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에는 정릉(貞陵·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을 비롯해 헌릉(태종과 원경왕후), 선릉(성종과 정현왕후), 정릉(陵·중종), 태릉(중종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 강릉(명종과 인순왕후), 의릉(경종과 선의왕후), 인릉(순조와 순원왕후)을 포함, 총 8기의 왕릉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들 중 일반인에게 생소한 왕릉중 하나가 바로 오늘 만나볼 명종의 '강릉'이다.

# 일반인들에게 낯선 비공개 능
강릉은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태릉과 함께 서울시 노원구에 위치하고 있다. 태릉! 태릉은 일반인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곳이다. 먼저 이번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우리나라 국가대표 선수들의 요람이 어디인가. 바로 '태릉선수촌'과 '태릉스케이트장'이다. 그리고 지하철역 이름에도 '태릉입구역'이 있다. 또한 각종 업체도 다양하게 쓰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명칭이 바로 '태릉갈비'이다. 태릉이 이렇게 명성을 드날리는 반면에 강릉은 일반인에게 매우 낯설다. 태릉은 공개된 반면 강릉은 비공개 왕릉이라서 더욱 그렇다. 살아 생전에 어머니 위세에 눌려 지낸, 명종이 죽어서도 그런 것 같아 왠지 기분이 씁쓸하다.
강릉을 들어가기 위해서는 태릉관리소에 미리 연락을 해야 한다. 관리소 측에서는 몇가지 이유를 들어 태릉의 우측에 자리잡고 있는 강릉을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강릉은 명종과 인순왕후를 합장한 능이다. 1567년 명종을 먼저 모신후 1575년 인순왕후가 합장됐다. 왕과 왕비의 봉분은 모두 병풍석을 두르고 난간석으로 서로 연결돼 있다. 봉분의 봉토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된 인석(引石)에 화문(花紋)을 장식한 것이 이색적이다. 능을 호위하고 있는 육중한 체구의 문인석과 무인석은 선 굵게 조각돼 있고, 상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의 나어두(羅魚頭) 문양 역시 손으로 만지면 볼륨감이 느껴질만큼 굴곡 깊게 새겨 놓았다. 이외에도 장명등, 망주석, 석호, 석마, 석양 등이 설치되어 있으며 보존 상태가 모두 양호하다. 정자각 옆에는 강릉 표석이 안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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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 무인석의 안면은 각각 차이가 있다. 좌측 무인석(사진 위)은 투구와 안면의 크기가 비슷하나 우측 무인석은 투구가 작고 이마 부분이 좁으며 턱과 양볼이 튀어나와 있다. |
# 선정(善政)의 뜻 펴지 못한채 젊은날 승하한 명종
강릉의 주인인 명종(明宗·1534∼1567)은 조선 제13대 왕으로 중종의 둘째 아들이며 인종(12대 임금)의 아우이다. 그의 비는 인순왕후(仁順王后·1532~1575)로 청릉부원군 심강(沈鋼)의 딸이다.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에게서 인종을 낳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로부터 명종을 낳았는데,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했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죽자, 당시에 12세였던 명종이 즉위하게 됐던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어려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됐고,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이 득세하면서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 인종의 외삼촌인 윤임(尹任) 일파를 숙청하기에 이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문정왕후의 위세를 등에 업은 윤원형의 외척 전횡의 시대가 전개됐다. 당시의 정황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모비가 청정(聽政)하게 됐으므로 정치가 외가에 의해 좌우됐다. 그리하여 뭇 간인(奸人·간사한 사람)이 득세하여 선량한 신하들이 많이 귀양 또는 살해되었으므로 주상(主上)의 형세는 외롭고 위태로웠다."
명종은 윤원형 일파를 견제하고자 이량(李梁)을 등용했으나 그 역시 작당해 명종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정치는 더욱 문란해져 파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이렇듯 정치가 문란해져 민생이 어려워지자 한양 위쪽 양주지방의 백정 출신인 임꺽정(林巨正)이 의적을 자처하며 경기도와 황해도를 누비며 이름을 날렸다. 임꺽정은 전설적인 일화를 많이 남겼는데, 이를 토대로 훗날 벽초 홍명희가 임꺽정의 활약상을 소설로 써서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삼포왜란 이래 세견선(歲遣船·일종의 무역선)의 감소로 곤란을 받아온 왜인들이 1555년 전라도에 침입하는 을묘왜변을 일으켜 나라 안팎이 소란스러웠다.
한편 명종시기에는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던 문정왕후 때문에 불교가 크게 발흥하기도 했다. 문정왕후는 특히 보우(普雨)를 신임해 봉은사의 주지로 삼았고, 1550년 선(禪)·교(敎) 양종을 부활시키고 이듬해에는 승과를 설치했다. 서울시 강남구에 있는 봉은사가 이때부터 크게 사세를 떨쳤던 사찰이고 승과를 실시하던 너른 들판이 지금의 코엑스 자리다. 그러나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자마자 유림의 기세에 밀려 승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변협(邊協)에게 피살된다. 그리고 윤원형도 문정왕후가 죽자 삭탈관직 당하고 멀리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이후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아쉽게도 34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죽고 말았다. 재위 기간은 23년이었지만 자신의 뜻대로 정사를 펼친 것은 얼마 안된다.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1563년에 13세로 요절하고, 왕위는 덕흥부원군(중종의 아홉째아들)의 셋째아들이 계승하였으니, 그가 바로 선조(宣祖·14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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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은 두 봉분 모두 병풍석을 두르고 있어 고양시 서삼릉의 효릉(12대 인종·인성왕후)과는 대조를 이룬다. |
# 비운의 왕처럼 순탄치 못했던 왕릉
강릉의 역사는 명종의 생애처럼 순탄하지 못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571년 정자각이 실화로 소진된 것을 시작으로 임진왜란중이던 1593년에는 왜적이 도굴하려고 능을 파헤치는 참극을 겪기도 했다. 1786년에는 정조가 강릉의 안 갑좌(甲坐)에 사도세자의 묘를 이장하려고 지세를 살피고 봉표(封標)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선택받지 못했다. 이후 강릉은 역사 속에서 주목받지 못하고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답사를 마친후 태릉도 마저 둘러보고 나오면서 강릉도 이제부터 일반인에게 공개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그래야 세계문화유산에 걸맞은 대우가 아니겠는가. 뿐만아니라 차제에 모든 왕릉이 공개됨과 동시에 그동안 훼손된 부분도 빨리 원형 복원돼 우리나라 국민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관광객들도 떳떳하게 맞이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하며 다시 일천만 인구의 도심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사진/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