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개주오, 이 캄캄한 뒤주를 거둬주오, 깊고 질긴 어둠을 바짝바짝 피 마르는 운명의 담금질 속에서도 죽음의 문턱을 핥는 시간의 검은 혀 앞에서도>

"세자를 살려주소서" 그 많던 신하의 소리는 없고/ "할바마마, 아비를 살려주소서, 아비를 살려주소서"/ 열한 살 세손의 애끓는 목소리만 하늘을 울리매….>이 시는 지난 2008년 6월 24일 용주사에서 열렸던 '사도세자 246주기 제향식'때 추도시로 낭송되던 정수자 시인의 '저무는 목숨으로 청컨대'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영조의 강요에 의해 죽음의 길로 들어서게 된 사도세자의 심정과 그를 살리려는 정조의 애절함이 너무도 잘 묘사되어 있어,

마치 그때 궁중에서 일어났던 희대의 참극이 눈 앞에 펼쳐지는 듯하고 정조의 피맺힌 절규가 지금도 귓가에 울리는 듯하다.

▲ 융릉 봉분의 병풍석과 석물.융릉 봉분의 병풍석은 목단(牧丹)과 연화문(蓮花紋) 등 화려한 문양을 하고 있으며 석물의 조각 역시 정교하다.

#비운의 대명사 '사도세자'가 안치된 융릉

[경인일보=글/이민식 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역사적으로 전무후무한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던 사도세자(1735∼1762)는 영조가 40세가 넘어 영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두번째 왕자로 2세때 왕세자에 책봉됐다. 어려서부터 효경(孝經)과 동몽선습(童蒙先習) 등을 익혔고 글씨 쓰기를 좋아했으며 10세때 영의정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 홍씨와 혼인했다. 1749년(영조 25) 15세때 영조를 대신해 국사를 대리청정하게 되자, 노론과 이에 동조하는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영조의 후궁 숙의 문씨 등이 무고하기 시작한다. 이에 현혹된 영조가 사도세자를 질책하자 그는 정신 질환에 시달리게 되면서 온갖 기행을 일삼았다. 홍봉한은 훗날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병도 아닌 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했다"고 술회했다.

그러다가 1761년 정순왕후의 생부인 김한구와 홍계희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했고 이를 보고 격분한 영조가 마침내 나라의 앞날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도세자의 자결을 명한다. 그러나 사도세자가 자결하지 않자, 그를 서인(庶人)으로 폐하고 당시 11세였던 정조가 지켜보는 가운데 뒤주 속에 가두어 8일만에 죽게 했다. 그런후 사도(思悼·세자를 생각하며 추도한다)라는 시호를 내리고, 나라의 앞날을 위해 그것이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내외에 알렸다. 흔히들 말하는 '사도세자'라는 호칭은 이때 생겨났고 이후 사람들 사이에서 비운의 대명사처럼 불리워졌다.

▲ 방위표시 문자가 새겨진 꽃봉오리모양의 인석.

#허물을 덮으려는 할아버지와 드러내려는 손자

사도세자가 비극적으로 죽게된 원인에 대해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크게 두가지 입장이 대립된다. 우선 혜경궁 홍씨가 쓴 '한중록'의 기록처럼 아버지 영조로 부터 정신적 압박감과 왕실내의 미묘한 인간관계로 인해 상황이 꼬이면서 사도세자는 정신질환을 가지게 됐고 살인 등 여러 기행을 일삼다가 일부 신하와 특히 그 생모 영빈이씨의 건의에 따라 영조가 처단을 결심함으로써 불가피하게 부왕(父王)의 단죄를 받았다는 의견이다. 반면에 사도세자는 영조시대의 정치를 개혁하려는 뜻을 품었던 비범한 자질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척족(戚族)과 일부 노론의 사주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기에 이르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어느 쪽의 주장이 진실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정조에게 씌워진 '패륜(悖倫)의 죄인'이라는 굴레는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정조에게 국왕으로서의 정통성을 위협하는 빌미가 됐다. 그의 적대 세력들은 "영조로부터 버림받은 사도세자의 아들은 국왕이 될 자격이 없다"면서 그의 왕위 계승을 끝없이 비방하고 물리적으로도 많은 방해를 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조는 가슴 속의 한을 풀고 사도세자의 허물을 벗겨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사도세자를 국왕의 지위까지 추존해 훗날 자신이 계승하게될 왕통을 정당화하려 했다.

