로 책봉되었기에 능제도 왕릉 형식을 갖추었으나, 왕은 당초 세자로 돌아갔으므로 세자묘 그대로 두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덕종의 능은 초라하기까지 할 정도로 소박한데 비해 왕후의 능은 격식을 제대로 갖춘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 왕릉으로는 유일하게 '여성상위'의 능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세조의 명령에 의해 세자묘를 만들 때 석물을 후하게 쓰지 말라고 한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 묘소를 만들 때 역부 2명이 죽어서 감독관들을 추국(왕명에 따라 중죄인을 신문하는 일)하는 일까지 벌어졌으니 다른 왕릉을 조성할 때는 얼마나 많은 역부들이 희생되었을까?

# 인수대비로 유명한 소혜왕후 한씨
소혜왕후(昭惠王后·1437~1504)는 성종의 어머니이자 인수대비로 잘 알려진 소설과 사극의 단골 주인공이다. 그 아버지는 청주 한씨 한확(韓確·1403~1456)이다. 세조가 왕위에 오르자 남편이 세자로 책봉되고 한씨는 수빈으로 책봉된다. 하지만 1457년(세조3) 본래 병약했던 남편이 사망하고, 세조의 법통은 시동생인 예종이 물려받는다. 예종 또한 즉위 1년 2개월 만에 죽자 자신의 아들 성종이 즉위하면서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1471년(성종 2)에 세자로 죽은 남편 덕종은 왕으로 추존되고 자신은 인수왕비에 진책됐다.
아들 성종은 여색을 좋아하여 왕비 윤씨와 심한 갈등을 빚는다. 그 이유로 윤씨를 폐비시켜 사사시키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인수왕비는 이를 성종과 함께 주도한다. 성종이 죽고 즉위한 손자 연산군은 생모 윤비(尹妃)가 모함을 당하여 폐위되고 사사된 사실을 알고 할머니인 인수대비에게 보복하려고 한다. 일설에는 병상에 누웠던 인수대비 소혜왕후가 이를 꾸짖으니 연산군이 머리로 들이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연산군일기에는 이런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소혜왕후는 덕종과의 사이에 성종과 월산대군, 명숙공주를 두었다.

인수대비의 아버지 한확은 세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충신이었다. 그는 그의 누나가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이 되면서 명나라 황실의 벼슬을 받고 외교채널이 된다. 그리고 누이동생 또한 명나라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간택돼 더욱 외교적 입지를 다지게 된다. 사실 한확의 두 누이이자 인수대비의 고모들은 명나라에 공녀로 바쳐진 가슴 아픈 사연을 지녔다. 한확은 계유정난 때 세조를 도와 정난공신 1등에도 올랐는데 세조의 왕위 찬탈을 승인하지 않던 명나라에 들어가 단종이 왕위를 물려준 양위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한확은 골치 아픈 외교 문제를 해결하고 돌아오다가 객사한다. 세조의 입장에서 보면 한편으론 안타깝고 다른 한편으론 정치적 부담을 줄여준 셈이다. 인수대비에게도 아버지의 죽음에 뒤이은 지아비의 요절은 두 기둥을 잃은 셈이어서 불행의 연속이었다.
남편이 요절해서 그랬을까? 아니면 단종과 정순왕후의 서글픈 삶을 모두 보아서 그랬을까. 그녀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는데 손수 쓴 불경이 전해진다. 특히 범자(梵字·인도에서 산스크리트를 쓰는 데 사용되는 문자)와 한자, 한글 등 3자체(三字體)로 쓴 불경이어서 가치가 높다. 그녀는 또 '황후내훈(皇后內訓)'을 쓰고 '여훈(女訓)'도 남겼다. 황후내훈은 비빈(妃嬪)들의 수신서라고 하겠는데 소학, 열녀전, 명심보감 등에서 훈계가 될 만한 것을 모아 한글로 풀어쓴 책이다. 여훈은 부녀자의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해 편찬한 것인데 아내는 남편을 하늘로 떠받들어 공경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이후 조선시대의 남존여비 사상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경릉은 그의 여훈과는 정반대로 됐다.

# 서오릉에서의 아쉬움
서오릉 경내는 참으로 호젓하다. 잘 가꾼 숲도 좋고 등산로도 잘 정비해서 인근 주민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됐다. 아침나절이면 혼자서 혹은 두셋이 찾아와 산책하거나 등산하기에 딱 좋은 곳이다. 한때는 세상을 호령하며 살던 왕실의 주인공들이 조용하게 잠든 곳이니 교훈도 제법 얻을 것이다. 안내판을 따라 산길을 걸어보면 2㎞ 정도 되는 등산로가 완만하여 고즈넉하기도 하다. 그야말로 덕종의 능을 쓸 때 판단했던 대로 순산순수(順山順水)의 지세가 느껴진다. 경내 면적도 186만7천725㎡(55만3천600여 평)나 되므로 이리저리 돌다보면 한두 시간은 쉽게 지나간다.
다만 아쉬운 것은 군부대가 서오릉의 서쪽과 동쪽을 차지하고 앉은 것이다. 서쪽은 그래도 울타리 밖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군부대 동쪽은 능역 안으로 들어와서 숙종의 명릉을 분리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래서 명릉을 가자면 서오릉 입구로 되돌아 나와서 입장권을 보여주고 다시 들어가야 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국가의 안보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하지만 이는 조금의 융통성만으로도 해결되리라 믿는다. 주차장 앞에 즐비한 식당 중 한 곳에서 막걸리 한 잔으로 추위를 녹인다.
글/염상균 화성연구회 사무처장 sbansun@naver.com
사진/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