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가 묻힌 헌릉의 석물들은 망주석을 제외하고는 모두다 한 쌍씩 배치됐다. 문·무인석의 모습과 크기는 건원릉과 유사하다.

[경인일보=글/정종수 국립고궁박물관장]창업(創業)보다 더 어려운 것이 수성(守成)이다. 어느 왕조든 2대가 잘하지 못하면 그 왕조는 단명한다. 중국의 예를 보더라도 2대가 수성을 잘한 왕조는 오래갔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는 단명으로 끝났다. 만일 태종이 없었더라면 과연 조선 왕조가 오백여년이나 지탱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바로 태종이라는 걸출한 군주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필자는 태종을 이야기할 때 결코 '성군(聖君)'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대신 '영민하고 과단성있고 투철한 통치철학을 가진 군주'라고 평한다. 태종은 성격이 매우 독하고 때로는 폭풍처럼 몰아치는 결단력과 무자비함을 동시에 갖춘 인물이었다. 서울 강남구 내곡동 대모산 남쪽 자락. 이곳에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의 헌릉이 자리잡고 있다. 능 입구에는 제23대 순조와 순원왕후를 합장한 인릉(仁陵)이 있다. 인릉을 지나 울창한 숲길을 따라 걷다보면 조선 왕조를 세우고 기틀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태종(太宗·1367~1422)과 그의 비 원경왕후(元敬王后·1365~1420) 민씨가 나란히 잠든 헌릉을 만날 수 있다.

▲ 혼유석 밑 배전석의 네모난 구멍속의 태종우.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10일에 오는 비를 백성들은 '태종우(太宗雨)'라고 불렀다.

1·2차 왕자의 난 골육상쟁으로 쟁취한 비정한 권력

# 방석(芳碩)의 세자 책봉과 '제1차 왕자 난'의 씨앗

1367년(고려 공민왕 16년) 5월 16일, 태종은 함흥 귀주동에서 태조와 신의왕후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우왕때 태종 이방원은 열여섯 살 나이에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머리가 명석했다. 태종 등극의 1등 공신으로 관상을 잘 봤던 하륜은 태종을 보고 다른 이들에게 "이 사람은 하늘을 덮을만한 영특한 기상이 있다"고 했다. 계모인 신덕왕후 강비도 태종 방원의 글 읽는 소리를 들으면, "어찌 내 몸에서 나지 않았는가"하며 아쉬움으로 탄식했다고 한다.

이방원은 태조를 도와 조선 왕조 개국에 커다란 공을 세웠다. 고려 충신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조영규로 하여금 격살토록 하고,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폐위하게 한 뒤 아버지 이성계를 등극하게 하는 등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이었다. 그런데 태조는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장성한 자식들을 제쳐 두고 계비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어린 '방석(의안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막내 방석을 특별히 총애한 태조는 강비의 공을 거론하면서 그의 소생을 세자로 세우기 위해 배극렴과 조준 등을 내전으로 불렀다. 태조가 "누구를 세자로 책봉했으면 좋겠는가?"하고 묻자. 배극렴이 "적장자를 세우는 것은 고금을 통한 의(義)입니다"라고 대답한다. 태조는 언짢아하면서 옆에 있던 조준에게 다시 물었다. 조준은 "시국이 태평할 때에는 적장자를 먼저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우면 공이 있는 이를 먼저 세워야 한다"고 간했다. 비록 조준이 누구라고 지칭은 하지 않았지만 공이 있는 자란 곧 한씨 소생 '태종 방원'을 두고 한 말이다. 태조가 방석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던 것은 결국 형제들간의 골육상쟁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 헌릉의 참도는 신도와 어도가 구분돼 있지않다.

왕권강화로 세종조 태평성대 터닦은 카리스마 군주

# '1·2차 왕자의 난'과 왕권 강화를 도모한 태종

결국 태조가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방원은 1398년(태조 7) 중신 정도전, 남은 등을 살해하고, 이어 강씨 소생의 방석과 방번을 귀양보내기로 했다가 도중에 죽여 버린다. 이것을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하며 방원은 이때 세자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동복형인 방과(芳果·정종)에게 양보한다.