 
 
▲ 원형연못 곤신지는 융릉이 천장된 이듬해(1790년)에 조성됐으며, 곤신방(坤申方·남서방향)은 융릉의 생방(生方·풍수지리용어로 묘지에서 처음 보이는 물을 지칭)으로 이곳이 좋은곳(吉地)이기 때문에 판 연못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벌어진 일이었기에 쉽지 않았다. 사도세자의 허물을 벗겨내는 일은 영조의 극단적 조처가 결국 오류임을 확인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손자가 할아버지의 허물을 드러내는 일은 충효와 같은 유교적 명분론을 국시(國是)로 하던 조선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영조는 자신의 조처가 지나친 일이었음을 깨닫고 이 일이 뒷날 가져올 정치적 파란을 우려해 왕세손이던 정조에게 사도세자 처벌 결정을 번복하지 말도록 특별히 경계했다. 그러면서 정조의 왕통 시비를 우려, 형식상 정조와 사도세자의 관계를 끊어 버리고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켜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영조의 노력도 결국 미봉책에 불과하였다. 왜냐하면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먼저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내외에 천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후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해 형식적 왕통 관계를 명분적으로만 인정하고 동시에 사도세자를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해 현실적 천륜(天倫)을 복원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무덤에 쓰이던 원호(園號)를 '영우원(永祐園)'이라 고치도록 하고 사당도 '경모궁(景慕宮)'이라고 개칭했다.

▲ 융릉 봉분 근경.

#아버지의 권위를 회복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다

정조는 이후 정치적 개혁과 학문 정치의 명분을 내세우고 규장각을 세워 인재를 모아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키워 나갔다. 그리고 차츰 군권(軍權)을 장악해 왕위에 오른지 12년만인 1788년 1월에 마침내 장용영을 발족시켜 친위군사 기반을 갖추기에 이른다. 또 다음 달에는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충해 노론, 소론, 남인의 재상이 모두 참여하는 삼상체제(三相體制)를 구축해 정국을 주도한다. 정조는 이 시기를 전후해 숙원이던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장하고자 결심하게 된 것이다.

1789년 7월, 정조는 영조의 부마이자 자신의 고모부인 금성위(錦城尉) 박명원(화평옹주의 남편)의 상소에 따라 원래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원 읍치 자리가 있는 '화산(花山)'으로 옮겨 쓸 것을 전격 결단한다. 화산은 800개의 연봉(連峰)이 꽃잎처럼 둘러싼 형국이라고도 하고 또는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 하여 일찍부터 국중 제일의 명당자리로 알려져 오던 곳이다. 기존의 수원에서 살던 백성들은 북쪽의 팔달산 아래 즉 지금의 수원 화성신도시로 옮기고 3개월의 작업 끝에 10월 7일 이장을 마치게 된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새 묘소 이름을 현륭원(顯隆園)이라 개칭하고 당대 최고의 조각가였던 정우태를 초빙해 갖은 정성을 다해서 국왕의 위격에 걸맞은 치장을 가했다. 그러나 아직 왕으로 추존하지 못했으므로 석물중에서 석마, 석양, 석호 등의 수량을 반으로 줄이는 차별을 뒀다. 하지만 인조대 이후 처음으로 봉분을 두르는 병풍석을 설치하는 등 기존의 왕세자 묘소와 다른 격식을 갖추고,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동원해 세련된 조각 기술을 집성하도록 한다. 따라서 현륭원에는 결코 사치스럽거나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단아한 진경시대의 걸작 조각품들이 장식돼 있다.

 
 
▲ 화성행궁의 뒤주.

특히 문인석은 언제나 사도세자 곁에 있고자 했던 정조의 마음을 담아 조성한 분신인듯 매우 사실적인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마치 살아있는 정조의 모습을 연상시키게 한다. 조선시대 문인석 조각의 백미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병풍석에는 모란과 연꽃 문양을 정교하게 새겼으나, 군주의 검박을 요구하던 조선의 신료들은 이를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정조 사후 정조의 능묘인 건릉에서는 다시 난간석 제도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정조는 자신의 초상화를 현륭원 재실에 걸어 곁에서 사도세자를 봉양하는 의미를 두기도 했다.

경기도 남부의 화성시에 건릉과 함께 위치한 융릉은 몇해전까지만 해도 한적한 전원 풍경속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최근 개발 논리에 밀려 주변이 택지지구로 변모될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나라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의 왕릉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우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행태인 것같아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사진 / 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