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글/정종수 국립고궁박물관장]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복제하고 싶은 인물 1위가 '세종대왕'이라 한다. 조선의 4대 임금 세종(1397~1450)과 소헌왕후 심씨(1395~1446)가 안치된 여주의 영릉 자리는 모란꽃이 반쯤 피어난 모양의 땅이다. 묘혈을 둘러싼 산들은 마치 신하가 무릎을 꿇고 군왕에게 조례를 드리며 임금과 신하가 다정히 조회하는 것처럼 보인다. 굳이 풍수지리가 어쩌고 저쩌고 하지 않아도 영릉에 들어서면 누구나 이곳이 명당이라는 것을 금세 느낄 수 있다. 실학자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영릉을 '왕릉 중에서 제일'이라 칭송했고, 대다수의 풍수가들도 '영릉의 덕으로 조선왕조가 백년이 더 연장됐다'고 할 정도다.

 
 
▲ 영릉(英陵) 전경. 영릉은 국조오례의에 따른 조선 전기능제의 기본을 이룬 능이다. 정자각 동쪽으로 수복방과 비각, 서쪽으로 수라간이 있다. 조선 최초의 합장릉이긴하나 상설제도는 단릉과 같다.

#젊은 날 등극해 가장 많은 업적을 남긴 임금

세종은 태조 6년(1397) 4월 10일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났다. 열다섯 때 충녕대군으로 봉해졌고, 세자 양녕이 폐위되자 세자로 책봉된다. 보통 왕들은 왕위를 물려받을 때 선왕이 죽은 뒤 닷새째 되는 날 입관을 마치고, 다음날 즉위하는데, 세종은 다른 왕과 다르게 선왕이 살아있을 때 왕위를 물려받았다. 1418년(태종 18년) 8월 8일 정오, 태종은 경복궁 보평전에서 대성통곡하며 만류하는 신하들의 간청을 뿌리치며 세종에게 옥새를 주며 임금의 자리에 앉힌다. 세종이 울면서 사양하자, 태종은 "어찌 나에게 효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이같이 어지럽게 구느냐. 내가 만일 신료들의 청을 들어 왕의 자리에 앉으려 한다면 나는 장차 마음대로 죽지도 못할 것이다. 이미 나는 다시 복위않기로 북두칠성에 맹세했으니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했다. 사흘 뒤 세종은 경복궁 근정전에서 조선조 4대 임금에 즉위한다. 이때 나이 스물 한 살이었다.

그렇다면 태종은 왜 서둘러 왕권을 넘기려 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양녕대군(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형)을 옹호하는 세력들의 반란 때문이었다. 태종은 "18년동안 호랑이를 탔으니 이것으로 족하다"며 재차 양위 의지를 밝혔다. 그리고 "양녕이 비록 마음이 선하여 정변을 일으킬 의심은 없으나, 어제까지 세자의 지위에 있다가 이제 폐출돼 외방에 나가 있으니 어찌 틈을 엿보는 사람이 없겠는가?"라며, 혹 차후에 일어날지도 모를 역모에 미리 대비한 것임을 밝혔다.

▲ 물시계.

이런 우여곡절 끝에 53세로 승하할 때까지 32년간 재위한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역대 군왕 가운데 가장 찬란한 업적을 남겼다. 젊은 학자들을 등용해 이상적 유교정치를 구현했으며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측우기 등의 과학 기구를 제작하게 했다. 또 6진을 개척해 국토를 확장하고 쓰시마섬을 정벌하는 등 정치·경제·사회·문화 거의 모든 면에 훌륭한 치적을 쌓았다.

 
 
▲ 훈민문.

#서울에서 여주로 이장된 '영릉'


원래 영릉은 부왕 태종의 헌릉(현 서울 서초구 내곡동) 서쪽의 언덕에 있었다.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1446년(세종 28) 4월 19일에 승하하자, 세종은 아버지 태종의 묘인 헌릉곁에 능자리를 정한 것이다. 이 자리가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하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세종은 "아무리 좋은 땅이라도 부모 곁에 장사하는 것만 못하다"며, 조선조 최초로 합장릉인 동분이실(同墳異室)로 능을 축조, 그해 7월 17일 왕비를 동실(東室)에 안장하고 서실(西室)은 자신의 수릉(壽陵·죽기 전 미리 만들어 놓는 무덤)으로 삼았다. 석실 가운데 칸막이에는 직경 50㎝정도 크기의 구멍을 뚫어 왕과 왕비의 혼령이 서로 왕래하도록 배려했다.

