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글/이창환 상지영서대학 조경과 교수]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에 자리잡은 장릉(莊陵)은 조선의 6대 단종(端宗·1441~1457)의 능이다. 단종은 문종(5대 임금)과 현덕왕후 권 씨의 아들로 열 살때 인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세손으로 추봉된다. 그러나 아버지 문종이 임금이 된지 2년 3개월만에 승하하는 바람에 그는 12세에 왕위에 올라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겪게 된다. 더구나 어머니 현덕왕후는 이미 단종의 출산 후유증으로 출산 후 3일만에 죽고 없었기 때문에 단종은 그 누구보다 외로웠을 것이다.

▲ 청령포. 단종이 유배 됐던 곳으로 삼면이 깊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면은 높은 벼랑에 가로막혀 천연의 감옥 같은 곳이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마음 둘데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왕방연의 시조

# 서인까지 강등됐다 임금으로 복위된 단종

단종은 어릴 때 세종과 소헌왕후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할아버지 세종의 칭찬이 자자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명석했고, 어머니 현덕왕후가 세상을 일찍 뜨자 할머니인 소헌왕후가 더욱 애틋하게 보호했던 것이다. 문종은 자신이 병약하고 세자가 나이 어린 것을 염려해 황보인·김종서 등에게 세자(단종)가 즉위해 왕이 되었을 때의 보필을 부탁했다. 하지만 김종서, 황보인 등의 황표정사(黃標政事·대신들이 미리 낙점할 사안 옆에 노란 표식을 붙여 올리면 단종이 이를 보고 결재하는 것 )는 정국을 혼란에 빠뜨리고 종사를 위태롭게 한다. 그러다 1453년 그를 보필하던 황보인·김종서 등이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제거당하자 수양대군이 군국(軍國)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으며,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었다. 결국 1455년 단종을 보필하는 중신을 제거하는데 앞장섰던 한명회·권람 등이 강요해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됐다. 이를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고 한다.

이후 1456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돼 모두 처형됐으며, 단종은 1457년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돼 강원도 영월에 유배된다. 그런데 수양대군의 동생이며 노산군의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경상도의 순흥에서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돼 사사(賜死)되는 일이 발생한다. 이때문에 단종은 노산군에서 다시 서인(庶人)으로 강등됐다.

단종복위운동을 하다가 죽음을 당한 성삼문 등의 6명을 사육신(死六臣)이라 하고,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에 분개해 한평생을 죄인으로 자처한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은 귀머거리나 소경인 채 살아가거나 두문불출하며, 단종을 추모했다. 이 6명을 생육신(生六臣)이라 한다. 단종의 억울한 죽음과 강봉(降封)은 200여년 후인 1681년(숙종 7) 신원돼 대군(大君)에 추봉됐으며, 1698년(숙종 24) 다시 임금으로 복위돼 묘호를 단종이라 하게 된 것이다.

▲ 비운의 어린 소년왕 단종이 묻힌 장릉은 영월읍내에서 제천방향으로 1㎞남짓 떨어진 동을지산(冬乙旨山)기슭에 있다. 사후에나 갑갑한 유배지를 벗어난듯 탁 트인 조망이 눈에 들어온다.

