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일보=글/염상균 화성연구회 사무처장]경기 남부지역인 수원, 용인, 오산, 화성 등에서는 새로 만든 용인~양재간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쉽게 '인릉(仁陵)'에 도달할 수 있다. 서울 서초구 내곡동 대모산에 위치한 인릉은 조선 제23대 왕 순조(純祖·1790~1834)와 그의 비 순원왕후(純元王后·1789∼1857) 김씨를 합장한 능이다. 조선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무덤인 헌릉(獻陵)과 같은 산에 있어서 흔히 '헌인릉'으로 부르는 곳이다. 이곳은 강남땅이긴 하지만 고층빌딩도 보이지 않고 번잡하지도 않아서 고즈넉한 분위기마저 감돈다.
#온나라의 축복 속에 태어난 순조
정조(正祖·1752~1800)의 둘째 아들로 태어난 순조는 친할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긴 이후에 태어났기에 아버지 정조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양주 배봉산의 사도세자 무덤은 원래 자리가 좋지 않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곳인데 이를 옛수원부 뒷산인 화산(지금의 융릉)으로 옮기고 난 이듬해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라는 것이다. 사도세자의 무덤과 옛수원을 새수원(수원시 팔달산 근처)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돈도 많이 들었거니와 신하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런데 세자(순조)가 태어남으로써 논쟁이 일단락된 것이다. 순조가 태어나기 전까지 대를 이을 세자가 없어 전전긍긍하던 조정에서는 경사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때 당시 정조의 나이는 38세였고, 문효세자(1782~1786)는 5세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뜬 상태였다.
아마도 당시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고 했던 융릉의 기운이 왕실의 후손 순조를 점지한 것 아닐까?
아버지인 정조를 닮아서 그랬는지 순조는 어릴 때부터 근검절약을 생활화했고, 바른 자세로 앉거나 누웠으며, 꼭 필요한 말만 하는 등 절제된 생활을 일삼았다.

그러나 단 하나 닮지말아야 할 것도 닮았으니 11세에 부친을 잃은 것이다. 사도세자의 엽기적인 죽음을 목격한 정조에 비하면 덜하다고 하겠지만 어린 나이에 부친을 잃고 왕위에 올라야 하는 부담감은 순조가 행동을 더욱 조심하게 한 원인이 됐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사후에 더욱 조심스런 행동을 한 것처럼 말이다. 또한 정조와 순조는 40대에 세상을 버리는 것도 같았다. 그나마 아버지 정조는 49세까지 살았지만 순조는 1834년 11월 13일 45세의 나이로 경희궁 회상전에서 숨을 거둔다.
순조의 무덤은 1835년(헌종 1) 경기도 파주에 있는 인조 무덤 장릉(長陵) 왼쪽 산줄기에 자리잡았다가 풍수가 좋지 않다 해서 1856년(철종 7) 10월 11일 현 위치로 옮겨졌다.순조의 정비 순원왕후는 1857년 8월 4일
창덕궁 양심각에서 숨져 그해 12월 17일 순조와 합장됐다.
# 여인천하의 왕실, 끊임없는 재난의 연속
순조가 왕위에 올랐을 때 왕실은 그야말로 '여인천하'였다. 증조할머니 격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할머니인 사도세자의 부인 혜경궁 홍씨, 친어머니 수빈 박씨와 어머니 격인 정조의 왕비 효의왕후, 또 장차 맞이할 왕비까지 4대 다섯 여인들이 순조를 에워싼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정순왕후(貞純王后· 1745~1805) 는 나이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하면서 천주교 박해를 빌미로 정적들을 숙청한다(신유사옥·1801). 이때 다산 정약용의 형제들과 이가환 등이 화를 입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영조와 정조대의 문예부흥기는 결과적으로 커다란 그늘 속에 순조를 가두는 꼴이 됐다. 순조의 아버지 정조는 왕으로서나 학자로서 전혀 모자람이 없는 군주였다. 아버지가 훌륭할수록 아들은 작아지게 마련 아닌가. 순조가 아버지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또 하나의 이유는 왕으로서의 박복(薄福)이다. 순조 재위 당시 가뭄과 홍수가 끊이지 않고 지속됐으며, 궁궐에 화재가 난 것도 여러 번, 도적은 들끓고 돌림병이 창궐했다. 서북인의 차별대우로 인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것도 순조대의 일이며 이는 단순한 농민 반란이 아니라 정치적 반란이었으므로 순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한편 순조는 1809년에 얻은 세자(추존 익종)에게 기대를 걸고 대리청정을 시키는 등 왕으로서의 자질을 키워주려 했으나 1830년, 자신보다 4년 앞서 자식을 보내는 비운을 겪는다. 그 세자의 아들이 순조 이후 왕이 되는 헌종이고 헌종도 후사가 없어 철종에게 왕위가 돌아갔으며, 그다음 왕위는 고종과 순종에게 이어지며
조선의 역사가 막을 내리게 된다. 이 무슨 국가의 박복이런가. 인릉에 나란히 누워있는 순조와 순원왕후는
자신들의 박복이 미친 조선의 종말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신록이 움트는 5월의 인릉
신록이 연두색으로 뿜어내는 5월 첫날, 참나무들과 소나무는 한껏 새순을 밀어낸다. 다정히 손잡고 거니는 노부부, 아이 하나는 업고 하나는 손을 잡고 온 주부, 직장 동료로 보이는 몇몇이 담소를 나누는 모습. 그리고 산책하는 연인들까지 봄을 만끽하려는 표정이 밝기만하다. 인릉 관리인의 말로는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오르고 난 뒤 일본인 등 외국인들의 숫자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게다가 헌인릉은 세종의 부모가 잠든 헌릉과 정조의 아들인 순조가 잠든 인릉이어서 더욱 많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드라마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인릉은 정자각이며 비각, 봉분 등 어느 곳 하나 흐트러진 모습이 없을 정도로 정돈이 잘 돼 있다. 비록 능역 안에는 들어갈 수 없지만 바로 옆까지 관람객들이 올라가 살펴볼 수 있도록 나무 계단을 설치하고, 관람하기 좋게 마루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인릉에 오른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능의 서쪽에 자리 잡은 건물들에 눈총을 주며 수군거린다. 뭐하는 건물이냐고 묻는 사람의 말에 한 관람객이 '무시무시한 국가기관'이라고 알은 체를 한다. 또 어떤 이는 그 건물이 능과 너무 가깝게 지어진 것이 아니냐고 볼멘소리도 한다. 그러나 대개는 이 역시 오늘날 우리의 모습 아니냐고 자조하면서 탄식들을 쏟아낸다.
사진 / 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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