그런데 7대 임금 세조때 영릉이 불길하다는 의견이 다시 대두되면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나왔고, 현 위치인 여주로 옮긴 것이다. 세종이 죽은 지 19년째 되는 1469년(예종 원년) 2월 30일, 서울 강남 내곡동에 있던 구 영릉에 삽질이 시작됐다. 그런데 파헤쳐진 석실 내부에는 물기가 전혀 없었고 관과 각종 부장품도 새 것처럼 깨끗했다. 매장한지 19년이 지났지만 놀랍게도 세종과 왕비의 시신은 말할 것도 없고 수의도 하나 썩지 않고 그대로였다. 이장 작업이 시작된지 35일만에 세종과 왕비의 관은 여주로 옮겨졌다.

▲ 해시계.

원래 소헌왕후가 묻힌 영릉의 내부는 석실로 돼 있었다. 하지만 여주로 옮겨진 영릉은 광중을 석실 대신 회격으로 만들었다. 이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라"는 세조의 유언 때문으로, 세조의 광릉이 석실 대신 회격으로 만들어지자 그 이후 조성된 왕릉은 모두 회격으로 조성된 탓이다. 현궁을 석실로 축조하면 지하 광중 작업에만 인부가 6천명이 들어간다. 그러나 석실을 회격으로 바꿔 축조하면 작업 인원이 그 절반인 3천명으로 줄어든다. 또한 영릉은 건원릉이나 헌릉처럼 봉분에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난간석만 설치해 간소화했다. 이장을 하면서 옛 영릉에 있던 상석·장명등·망주석·신도비들은 그 자리에 묻었으나, 1973년 발굴해 현재 세종대왕기념관에 보존하고 있다.

 
 
▲ 영릉 혼유석. 봉분 앞의 혼유석 두개가 합장릉임을 표시하고 있다.

#한 권의 책을 천번 넘게 읽은 세종


한 남자로서, 지아비로서의 세종은 어떠했을까. 옛 역사서들을 보면 황제는 후궁을 3천명까지 두고, 임금은 미색에 빠져 크게는 나라를 , 적게는 몸을 망쳐 자신의 수명을 단축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세종은 여자 관계에 있어서도 공과 사를 분명히 했다. 요즘 쓰는 비속어로 '영계'라 할 수 있는 어린 궁녀가 세종의 총애를 받아 잠자리에서 별 것 아닌 일을 부탁한 적이 있었는데, 세종은 "이러한 청탁하는 걸 보면 네가 커서 나라를 망칠 것"이라며 그 이튿 날로 궁녀를 내쫓아 가까이 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영릉 능침. 봉분의 동·서·북 세 방향에 곡장을 둘렀으며 풍수지리설에 따라 주산을 뒤로 하고 중허리에 봉분을 두었다. 좌우로 청룡·백호를 이루고 남쪽으로는 멀리 안산인 북성산을 바라보고 있다.

세종은 말년에 눈이 침침하고 기력이 쇠약해졌지만 여러 책을 편찬하고 하루에 수십 권의 책을 열람했다. 정인지는 이러한 세종을 "실로 동방의 요순(堯舜·중국 신화속의 명임금)이다"라고 평가했다. 세종은 일단 글을 읽으면 반드시 백번씩 채웠다. 특히 춘추좌전과 초사같은 책은 어렵다 해 다시 백번을 더해 200번을 읽었다. 세자때 하도 글을 많이 읽어 몸이 쇠약해지자, 아버지 태종은 걱정이 돼서 책을 모두 거둬 읽지 못하게 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나라때 소식이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를 묶어 펴낸 '구소수간'이란 책 한 권이 병풍 뒤에 있었는데 무려 천 백 번이나 읽었다 한다. 그리고 당시 이름을 날렸던 황희, 맹사성, 김종서같은 여러 대신들에게까지 세종은 "제발 책 좀 읽으라"며 질책할 정도였
다. 이런 일들을 돌아볼 때 '한글'은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게 아닌 것이다.

사진/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