1400년(정종 2) 이번엔 넷째 형인 방간(芳幹)이 박포와 공모해 방원 일당을 제거하려 하자, 방원은 이를 즉시 평정하고 세제(世弟)에 책봉된다. 방간·박포의 난을 가리켜 '제2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제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된 후 방원은 정종의 양위(讓位)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태종은 즉위하자 사병을 혁파하고 의정부 설치와 사간원 분리 등 관제개혁을 통해 왕권의 강화를 도모한다. 또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강화해 전국의 많은 사찰을 폐쇄한 후, 그 사찰에 소속되었던 토지·노비를 몰수하고, 또 비기(秘記)·도참(圖讖)의 사상을 엄금해 미신 타파에 힘썼다. 한편 호패법을 실시해 양반·관리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가 이를 소지하게 함으로써 인적 자원을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며, 개가(改嫁)한 자의 자손은 등용을 금지해 적서의 차별을 강요하기도 했다.

문화정책으로는 주자소를 세워 1403년(태종 3) 동활자인 계미자(癸未字)를 만들었으며, 하륜 등에게 '동국사략', '고려사' 등을 편찬케 했다.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기 위해 신문고를 설치하기도 했는데 그 뜻은 매우 좋은 것이었으나 뚜렷한 실효는 거두지 못했다.

▲ 조선왕릉의 신도비는 건원릉과 헌릉에만 있는데 능 조성때 세운 왼쪽의 신도비가 임진왜란때 손상되자 숙종때 오른쪽의 신도비를 새로 세웠다.

생전 불화 달래듯 효자 아들이 난간으로 연결한 부부쌍릉

# 헌릉의 조성

헌릉은 풍수지리적으로 산맥이 백두산에서 내려와 남쪽으로 수천리를 지나 보은 속리산에 와서 서쪽으로 꺾였다가 다시 북으로 수 백리를 달려와 청계산에 이른다. 그곳에서 다시 동북쪽으로 꺾여 한강 앞에 멈추었는데, 그것이 바로 대모산이다. 이곳에 자리잡은 헌릉은 땅의 영모함이 머물러 있고, 기운이 꿈틀거리는 길지이다.

헌릉은 1420년(세종 2년) 원경왕후가 사망했을 때 태종의 명으로 조성됐고, 1422년 태종이 사망하면서 쌍릉이 됐다. 세종은 모후가 승하하자 당일로 국장도감을 설치하고, 능제는 태조의 건원릉을 따르도록 했다. 당시 왕비의 석곽은 서울 동대문구 창신동의 석산 돌로 사용했다. 석곽 덮개돌은 원래 물 등이 새어들지 않도록 한판으로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그렇게 하면 백성들이 다친다며, 반을 쪼개 두 개를 덮도록 지시하고 직접 자신이 현장에 가 석공들로 하여금 둘로 쪼개도록 했다.

▲ 헌릉 전경. 동원이봉(同原異封)의 쌍릉으로, 앞에서 볼때 왼쪽이 태종, 오른쪽이 원경왕후의 능이다.

원경왕후가 죽은 2년 뒤 1422년 5월 10일 태종이 승하하자, 4대 임금 세종(世宗)은 모후의 능 옆에 부왕의 자리를 마련해 봉분을 나란히 만든 뒤, 난간을 연결해 쌍릉으로 조성했다. 남좌여우(男左女右)의 원칙에 따라 왼쪽을 태종의 능으로 만들었다. 원경왕후때 장례기간을 3개월로 했던 것과 달리 태종의 장례는 5개월 장으로 거행됐다. 당시 헌릉으로 가는 국장 행렬에 참가한 사람의 수효는 무려 9천명이나 됐다.

임금의 재궁(梓宮·왕이나 왕후의 관)이 묻히는 광중의 깊이는 약 3m에 가깝고, 안은 석실로 돼있으나, 바닥에는 돌을 깔지는 않았다. 이는 목관이 썩었을 때 백골이 돌 위에 놓여지는 것을 막고, 땅의 지기를 온전하게 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광중의 깊이를 민묘보다 2배나 깊은 3m로 한 것은 빗물과 습기를 막고, 한기(寒氣)와 도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석실 천장에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을 그리고, 사면의 벽면 왼쪽에는 청룡, 오른쪽에는 백호를, 북쪽에는 현무, 문이 있는 남쪽에는 주작이 들어간 사신도를 그렸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13-1

한편 능 앞의 석물들은 망주석만 빼고 모두 한쌍씩 배치돼 있는데, 이는 고려왕조의 현릉(玄陵)과 정릉(正陵) 제도를 따랐기 때문이다.

사진 / 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