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죽어서도 불안했던 효종
우선 효종의 인생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몹시 불안했다. 그는 1619년 인조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아홉 살 때 정묘호란을 당했고, 열여덟 살 때에는 병자호란을 당해 강화로 피란했지만 1637년 인조가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항복을 하자 볼모로 선양(瀋陽)으로 잡혀간다. 이후 그는 청나라에 이끌려 서쪽으로는 몽고, 남쪽으로는 산해관(山海關)과 금주위(錦州衛)까지 가서 이제 몰락의 길을 걷는 명나라 군대가 청나라에 의해 격파되는 장면을 목격한다. 또 동쪽으로는 철령위(鐵嶺衛), 동북쪽으로는 여해부(如奚部)까지 따라다니며 청나라 군대의 활약상을 지켜봐야만 했다. '청나라가 이렇게 강한데 감히 조선이 대들 수 있겠느냐?' 하는 일종의 교육 및 협박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다 청나라에 볼모로 잡힌지 8년 만인 스물여섯살에 귀국한다. 그러나 곧바로 청나라에 다시 소환돼 이번에는 명나라의 수도(베이징)가 불에 타면서 명나라가 망하는 장면을 '참관(參觀)'해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스물일곱 살에 귀국한 후 아버지 인조가 죽자 1649년 드디어 왕이 된다.

왕위에 오른 효종은 청나라가 기대한 '동방의 착한 임금'이 되기를 거부하고 정 반대로 청나라를 치는 '북벌(北伐)'을 계획한다. 그러나 대신들의 비협조와 재정 빈약 등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즉위한 지 10년만인 1659년 41세의 나이로 죽는다. 이렇게 불안한 삶으로 점철된 그의 사후는 어떠했을까? 죽어서나마 그의 혼령은 편안했을까?
효종이 죽자 그의 무덤은 건원릉 서쪽 능선(현재 구리시에 위치한 영조 무덤인 원릉)으로 정해지고 그해 10월 29일 안장된다. 10월은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다. 한창 추울 때 능이 조성된 것이다. 추운 겨울 탓이기도 하지만 왕릉조성 작업은 처음부터 부실하게 이뤄졌다. 바로 이듬해인 1660년 7월 장마가 지나고 나자 결국 석물에 균열이 온다. 이를 보고 여주의 박환이란 선비는 '영릉의 변고'라고 표현하면서 당시 능 조성에 관여했던 당상관들은 불경죄로 다스리고, 장인(匠人)들은 목을 쳐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그해 10월 석물을 고치긴 했으나 겨울이 다 지나갈 무렵 다시 석물이 무너진다. 이듬해(1661년) 능을 다시 대대적으로 고친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이때의 임금은 현종(顯宗·1641~1674)이다. 현종은 재위 15년 내내 아버지 무덤 때문에 편안하지가 않았다. 거의 매해 아버지 무덤 수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현종은 죽기 일 년 전인 1673년 아버지의 무덤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현재의 여주땅으로 이장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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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쟁에 악용된 풍수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맨 처음 건원릉 서쪽 능선에 효종의 능이 정해질 무렵 이미 이장을 예언한 사람이 있었다. 고산 윤선도(尹善道·1587 ~ 1671)가 바로 그 예언자였는데, 당시 그는 지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10년이 채 안가 (효종)능에 큰 변고가 있어 반드시 이장을 할 것이오. 나는 이 일을 보지 못하고 죽겠지만 여러분들은 보게 될 것이오. 그 때 내 말이 생각날 것이오."-고산유고 中
윤선도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러한 말을 했을까? 효종 무덤이 건원릉 옆으로 정해지게 된 것과 왕릉 조성이 부실하게 이뤄지게 된 데에는 당쟁이 크게 한 몫을 한다. 효종이 죽었을 때 윤선도는 당시 좌의정 심지원의 추천을 받아 능 선정과정에 참여한다. 윤선도는 풍수에 능하기도 했지만(그는 광해군 때 '교하천도론'을 주장했던 지관 이의신에게 풍수를 배웠다), 봉림대군(효종)의 사부이기도 했던 것이다. 윤선도가 효종의 능 선정에 참여하고 나서 임금에게 제출한 글이 '산릉의(山陵儀·1659)'이다. 이글은 지금도 풍수 학인들의 필독 '풍수논문'이다. 이때 윤선도가 효종의 무덤자리로 추천한 곳은 수원의 땅(현재의 융릉)이다. 윤선도는 이땅을 가리키며 "신이 삼가 이 산을 살펴보았는데 용혈사수(龍穴砂水)가 지극히 좋고 아름다워 작은 흠집 하나 없습니다. 진실로 탁월한 길지로서 천리를 살펴도 그와 같은 곳은 없으며, 천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하는 자리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당파가 달랐던 송시열은 이를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부정한다. "수원에는 언제나 6천~7천의 병마가 주둔해 있고, 지리적 여건도 3남(三南)의 요충지대에 해당되므로 만약 변란이 있게 되면 틀림없이 전쟁터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수백 호의 민가를 일시에 철거하고 분묘들을 옮겨 생업을 깨뜨린다면, 그에 따른 원한과 한탄이 국가의 화기를 해칠 것입니다."
