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의 풍수 핍박을 받은 원종
풍수술사들 사이에 '명당 쓰고 인물 나는가 하면, 인물 나고 명당 쓰기도 한다'는 말이 있다. 언뜻 보면 아들이 임금이 되자 지금처럼 양지바르고 넓은 곳으로 옮겨졌으니 인물 나고 명당 쓴 셈이다. 그런데 원종은 그렇게 간단히 해석할 수 없는 풍수지리와의 모진 인연이 있다.
정원군(원종)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재능과 비범한 관상으로 부왕인 선조(宣祖) 임금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선조가 죽고 이복형인 광해군이 임금이 되자 정원군은 '잠재적인 정적'으로서 광해군에게 집중적인 견제와 감시를 받았다. 특히 정원군의 어머니 인빈김씨의 무덤과 정원군이 살던 집터에 왕기가 서렸다는 소문 때문에 광해군은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그 와중에 1615년(광해군 7년) 이른바 '신경희 옥사'라는 사건이 터진다. 소명국이란 사람이 '정원군의 셋째 아들 능창군이 신경희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고자 한다'고 무고를 하자 광해군은 능창군을 강화도로 유배 보내 죽게 한 것이다.
한편 정원군이 아들을 잃은지 2년후인 1617년(광해군 9년)에는 지관 김일룡이 "새문동에 왕기가 서려있으니 그곳에 궁궐을 짓자"고 광해군에게 보고하는데, 왕기가 서렸다는 새문동터는 다름 아닌 정원군이 살던 집터이다. 이에 광해군은 정원군의 집터를 빼앗아 경덕궁(현재의 경희궁)을 짓게 한다.
사랑하던 셋째 아들 능창군이 광해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자신이 살던 집터까지 광해군에게 빼앗기자 정원군은 술로 화병을 달래다가 2년 후인 1619년(광해군 11년) 40세의 나이로 죽는다. 그래도 불안했던지 광해군은 정원군의 무덤 자리를 제대로 고르지 못하도록 장례기간의 단축을 재촉하고 조문객을 감시하도록 한다. 유족들은 장지를 고를 엄두도 내지 못한채, 정원군의 처가 선산에 그를 대충 안장한다. 여기까지 보면 정원군과 광해군의 싸움에서는 광해군이 완벽하게 이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원군이 세상을 떠나고 4년 후인 1623년에는 광해군이 쫓겨나고 정원군의 큰 아들인 능양군이 임금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인조(仁祖)다. 그때까지 살아있던 정원군의 부인(인헌왕후)은 아들이 임금이 되자 마치 남편의 한이라도 풀 듯 빼앗긴 새문동 집터(경덕궁)로 되돌아가 몇 년을 살다가 1626년에 숨을 거둔다. 이렇게 보면 결국 광해군이 정원군의 부인을 위해 궁을 지어준 셈이다.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로하기 위해 이장을 결심한 인조
인헌왕후가 죽자 아들 인조는 어머니를 아버지 무덤 옆에 합장하지 않고 새로운 자리를 찾게 한다. 광해군에 의해 동생 능창군을 잃고 아버지 정원군이 화병으로 죽은 사실을 괴로워했던 인조 임금으로서는 어머니와 아버지 무덤 선정에 각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덤 선정 과정에 대해 인조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1619년 아버지(정원군)가 상을 당했는데 그때 광해군이 시기하고 질투하는 것이 날로 극심했고, 또 다그치고 감시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감히 마음대로 장지를 정하지 못해 외가의 선산에 임시로 장사를 지냈다. 하지만 그곳은 길가의 낮은 언덕일 뿐만 아니라 모양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유골이 편안하지 못하고, 나무꾼과 가축치기들이 함부로 다니는 것이 염려돼 이장을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별고가 잇따랐으므로 지금까지 실천하지 못했으니 이 역시 과인의 큰 불효인 것이다. 양주의 풍양(진접읍)에 할머니(인빈김씨)의 산소가 있기는 하지만 산세가 높고 가파르며, 언덕이 짧고 감싸 도는 데가 없어 쓸 만한 자리가 없다. 도감으로 하여금 나라에서 쓰려고 해 둔 것 가운데서 사의(私意)에 따르지 말고 극진히 가려서 장지를 정하게 하라. 그리고 아버지의 산소도 개장할 계획을 세워 한편으로는 신도(神道)를 편안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나의 마음을 위로하게 하라."
그렇게 해서 정해진 것이 '김포객사(金浦客舍·현재의 김포시청)' 뒷산 너머에 자리한 현재의 장릉이다. 즉 인조의 어머니를 현재의 장릉에 먼저 안장하고, 이후 아버지(원종) 무덤을 이곳으로 이장한 것이다.
#왕릉 풍수 용어의 혼란
장릉을 풍수호사가들이 자주 찾는 까닭은 이곳이 왕릉 가운데에서도 대단한 길지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곳으로 정원군이 안장된 이후 비록 그 아들 인조가 청나라에 굴욕적인 항복을 하기는 했지만 대대로 그 후손들(효종→현종→숙종→경종…)이 임금이 돼 조선을 지켜갔기 때문이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조선왕릉을 다른 전문가들이나 문화유산해설사들과 함께 몇 번 답사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때마다 왕릉 뒤 약간 볼록한 부분을 가리키면서 "바로 이곳이 지기가 뭉쳐진 '잉(孕)'이지요?"라는 확인성 질문을 받곤 했다. 예전에는 전혀 쓰이지 않았던 이 '잉'이란 풍수용어가 왜 갑자기 등장한 것인가?
조선의 모든 왕릉 선정에는 풍수의 전문가, 즉 지관(地官)들이 참여해 자리를 잡았기 때문에 왕릉 관련 전문가들이나 해설사들은 '왕릉과 풍수'를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잘못된 풍수용어의 남용이 아주 심각하다는 점이다. 일부 풍수술사들이 왕릉 관련한 책을 내거나 답사기를 쓰면서 자기가 알고 있는 풍수용어들을 왕릉의 지형지세에 자의적으로 대응시키면서 생겨난 것인데, 이것을 참고로 해 다시 왕릉을 해설하면서 생겨난 문제이다. 왕릉선정에 참여한 당시 지관들은 '경국대전'에 명시된 풍수서들을 공부한 뒤, 국가에서 실시하는 시험에 합격해야 이른바 지관이란 '국가공무원'이 될 수 있었다. 참고로 조선조 지관 선발 필수과목은 다음과 같다.
# 조선조 지관 선발 고시 과목
1. 청오경(靑烏經) 2. 장서(葬書: 일명 금낭경錦囊經) 3. 지리신법(地理新法: 일명 호순신胡舜申) 4. 명산론(明山論) 5. 지리문정(地理門庭) 6. 감룡(감龍) 7. 착맥부(捉脈賦) 8. 의룡(疑龍) 9. 동림조담(洞林照膽)
따라서 왕릉을 풍수적으로 이야기할 때 위의 풍수서들을 근거로 해 정확한 용어 사용과 해설이 뒤따라야하며, 왕릉 관련 풍수답사기를 쓰는 이들의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한번 잘못 사용된 용어들을 훗날 정정하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사진 / 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