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언론매체에 실린 '광고'라고 하면 '기업이나 소규모 업체들의 단편적인 상품·서비스 홍보' 정도를 떠올리지만, 광고의 내용과 변화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 작은 표현 활동안에는 당시의 사회적·경제적 상황은 물론이고 기술적 진보와 정치이념까지도 녹아 숨쉬고 있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상품이나 서비스들이 광고에 등장할 뿐 아니라, 당시 언론매체의 '기사'에 편입되지 못한 수많은 의견과 사상들이 스스로 '광고'라는 형태를 빌려 표현돼 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언론매체에서 광고를 자세히 살펴보는 일은 또다른 즐거움과 의미를 주는 일이고, 매체를 통해 시대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광고'를 대단히 중요한 연구 대상으로 삼아 수많은 논문을 발표해 오고 있다.
수도권을 대표하는 지역신문으로 지역의 역사와 함께 하며 반세기를 지나온 경인일보에는 지난 50년간 수없이 많은 광고들이 실렸다. 1960년대 열악한 인쇄 기술로 표현된 광고로부터, 최근의 첨단 광고기법을 사용한 신제품들에 이르기까지, 경인일보에 등장한 광고들 역시 경인지역은 물론 우리나라의 시대 변화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이 되고 있다.
■ 1960년대 :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1960년대 초 인천신문 하단의 광고는 대부분 양복점과 약방, 병원, 안경점, 시계점, 금은방, 학원, 제과점 등이었다. 여기에 간간이 정부나 공공기관의 공고나 알림이 더해졌다. 지면에 큼직한 광고를 할만한 경제력 있는 광고주들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광고 지면은 작은 조각광고들로 짜맞춰졌다. '가뭄에 콩나듯' 등장하는 커다란 광고들은 양복점이나 병원, 또는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기 시작한 조미료 광고 정도였다. 광고의 모양도 열악한 인쇄 기술로 인해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대부분의 광고는 활자를 짜맞춰 만들어졌는데, 시각적 효과를 위한 그림들은 손으로 그린 것이 많았고, 일부는 활자까지도 손으로 그려졌다.
당시의 광고 중 눈길을 끄는 하나는 영화광고였다. 일제시대부터 대중들의 인기를 모아온 영화는 전쟁 이후 어려운 시절에도 여전히 인기를 이어갔다. 당시 상영된 영화는 대부분 할리우드에서 제작돼 전세계적으로 배급된 작품들이었고, 광고는 영화의 장면과 홍보문구, 상영시간 등이 뒤섞인 복잡한 형태에서부터 급하게 활자로만 짜맞춰진 단순한 광고까지 다양하게 만들어졌다.
'인천신문'에 실린 광고들 중 또하나 눈에 띄는 것은 1963년 10월 10일부터 13일까지 연속으로 실린 박정희 당시 민주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광고였다. 박정희 후보는 당시 보기 드문 대형 광고를 연속으로 게재해 자신에 대한 비판에 반격을 가하는 한편,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에서 자신이 그리고 있는 조국의 미래를 설명하고, 세대를 뛰어넘어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인천신문에는 1968년 10월에 또하나 특이한 광고가 등장한다. 동인천역 인근에서 8년간 '자성의원'을 경영하다가 1964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던 이길여 현 가천길재단 회장이 4년여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이길여의원'으로 개칭 개원한다는 광고였다. 당시 이길여 원장은 자성의원를 찾았던 고객들을 위해 예전 자성의원 자리에 다시 병원 문을 열었고, 이를 지역신문을 통해 널리 알렸다. 이후 이길여의원은 뛰어난 의술과 독보적인 경영 능력을 등에 업고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현재의 가천의대 길병원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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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 '희망'에 눈을 뜨다
한국전쟁의 상흔이 가시고 '새마을운동'과 수출을 통해 본격적인 경제 성장에 돌입한 1970년대는 희망에 눈을 뜨기 시작한 시기였다.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생산과 수출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고, 농촌 역시 주택 개량과 경지 정리, 신품종 보급 등을 통해 생산력과 생활환경이 좋아지면서 활기가 넘쳤다.
이같은 변화는 신문 광고에도 변화의 바람을 몰고 왔다. 기업들의 대형 광고가 눈에 띄게 많아졌고, 광고의 내용도 1980년 100억달러 수출 목표를 향한 의욕적이고 도전적인 문구들을 등장시켰다. 농촌에 본격적으로 공급되기 시작한 비료와 농약들이 새롭게 광고에 등장했고, 농업협동조합이 '농촌근대화의 기수, 농촌경제 자립의 핵'을 내세우며 조직을 키워 주요 광고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후반 들어서는 주요 제조기업들이 본격적인 국내 생산에 돌입하면서 신문 광고에도 TV와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자동차, 건축자재 등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광고주들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 신문 하단의 광고란을 통째로 사용하는 '통 광고'들이 자리를 잡고, 간간이 신문 1개면 전체를 사용하는 '전면광고'가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눈에 띄는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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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이후 : '규모의 경제'가 시작되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수출을 통한 경제 성장을 거쳐 1980년대부터는 본격적인 산업의 시대가 활짝 열린다. 기업들이 대기업으로 성장해 기술의 발전과 축적된 자본을 통해 대량생산에 돌입하면서, 경제의 규모가 급격하게 확대된다.
1980년대 이후 급격하게 성장한 대기업들은 좁은 국내시장을 넘어 해외시장에 눈을 돌린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과 뛰어난 품질의 제품뿐 아니라, 세계시장에서도 통할 수 있는 마케팅 능력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대기업들의 광고를 대행하기 위한 전문 광고기업들이 생겨났고, 이들의 손에 의해 탄생한 광고들은 기존의 광고시장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롭고도 혁신적인 이미지들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한 화려한 광고나 신문의 양면에 걸치는 초대형 '브릿지 광고'등이 등장한 것도 이같은 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대기업들 뿐 아니라 지역에 뿌리를 둔 중소자본들도 경제적 여력이 확대되면서 대형 지역병원, 대형 위락시설과 식당, 지역 백화점, 중소 제조기업 등이 광고주 대열에 합류한다. 이들은 지역에서 대기업들과 차별화된 또하나의 경제성장 동력으로 적지않은 역할을 하면서 지역경제의 든든한 토양이 된다.
이어 1990년대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대기업들의 광고들과 함께 본격적인 부동산 개발 붐을 타고 등장한 건설업계의 광고가 광고시장의 주류로 등장한다. 아파트 분양광고와 상가·토지 분양광고로 대표되는 건설업체들의 광고는 2000년대 인터넷 매체의 확대로 신문 지면에서 급격하게 사라진 '법원경매공고'의 빈 자리를 메우는데 큰 역할을 한다.
기업들의 성장과 더불어 본격적인 지방자치시대 개막과 발전도 지역언론의 광고에 큰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1990년대 후반을 지나 2000년대로 돌입하면서 각 지방자치단체들은 다양한 사업과 행사들을 본격적으로 만들어내기 시작했고, 이같은 사업이나 행사를 주민들에게 널리 알리는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지역신문의 광고였다.
1980년대 이후 경인일보 광고에서 눈에 띄는 또하나의 변화는 다양한 의견의 표출이었다. 1980년대 후반 민주화 열풍을 겪으면서 민주주의의 핵심 중 하나인 '다양성'이 부각되었고, 국민들은 높아진 의식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다양한 사고와 사상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게 되었다. 이에따라 1990년대부터 경인일보 지면에도 개인이나 단체들의 주장을 실은 다양한 광고들이 등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