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관 출신의 딸인 장희빈을 왕비로 맞이하다
숙종(1661~1720)은 현종과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전후 3차례에 걸쳐 왕비를 맞이했는데 원비는 인경왕후(仁敬王后)이고 둘째와 셋째 왕비가 앞서 나온 인현왕후와 인원왕후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바로 영화나 TV 드라마로 자주 제작돼 일반인들에게 매우 잘 알려져 있는 장희빈(張禧嬪)이다. 장희빈은 역관 출신으로 대부호가 된 장경(張烱)의 딸로 조선왕조 최초로 역관 출신 왕비가 되었던 여인이다. 그러나 장희빈은 궁에 들어가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왕세자(경종)를 낳고 왕비가 되었지만 결국은 폐출되는 비운을 겪는다. 또한 장희빈과 대립 관계에 있던 인현왕후 역시 기구한 운명을 타고나 숙종을 비롯한 이들 세 사람의 관계는 지금까지도 세간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환국정치로 정국을 장악하다
숙종때는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시기였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사림의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면서 파행적 운영이 거듭되던 시기였다. 즉위 초는 현종때 일어났던 예론(禮論)에서의 승리로 남인이 득세했으나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을 시작으로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연이어 발생한 끝에 서인이 재집권에 성공하였으며 환국 정치도 그 끝을 보게 된다.
환국정치는 현종때의 예송 논쟁을 통해 손상된 왕실의 권위와 상대적으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 한 숙종의 정국 운영 방식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숙종은 군주의 고유 권한인 인사권을 강력하게 행사, 환국의 방법으로 정권을 교체함으로써 붕당내의 대립을 촉발시키고 군주에 대한 충성을 유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왕의 치세기간 동안 신하와 관료들 사이의 정쟁은 격화됐지만 왕권은 도리어 강화돼 임진왜란 이후 계속되어온 사회체제 전반의 복구정비 작업이 거의 종료되면서 숙종은 상당한 치적을 남겼다.
#경제를 살리고 문화예술을 부흥시키다
숙종은 우선 경제적으로는 대동법의 적용 범위를 전국에까지 확대시켰고 광해군때 시작된 양전사업을 계속 추진해 전국에 걸친 양전을 사실상 종결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활발해지기 시작한 상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통용시켰다. 이같은 경제시책은 조선 후기의 상업 발달과 사회경제적 발전에 적지 않게 영향을 미치게 됐으며 조선의 경제는 안정적으로 발전한다. 그래서 조선은 병자호란 이후의 위기감에서 점차 벗어나며 농업 생산력 증대와 유통 경제 발달을 배경으로 사회상은 역동적 변화를 보이게 된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중국과 일본의 교역이 단절되자 조선은 이들간의 중개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익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이는 조선사회 중흥의 밑거름이 되었다. 또 대외적으로는 일찍부터 종래의 북쪽 변경에 무창(茂昌)과 자성(慈城)의 2진(鎭)을 설치, 옛땅의 회복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이로부터 조선인의 압록강 연변 출입이 잦아지면서 마침내 인삼채취사건 발단으로 청나라와의 국경선 분쟁이 일어나자 1712년 청나라측과 협상하여 그 유명한 '백두산 정계비'를 세웠다.
뿐만 아니라 숙종대는 조선왕조의 문화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진경시대의 초창기에 해당된다. 진경시대라는 것은 조선왕조 후기 문화가 조선 고유색을 한껏 드러내면서 난만한 발전을 이룩하였던 숙종대부터 정조대까지를 일컫는 문화사적인 시대 구분 명칭이다. 문학쪽에서는 구운몽(九雲夢)을 지은 서포 김만중(1637~1692)과 진경시(眞景詩)로 이름을 떨친 삼연 김창흡(1653~1722)등이 숙종대에 크게 활동했고, 그림에서는 자화상을 그려 유명한 공재 윤두서(1668~1715)가 있었으며 서예에서는 각체(各體)를 잘 써 유명한 낭선군 이우(1637~1693)와 조선적 예서를 창안한 곡운 김수증(1624~1701)이 모두 이 시기에 활동하였던 기라성같은 인물들이다.
#사후에 모두 한 지역에 모이다
명릉은 1701년(숙종27)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숙종이 현재의 위치에 능을 조영하면서 서오릉 경내에 자리잡게 됐다. 그리고 숙종은 왕비 능의 오른쪽을 비워 두게 하여 사후에 자신이 묻힐 곳을 마련하였다. 아마도 인현왕후 생전에 온갖 모진 고생을 시킨 것이 미안해 사후에는 함께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1720년 숙종이 죽자 계획대로 인현왕후의 옆에 묻혔다. 한편 인원왕후도 사후 숙종의 곁에 묻히기를 소원해 지금의 자리에 들어서게 됐으며, 원비 인경왕후의 능인 익릉(翼陵)도 서오릉 경내에 조성됐다.
흥미로운 것은 장희빈이 묻힌 대빈묘(大嬪墓)도 서오릉에 있다는 것이다. 원래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면에 있었으나 1970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장해 서오릉에서 가장 후미진 곳에 작은 규모로 조성됐다. 이장할 때 어떤 의도가 있어 이곳으로 옮겨왔는지 모르지만 숙종과 관계된 왕비들과 장희빈이 사후에 모두 한 지역에 모이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구한 인연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8각 장명등에서 4각 장명등으로
명릉의 석물은 실물 크기와 비슷하게 제작돼 왜소하게 보이나 조각 솜씨는 매우 사실적인 편이다. 능 주위에는 문·무인석을 비롯해 석마, 석양, 석호 등이 설치돼 있으며 봉분에는 난간석을 둘러 놓았다. 이색적인 것은 능역의 중앙에 세워진 장명등이다. 왕을 모신 조선시대의 왕릉에는 태조 건원릉이래 약 300년 동안 8각 장명등을 설치했는데, 이런 전통이 숙종에 의해서 바뀐 것이다. 숙종은 단종을 복위하고 장릉(莊陵)을 후릉(厚陵·2대 정종의 능)의 예에 따라 간소하게 조성하도록 했는데, 이때 4각형 장명등이 왕릉 역사상 처음으로 채택됐고 자신의 능에도 4각 장명등을 세운 것이다. 이후에도 4각 장명등은 경종의 의릉, 영조의 원릉, 정성왕후의 홍릉, 헌종의 경릉 등에도 설치돼 그 전통이 계승됐다.
서오릉 경내의 나머지 왕릉도 둘러본 후, 지친 발걸음을 되돌리며 일찍이 정조가 명릉을 배알하고 지은 12수 중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떠올리며 경내를 나섰다.
'청룡 백호 좋은 곳에 왕릉을 모시니(龍蟠虎踞宅珠丘)
천층처럼 높은 나무에 좋은 경치 어리었네(雲木千層麗景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