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가들은 문정왕후를 중국 당나라의 측천무후, 청나라의 서태후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녀는 중종과 인종, 명종 3대에 걸쳐 왕비와 대비로 있으면서 정권에 개입해 다른 이들을 무척 시기했으며 그 성격 또한 표독하고, 독살스러운 것으로 표현된다.
#웅장하고 거대한 능은 그녀의 생전의 모습을 연상케 해
태릉은 일반 왕후의 능보다 훨씬 화려하고 웅장하며 특이하다. 문정왕후는 1565년 4월 7일 창덕궁 소덕당에서 승하했다. 그로 부터 3개월 후 1565년 7월 15일 양주 노원면 대방리(현 노원구 공릉동)에 종산을 수락산으로 하고 주산을 검암산으로 하는 좌청룡, 우백호의 풍수형국에 자리잡았다. 앞에 흐르는 공릉천은 명당수이다. 능침의 좌향은 북서에서 남동향하는 임좌병향(壬坐丙向) 언덕에 단릉(單陵)으로 예장돼 있다. 능역의 좌측에는 태릉선수촌과 그의 아들 명종과 인순왕후의 강릉이 있다. 그리고 옆으로 삼육대학교가 있다. 전면에는 육군사관학교가 위치하고, 우측에는 사격장과 놀이동산, 그리고 서울여자대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태릉의 좌청룡 능선과 계곡에 있는 굴참나무 숲과 진달래는 서울에서 보기 드문 생태경관이다.
1565년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명종은 사회적 안정을 도모하고 나라를 평온하게 하기 위해 지금의 터에 어머니 문정왕후를 모셨다 한다. 당시 지관이며 예언가였던 남사고(南師古)가 "동쪽에 태산을 봉한 뒤에야 나라가 안정될 것이다"라고 한 예언에 따라 명종은 어머니를 이곳에 모시고 자신도 태릉옆인 강릉에 안장됐다. 문정왕후는 미래에 자신이 죽으면 남편인 중종과 함께 하고 싶어 원래 장경왕후의 희릉(고양시 서삼릉 내) 오른편에 있던 중종의 능을 정릉(현재의 강남구) 터로 옮겨 놓고, 자신도 그 옆에 묻힐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명종이 정릉 주위는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온다는 핑계를 대고, 남사고 등이 국가안정론을 근거로 이곳 공릉동에 안장해 결국 그녀의 뜻은 무산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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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릉 입구에 있는 조선왕릉전시관 |
# '외척전횡시대'를 만든 문정왕후
문정왕후는 영돈녕부사 윤지임의 딸로 1501년에 태어났다. 1517년 17세에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가 인종을 낳고 엿새 만에 산후병으로 요절하자 그는 급히 왕비로 책봉됐다. 그리고 왕실에 들어와 세자인 장경왕후의 어린 아들 인종을 기르면서, 중종과의 사이에서 경원군을 낳았다. 문정왕후는 세자(인종)가 왕위에 오르자 대비로서 인종에게 많은 간섭과 시기를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인종은 문정왕후가 전한 독이든 떡을 먹고 죽었다고 전하기도 한다.
문정왕후는 인종이 재위한지 9개월 만에 죽자 12세인 자신의 아들 경원대군을 왕위에 앉혔다. 그가 바로 눈물 많았던 왕 '명종'이다. 이때부터 문정왕후는 어린 명종을 대신해 수렴청정을 한다. 이로 인해 그녀의 친정동생 윤원형이 등극해 인종의 모친 장경왕후의 오라버니 윤임 일파와 세력 다툼을 하게 된다. 왕권을 장악한 윤원형의 세력은 정권을 장악하고 이때 문정왕후는 수렴청정의 발판을 마련한다. 이것이 을사사화(乙巳士禍·1545)이다. 이 사건 이후 윤원형과 문정왕후는 정권 유지를 빌미로 정적의 제거, 부정축재, 도덕적으로 문란한 행동 등을 저질러 이름하여 '외척전횡시대'를 만들기에 이른다.

