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박상일기자]'특종'은 기자들의 영원한 꿈이다. 수많은 기자들은 기자가 되기도 훨씬 전에, '앞
특종을 잡는 것은 쉽지 않다. 기자가 특종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작은 단서에서 문제의 핵심을 찾아내는 감각, 폭넓은 지식과 정보, 올바른 상황 인식, 끈질긴 취재력, 돈이나 권력에 맞설 수 있는 정의감과 대범함, 독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문장력 등등을 갖춰야 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특종을 잡기 위해서는 발로 뛰어야 한다. 특종은 대부분 '현장'에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렇게 만들어진 기사를 두려움없이 보도할 수 있는 언론사의 결단이 있어야 특종은 빛을 보게 된다.
경인일보의 지난 반세기 역사는 이런 특종을 내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과 결단의 역사였다. 1960년대 창간 초기 열악한 인력과 취재 조건 속에서도, 매일같이 이어지던 군사 정권의 무지막지한 지면 검열 아래에서도, 80년대말 이후 거대한 민주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리고 정보의 홍수 속에서 옳고 그름조차 가늠하기 힘들어진 21세기에 돌입해서도 특종을 향한 노력은 잠시도 속도를 늦추지 않아왔다.
■ 그늘진 곳에 눈을 돌리다
경인일보가 '인천신문'으로 창간한 1960년대는 모든 조건이 열악한 시대였다. 신문사 인력은 부족했고 지면도 넉넉지 않았다. 5·16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군사정권은 언론에 칼자루를 휘두르며 생존을 위협했다. 서민들은 배고프고 가난했으나, 권력을 가진 일부 계층은 부(富)의 '단맛'을 서서히 느껴가던 시기였다. 이런 시대상황 속에서 '인천신문' 기자들은 사회의 그늘진 곳을 찾아 실상을 보도하는데 힘을 쏟았다.
인천신문 1964년 12월 3일자에는 '알바이트란 이름의 탈선지대'란 제목의 기사가 실린다. 당시 곳곳에서 횡행하고 있던 '캬바레'의 탈선 아르바이트를 고발한 기사였다. 기사는 적나라한 현장 사진과 함께 불법 아르바이트와 사행성 행위가 판을 치는 이곳이 '사회악 조성의 전초역(前哨役)'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이 기사는 당시 구석구석에서 만연하고 있지만 모두들 '쉬쉬'하던 문제를 사회적인 문제로 부각시켜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월남전 파병이 한창이던 1966년 여름에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진다. 평택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가난으로 인한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져 숨졌다는 기사였다.
아사(餓死)가 흔했던 당시로서는 지나칠 수 있는 기사였지만, '인천신문' 기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인천지역의 열악한 교육 환경에 눈을 돌린다. 이어 9월 7일에는 '혹사당하는 교사들', 11월 10일에는 '배고파 못살겠다 교사 이직 늘어' 등의 시리즈로 교육 정책의 문제를 파헤친다. 이어 12월에는 교육 전문가와 교사들을 불러 인천교육의 문제점을 냉철하게 분석하는 좌담회를 개최해 큰 반향을 일으킨다.
'인천신문'은 이어 1968년 2월에는 '빚에 몰리는 윤락녀들'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어둠 속에서 힘겨워하고 있는 윤락녀들의 고통을 조명한다. 같은 해 9월에는 '우리나라 종교인 530만명과 종교계의 문제점'이라는 기사로 종교계의 자정(自淨)을 촉구하기도 한다.
■ 대형 사건사고 현장으로 뛰다
경인일보의 반세기 기록을 들춰보면, 수도권은 끊임없는 사건사고의 현장이었음을 실감한다. 1960~1970년대를 얼룩지게 했던 각종 폭발사고와 추락사고로 부터 최근의 천안함 침몰사고까지, 경인일보 기자들은 대형 사건사고 현장에서 함께 눈물을 흘리고 함께 분노했다. 기자들이 전한 생생한 현장 기사는 '특종'은 아니었어도 땀과 눈물의 기록이었다. 그리고 경인일보 기자들은 사건사고의 원인과 문제점을 분석하는 기사로 '인재(人災)'의 재연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1963년 6월 인천 답동에서 폭발사고로 20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터진다. 이 사고가 발생하기 전인 2월에 '인천신문'은 잦은 폭발물 사고를 비판하는 기사를 내보낸다. 안전 불감증이 불러올 사고를 미리 예고한 기사였다. 이어 1967년과 1969년의 제트기 민가추락 사고, 1969년 남한강 버스 추락사고(50여명 사상), 1971년 버스 추락사고와 실미도 사건, 1973년 수원 파장국교 매몰사고, 1977년 집중호우, 1986년 강화 카페리 전복, 1988년 안양 섬유공장 화재, 1990년 남한강 버스추락 사고 등으로 이어진 대형 사고의 현장에서 경인일보 기자들은 몸으로 뛰며 현장의 소식을 전한다.
