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황제'를 기억하라
사람들은 대부분 조선시대에는 왕만 존재했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비록 추존된 황제이지만 조선시대에도 엄연히 '황제(皇帝)'가 있었다. 조선의 제26대 왕인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에 등극하고 그 뒤를 이은 순종 역시 황제에 올라 조선 태조를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에 추존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생전에 왕위는 오르지 못하였지만 사후 왕으로 추존된 진종(영조의 첫번째 왕자), 장조(영조의 두 번째 왕자), 문조(순조의 왕자)를 각각 진종소황제, 장조의황제, 문조익황제로 추존했으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각각 정조선황제, 순조숙황제, 헌종성황제, 철종장황제로 추존했던 것이다. 태조는 조선의 개창조(開創祖)였기에 황제로 추존된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고종과 순종의 세계(世系)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어 추존됐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총 8명의 황제가 있으니, 이들이 묻힌 능을 왕릉으로 호칭해서는 안되고 마땅히 '황릉(皇陵)'이라고 불러야 한다. 따라서 요즘들어 흔히 쓰고 있는 '세계문화유산 조선시대 왕릉'이란 표현도 '조선시대 황릉과 왕릉'이라고 고쳐 부르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인 것이다. 또한 고종과 순종은 보다 엄밀히 얘기하면 조선의 법통을 계승해 선포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제들이지 조선의 황제는 아닌 것이다.
고종(1852∼1919)은 조선의 제26대왕이다. 1852년 서울 정선방(貞善坊)에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흥선대원군의 노력으로 천신만고 끝에 1863년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후 1866년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바로 그가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다. 고종의 즉위초 국왕은 어렸으므로 흥선대원군이 국정을 총괄했다. 조선시대 역사상 살아있는 임금의 생부(生父)는 흥선대원군이 처음이었다. 그전에 있었던 덕흥대원군(선조의 생부)과 전계대원군(철종의 생부)은 모두 사후에 추증(追贈)된 대원군이었다. 그러니 흥선대원군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하지만 고종이 장성해 친정(親政)의 의지를 보이면서 차차 흥선대원군과 대립하게 됐고, 이 뜻을 헤아린 민비(閔妃)와 노대신들이 유림을 앞세워 결국 대원군은 실각하고 말았다.
#혼란했던 역사의 소용돌이
고종은 대원군의 척사양이정책(斥邪壤夷政策)과 달리, 정계 일부에서 주장하던 대외 개방의 움직임과 일본의 국교 요청을 받아들여 1876년 일본과 수호조약을 맺어 새로운 국교 관계를 가지게 됐다. 이후 구미 열강과도 차례로 수교했다. 그리고 일련의 개화 시책을 추진해 관제와 군제를 개혁하는 한편, 일본에 신사유람단과 수신사를 계속 파견했다.
당시 정계는 개화와 수구의 정견을 달리하는 두 파의 대립이 점차 날카롭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그 결과 변법(變法)에 의한 근대국가 건설을 추진하는 개화당과 기존 구체제의 유지를 고집하는 수구세력간의 알력으로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갑신정변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청군과 일본군이 조선에 진주하니 자주권에 큰 손상을 입게 된다. 임오군란 이후에는 친청화(親淸化) 정책을 펴다가 급격한 동북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안으로는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는 등 큰 혼란을 겪는다.
1894년 갑오경장을 실시해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중심으로 개혁을 적극 추진했으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노골적인 침략적 간섭이 시작되자 친일세력을 물리치고자 친러 성향의 정객(政客)을 통해 1896년 2월 돌연 러시아공사관으로 이어(移御)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했다. 그리고 다음해 환궁하고 10월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의 수립을 선포하고 황제위에 올라 연호를 광무(光武)라 칭했다.
그러나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군사적 압력하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와 한일협약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러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마침내 을사조약의 체결을 강요했다. 고종은 이에 반대했으나 을사오적의 친일대신들에 의해 조약이 체결됐다. 그는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고 조선 국정에 전반적으로 간여하고 외교권을 박탈하자 1907년 헤이그밀사를 파견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수포로 돌아가고 이완용(李完用)과 송병준(宋秉畯) 등 일제에 아부하는 친일 매국대신들과 군사력을 동반한 일제의 강요로 한일협약 위배라는 책임을 지고 7월 20일 퇴위한다. 고종은 1910년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자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19년 한많은 삶을 마감했다.
#일제에 의해 왜곡된 우리 역사 다시 바로잡아야
홍릉은 명나라 태조의 효릉(孝陵)을 본받아 만들어졌다고 전하며 이전의 왕릉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홍살문을 지나면 좌우에 설치된 각종 석물을 지나서 침전(寢殿)으로 향하게 돼 있으며 침전 뒤의 구릉에 봉분이 조성돼 있다. 침전은 황릉에 건축하는 것으로 왕릉은 정자각을 세운다. 그리고 석물은 봉분 앞쪽에 두지 않고 침전 앞에 도열했는데 말, 낙타, 해태, 사자, 코끼리, 기린, 무인석, 문인석의 순서이다. 이러한 배치 순서는 기존의 왕릉과 크게 달라 참배객들로 하여금 이색적인 느낌이 들게 한다. 동물 조각상들은 지대석 위에 중대석을 놓고 그 위의 대좌에 안치한 형태이다. 이중 말상은 다른 상들에 비해 키가 작아 보이는 특징이 있다. 한편 봉분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각종 문양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홍릉을 배관한 후 홍살문을 나서며 파란만장했던 고종 황제의 삶을 되돌아본다. 일반적으로 고종 황제는 매우 무능력했던 군주로 알려져 있지만, 최근의 학계 연구 결과에 의하면 고종 황제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다방면으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이 밝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뇌리에는 왜 고종이 무능한 군주로만 깊게 박혀 있을까? 그것은 일제의 악랄한 조작에 의한 것이다. 그래야만 그들의 침략이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제는 고종 황제 뿐만 아니라 조선의 역사도 무능으로 점철되었다고 왜곡했다. 그래서 일제의 논리를 따른 식민사학자들과 그들의 제자로부터 교육받은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조선과 고종 황제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과학적인 방법으로 창제한 한글은 세계사에 내 놓아도 손색없는 우리 고유의 문자이다. 그리고 세계 최초라고 알려져 있는 '신기전' 로케트와 이순신의 철갑선인 '거북선'은 조선이 만들어낸 과학 발명품이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의 왕릉과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가 있다. 이외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조선은 찬란한 문화를 이뤄냈던 자랑스런 나라였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불식하고 우리 민족사에 빛나는 나라중의 하나였음을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다.
사진 / 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