결국 남인 윤선도의 의견이 아닌 서인 송시열과 송준길의 의견이 수용돼 건원릉 서쪽 능선으로 최초의 효종 능이 정해진다. 이에 대해 윤선도는 풍수상 두 가지 문제점을 지적한다. 첫째는 혈이 맺히지 않았으며, 둘째는 조상 무덤 근처에 장사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윤선도가 예언한지 15년 만에 효종의 능은 이장을 하게 돼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도 송시열과 송준길 등은 개수(改修)는 가능하나 이장은 절대로 불가함을 주장했다. 현종 10년(1669년) 송준길은 다음과 같이 임금에게 아뢴다. "신이 풍수지리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산등성이에 올라 살펴보니, 광명쇄락(光明灑落·밝은 빛이 골고루 들어 개운하고 깨끗함)한 곳일 뿐만 아니라 선릉(先陵)과 함께 한 곳에 있으니, 그 정리에 있어서도 역시 편안해 보였습니다. 혹 어떤 지관 무리가 능소를 옮기자고 청하는 말이 있으면 이것은 실로 망령된 말이니 일절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윤선도와 그의 의견에 동조를 하던 당시 일부 여론을 견제하기 위한 발언이었다. 그렇지만 보수작업으로는 더 이상 어쩔 수 없게 되자 현종 14년(1673년) 천릉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지금의 영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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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릉의 회양목.천연기념물 제459호로 재실내에 있다. |
#좌우(左右) 합장이 아닌 상하(上下) 합장
일반인들이 이곳을 관람하다보면 왕과 왕비의 능이 위아래로 조성되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왕릉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무슨 까닭에서일까? 이 역시 풍수적인 논쟁에서 비롯된 것이다. 효종의 능을 이곳으로 옮긴지 5개월여 만인 현종 15년(1674) 2월에 효종비(인선왕후)가 죽는다. 이때 임금은 어머니(효종비)의 유언이 있었던 만큼 아버지와 어머니 무덤을 '쌍릉'으로 하라고 지시한다. 이에 대해 민유중(훗날 숙종임금의 장인이 됨)은 풍수상의 이유를 들어 능을 위아래로 쓸 것을 주장한다.
"만약 쌍릉으로 쓴다면 정혈(正穴)이 가운데에 있어 비어버리게 됩니다. 지관들이 모두 말하기를 '아래 혈(穴)도 아주 길하다'고 합니다. 만약 상·하혈에 쓴다면 이치상 쌍릉과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충분히 있다. 그의 주장이 풍수상 타당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시 이조판서 이상진은 '능을 위아래로 조성할 경우 위의 땅을 파면 그 아래는 맥이 끊기는 법'이라 해서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 그러나 결국 민유중의 의견이 채택돼 오늘의 영릉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풍수지리상 이곳 영릉이 좌우( 左右) 합장이 맞을지 아니면 상하(上下)합장이 맞을지에 대해서는 독자가 직접 가서 확인해보기를 권한다. 왕릉 관람에 새로운 묘미를 줄 것이다.
사진 / 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