사건사고의 현장을 뛰던 경인일보 기자들에게 1990년 9월은 잊지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수도권에 26년만에 최대 폭우가 쏟아지면서 한강이 범람해 고양 일대가 순식간에 물바다로 변했다. 몸을 피할 새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수마(水魔)에 휩쓸려 갔다.
경인일보 기자들은 현장을 뛰었다. 길이 끊겨 현장 접근조차 어려웠다. 어렵게 군 헬기를 얻어 타고 현장을 내려다본 당시 사진부 조형기 기자(현 경인일보 전문위원)는 "눈에 보이는 것은 온통 시뻘건 흙탕물 뿐"이라고 전했다. 인천 송림동 달동네에서는 그날 폭우로 산사태가 11채의 가옥을 휩쓸었다. 15명이 숨지고 17명이 매몰됐다. 폭우를 뚫고 달려간 기자의 눈에 펼쳐진 것은 지옥같은 현장이었다. 끔찍한 사건의 현장은 '참사의 현장'이라는 사진으로 독자들에게 전해졌다.
■ 시작된 특종의 역사
1990년 9월, 한국기자협회는 '이달의 기자상'을 제정해 시상을 시작한다. 공식적으로 '특종'을 평가하고 시상하는 길이 열린 것이다. 경인일보는 1994년 12월 '굴업도 핵폐기물 처리장' 기사로 이달의 기자상 수상의 길을 열었다.
이보다 앞서 1994년 9월 경인일보는 한국 언론사에 남을 '특종'을 보도한다. 유명한 '인천 북구청 세금횡령사건'으로, 1995년 전국을 강타한 세무비리 수사의 서막을 알린 사건이었다. 이 기사는 '특종은 1단 기사에서 나온다'는 언론계의 속설을 그대로 증명한 대표적인 사례로도 유명하다. 경인일보 기자들은 인천 북구청 세무직 말단 공무원의 비리를 끈질기게 파헤쳐 고위직까지 연결된 뿌리깊은 세무 공무원들의 비리를 폭로한다. 당시 타 언론매체들이 경인일보 보도를 기다렸다 기사를 작성할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킨 이 기사는 그해 최고의 기사로 선정돼 다음해인 1995년 '한국기자대상'을 받았다.
경인일보의 세무비리 취재는 한편에서 끝나지 않았다. 1996년 5월에는 부천지역 유지들이 세무공무원과 결탁해 세금을 빼돌린 '부천 세무비리사건'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한다. 이 기사는 1996년 5월 '이달의 기자상' 수상에 이어 그해 경인일보에 또한번 '한국기자대상'의 영광을 안긴다.
■ 계속되는 특종 '신기록'
'이달의 기자상'과 '한국기자대상'으로 증명되는 경인일보의 특종 행진은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다. '학생들의 건강을 담보로 잡은 교육계 뒷돈 거래'로 지난해 11월 제229회 '이달의 기자상'을 수상한 것까지, 경인일보는 총 46회의 '이달의 기자상'과 7회의 '한국기자대상'을 연이어 수상함으로써 지역 일간지는 물론 전국의 언론을 통틀어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특히 1996년 10월부터 6개월에 걸쳐 보도하며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운 '갯벌을 살리자'(1997년 한국기자대상), 1999년 10월 전국을 충격에 빠뜨렸던 '안산중앙병원 관장약 파동사건'(1999년 한국기자대상), 단순한 사건을 넘어 민족적인 울분이 표출되는 도화선이 됐던 2002년 6월의 '미군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2002년 한국기자대상), 2006년 여름 정가(政街)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던 '한나라당 수해골프' 보도(2006년 8월 이달의 기자상) 등은 '특종 신문' 경인일보의 위상을 여실히 증명한 기사들이었다.
경인일보는 또 1995년부터 1997년까지 3년 연속 한국기자대상 수상, 두 차례에 걸친 3개월 연속 이달의 기자상 수상, 4차례에 걸친 같은 달 이달의 기자상 2개 부문 동시석권 등의 이례적인 기록을 세우면서 지금도 한국 언론사에 남을 커다란 기록을 만들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