어린 명종은 그의 어머니와 외척들의 횡포에 시달려 눈물로 세월을 보냈다 한다. 문정왕후는 동생 윤원형의 애첩인 정난정이 소개한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병조판서에 오르게 하고 승과 제도를 도입해 불교를 활성화시키기도 한다. 이때 성종의 선릉과 중종 정릉의 능침사찰인 봉은사도 함께 번창했다. 그러나 이런 외척 정치에 차츰차츰 왕권은 약화되고 조정 대신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사리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하자 사회는 어수선해지고 병들어 갔다. 설상가상으로 흉년까지 자주 들자 백성들은 굶주리고 도적떼가 난립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급기야 양주의 임꺽정 등은 민란을 일으켰고, 이를 틈타 왜구까지 쳐들어 왔다. 이것이 '을묘사변'이다. 명종은 이를 평정하고 퇴치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결국 문정왕후의 정치적 간섭은 내우외환의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던 것이다.
#왕릉에 새겨진 여장부의 면모
태릉은 비록 왕비의 능이지만 웅장하고 커서 문정왕후의 여장부로서의 면모를 짐작케 한다. 능의 이름도 크고 편안하다는 의미로 '태릉(泰陵)'으로 하지 않았는가. 특히 능침과 정자각 사이의 거리가 조선의 능원에서 가장 길며 대신 강(언덕)을 약하게 한 것이 특징이다. 이는 문정왕후의 정권욕을 잠재우려는 명종의 뜻은 아니었는지.

태릉의 상설제도는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봉분 아래에는 운채(雲彩·여러 가지 고운 빛깔로 물든 구름)와 12지신을 의미하는 방위신이 새겨진 병풍석으로 둘렀으며, 그 주위를 난간석으로 다시 보호했다. 병풍석 위의 만석(滿石)의 앞면 중앙에는 12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원래 12간지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세조때 능역조성의 간소화를 위해 병풍석을 없애고 신상을 대체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등장한 것인데, 여기에서는 신상과 함께 병용되고 있어 주목된다. 이 능역 조성을 위해 상당히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태릉의 문·무석인은 목이 짧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매우 큰 형태이다. 문석인은 높이가 2.6m로, 관복에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하는 복두를 쓴 공복차림을 하고 있다. 두 손으로는 홀(笏)을 공손히 맞잡고 있는데, 왼편의 문석인의 경우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반면 오른편의 문석인은 그 반대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좌우 문석인의 홀을 잡는 방법은 동일하나 이곳 태릉의 경우는 다르다. 무석인은 문석인과 비슷한 크기이며, 특히 퉁방울 눈에 코가 유난히 큰 편이다. 갑옷을 입고 머리에는 투구를 쓴 위용 넘치는 무장(武將)의 모습이다.
태릉에서는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의 금천교(禁川橋)를 볼 수 있다. 왕릉 앞에 부러진 금천교는 1950~60년대 서울여대 앞쪽 화랑로 주변에 있던 외금천교로 알려지고 있다. 태릉 전면의 물길은 오래 동안 상부의 마사토 등이 아래로 유실되고 퇴적돼 계류의 흐름이 교란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금천교의 기능이 상실된 것 같다. 물길 찾는 작업이 필요하다. 정자각은 한국 전쟁 시 파손돼 석축과 초석만 남아 전해지던 것을 1994년에 복원한 것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전(正殿)과 그 앞의 배전(拜殿)으로 이루어져 있다. 1970년대 조성된 태릉 능역 안에 있는 놀이동산 및 사격장의 철거 및 소실된 재실과 어정 등의 복원이 시급하다.

한편 문정왕후 자신이 같이 묻히기를 원해 옮겨놓은 남편 중종의 정릉과 그녀의 시아버지인 성종의 선릉은 1592년 일본군에 의해 도굴되고 시신이 훼손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리고 임란 직전에 조영된 문정왕후 태릉도 효인이라는 자가 능침 안에 금은보화가 많다고 고자질해 1593년 1월 일본군이 기병 50명과 주민 50명을 동원, 도굴하려 시도했으나 삼물의 회(灰)가 단단해 도굴에 실패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글/이창환 상지영서대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 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