# 두견새가 되어 세상을 떠나다

금성대군의 복위 계획 실패로 청령포에 갇히는 신세가 된 단종은 끈질기게 자살을 강요당하다 1457년(세조 3) 10월 24일에 영월에서 죽었다. 청령포는 동강이 삼면으로 휘돌아 흐르고 뒤로는 험악한 절벽으로 둘러사인 천혜의 감옥이었다. 단종이 영월읍 관풍헌에서 사약을 받아 죽은 후 그의 시체를 영월의 아전 엄홍도가 수습해 현 위치(장릉)에 매장했다. 사약을 먹고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엄홍도가 장사지내려 할 때 주위 사람들은 후환이 두렵다고 그를 말렸다. 하지만 그는 "옳은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해도 나는 달게 받겠다"라며 단종의 시신을 홀로 밤에 거두어 장사지냈다고 전해진다. 수십년 동안 단종의 묘는 제사도, 봉양도 받지 못하고 찾는 이도 없었다가 중종33년(1538) 영월군수로 부임한 박충원이 그 곳을 찾아 봉축하고 전물을 갖추면서 알려지게 됐다. 이렇게 우여곡절끝에 알려진 장릉의 능침은 다행히도 양지바른 곳에 있어 눈이 와도 쉽게 녹으며 따뜻하다. 장릉 터를 풍수가들은 갈룡음수형(渴龍飮水形),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이라 한다.

한편 단종이 청령포에서 사사되자 단종의 영혼은 불교의 환생논리에 의해 '두견새'가 됐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단종의 유배시 함께 따라 온 시녀들은 청령포 건너 동강 절벽에 있는 낙화암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이들 영혼은 단종의 유택이 있는 장릉의 능선 끝자락에 와서 단종의 영혼에 절을 하고 시중을 들었다 한다.

정조 때 영월부사로 부임한 박기정(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은 이 이야기를 듣고 그 뜻을 기려 배견정(拜鵑亭)이라는 정자를 세워주고, 뒤편 바위에 친히 '배견암'이라는 글자를 썼다고 한다. 또한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32인, 조사186인, 환자군노 44인, 여인 6인 등 총 268명의 위패를 모셔 그들을 위로 하고 있다. 이 건물이 '장판옥'이다. 장판옥 맞은편 배식단에서는 매년 4월 단종제를 올린 후 이들의 제사를 지낸다.

▲ 장릉전경. 홍살문 정자각 봉분이 거의 일직선상에 있는 다른 능들과 그 배치가 많이 다르다.

# 암매장했던 초라한 무덤 수세기에 걸쳐 조영

장릉은 능침공간과 제향공간이 여느 능과 다르게 배치돼 있다. 장유형의 능선 중간에 능침이 있으며 능침 서측 수십 미터 아래에 평지를 이용, L자형 참도 끝에 능침을 옆으로 하고 정자각을 배치해 놓았다. 일반적 직선형 제향공간과 다른 형태이다. 이것은 단종이 몰래 암매장되고 능침 앞이 좁아서 그렇게 한 것이다. 장릉 능침공간의 상설은 정릉(貞陵)과 경릉(敬陵)의 예에 따라 난간석과 병풍석, 무인석은 생략됐고, 세자 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능역이 조성된 숙종 때는 임금 단종이 아니라 세자 '노산군'이었기 때문이다. 중종 때 첫 능지 확인 후 숙종대에 이르러 혼유석과 장명등, 석호, 석양, 망주석 등 석물을 정비하고, 영조대에 제향공간을 만들고 정자각과 수복, 수라간, 그리고 산신석, 예감 등을 배치하고 정려각과 배식단, 장판옥을 만들었다. 이렇듯 장릉은 수세기에 걸쳐 조영된 것이다.

장릉의 능침에서 바라보는 나무들과 첩첩산중의 전경은 아름답고 장엄하다. 제향공간 곡선의 참도 옆에 설치된 영천은 일반 능역의 제정(어정)으로 가뭄과 홍수에도 마르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있는데, 이곳을 본 신하 박기정이 조정에 알리자 정조가 친히 '영천(靈泉)'이라 이름을 정했다 한다.

평생을 불안하게 살았던 단종은 부인 정순왕후 송 씨와의 사이에 자녀가 없다. 정순왕후의 능은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가 출가한 해주 정씨 묘역인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 산65의1에 있으며 능호는 사릉(思陵)이다. 영월에서는 매년 한식날을 전후해 장릉의 제례를 지내는데 이를 '단종제'라 하며 현재 영월의 큰 문화행사로 자리잡았다.

사진/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