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릉 전경. 사릉은 대군부인의 예로 장사 지낸뒤 후에 왕후의 능으로 추봉되었기 때문에 다른 능에 비해 조촐하게 꾸며져 있다.

[경인일보=글/이창환 상지영서대학 조경과 교수]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위치한 사릉(思陵)은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1440~1521) 송씨가 홀로 잠들어있는 곳이다. 이곳의 규모는 비록 아담하지만 능원을 둘러싼 솔밭이 아름다워 사진작가들의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다. 사릉에는 문화재청이 관할하는 궁과 능에 필요한 나무를 기르는 양묘사업소 묘포장이 있다. 조선 왕릉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 묘포장에 있는 종자은행과 소나무 등 각종 유전자원들이 궁궐과 능원의 생태문화자원 보존에 의미가 있다해서 높은 평가를 받은 바 있다. 특히 이곳의 어린 소나무 묘목들은 강원도 삼척의 태백산맥 능선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소인 준경묘와 영경묘의 낙락장송(落落長松) 후손들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의 소나무는 숭례문 복원에 사용될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인 소나무로 평가받고 있다. 1999년에는 여기에서 재배된 묘목을 단종의 무덤인 영월의 장릉에 옮겨 심어 단종과 정순왕후가 그간의 아쉬움을 풀고 애틋한 정을 나누도록 했는데 이때 쓰인 소나무를 '정령송(精靈松)'이라 부른다.

▲ 사릉 묘포장. 사릉 구역내에는 다른 능원에 필요한 나무들을 길러내는 묘포장이 있다.

# 4년간의 짧았던 결혼생활, 남편과의 생이별

정순왕후는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했고 영돈녕부사로 추증된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로 1440년(세종 22년) 태어났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히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해서 간택, 1454년 음력 1월 22일에 열 다섯의 나이로 한살 연하였던 단종과 혼인해 왕비에 책봉됐다. 사실 단종이 즉위한 지 만 1년이 되는 날 수양대군(세조)과 양녕대군은 자신들의 생각대로 왕비를 고른 후에 단종에게 거의 반 강제로 왕비를 맞이할 것을 청한 것이다. 이미 실권은 수양대군이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단종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혼한 이듬해인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일임하고 상왕이 되자 정순왕후는 왕대비가 돼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라는 존호를 받았다. 그러나 1457년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死六臣)이 추진하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상왕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돼 영월로 유배되고, 정순왕후는 군부인이 돼서 궁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때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는 귀양가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으로 전해지는데, 결국 두 사람은 이후 이승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 단종이 끝내 유배지인 영월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4년간의 짧고 애틋한 결혼생활을 한 두 사람 사이에는 후손도 없었다.

▲ 영조 어필인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 비석.

# 60여년간 남편을 기다린 정순왕후

단종이 한양에서 300리 떨어진 영월로 유배를 떠나게 되고 남편과 생이별을 한 정순왕후는 동대문 밖의 초가집인 '정업원(淨業院·지금의 청룡사)'에 살면서 평생 단종을 그리워하며 지냈다. 원래 정업원은 부군을 잃은 후궁들이 출궁해 여생을 보냈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정순왕후는 시녀들이 구해 오는 양식으로 생계를 잇다 후에 염색일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중간중간 왕비의 형편이 어렵다는 소식을 들은 동네 아낙네들은 감시병 몰래 금남(禁男)의 채소시장을 열어 정순왕후를 돌보기도 했다.

부군의 죽음을 전해 들은 송씨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큰 바위에 올라 영월을 향해 통곡을 하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후일, 영조가 이곳을 '동망봉(東望峰)'이라 칭하고 비석을 내렸으나 일제시대에 이 일대가 채석장으로 사용되는 바람에 현재는 그 흔적이 남아있지 않고, 바위 또한 모두 떨어져 나가 흉물스런 절벽으로만 남아 있다. 동망봉은 현재 서울 동대문구 숭인동 숭인공원내에 있다. 최근에는 주민들이 이곳에서 해돋이와 달맞이 행사를 한다.

▲ 사릉능원 근경.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생략한 채 봉분만 있으며 석양과 석호도 각각 한쌍씩만 설치돼 있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사사된 후 64년동안 그를 기리다 1521년(중종) 6월 4일 82세로 생을 마감했다. 자신을 왕비로 간택했다 결국엔 폐비로 만들고, 남편에게 사약을 내린 시숙부 세조보다는 53년을 더 살았다. 또 세조의 후손이며 시사촌인 덕종과 예종, 시조카 성종, 시손 연산군의 죽음까지 지켜보고 그는 한많은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 사가(私家)의 무덤곁에 마련된 조촐한 왕비의 능

조선시대 모든 능역에는 사가(私家)의 무덤을 두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사릉에는 사가의 무덤이 몇기 남아 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중종은 정순왕후가 승하하자 단종때부터 7대의 왕대를 거친 그를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했다. 돌아갈 당시 왕후의 신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국장을 치르고 능을 조성할 처지가 못됐던 것이다. 결국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가 출가한 해주정씨 집안에서 장례를 주도했고, 해주정씨 가족묘역안에 정순왕후를 안장하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숙종 24년(1698)에는 단종과 정순왕후를 추숭해 종묘 영년전에 들이고 능의 이름을 사릉(思陵)이라고 했다. 이때 정순왕후를 추숭하면서 '어그러짐이 없음과 화합하라'는 의미에서 시호를 '정순(定順)'이라 하고, 평생 단종을 생각하며 일생을 보냈다 해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고 지었다.


사릉은 대군부인의 예로 조성된 뒤 왕후릉으로 추봉된 것이어서 다른 능에 비해 훨씬 단출한 편이다. 능침 규모가 작고 능침의 3면을 곡장이 둘러싸고 있으나 병풍석과 난간석은 설치돼 있지 않다. 무덤 앞에는 문인석과 석마가 놓여있으며, 석양과 석호는 한 쌍씩으로 간소화했다. 석물들의 크기도 다른 능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작다. 능원의 좌향은 북북동에서 남남서 방향을 바라보는 계좌정향(癸坐丁向) 형태다. 장명등은 숙종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장릉(단종)에 있는 장명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최초의 사각 장명등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사릉의 정자각은 맞배지붕으로 배위청이 짧아서 전체 건물의 모습이 정(丁)자형보다는 정사각형의 느낌을 준다. 정자각 왼편 뒤에 있는 예감은 원래 뚜껑이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데, 현재는 돌로 돼있으며 겉에 조각이 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 사릉예감.

한편 이곳 사릉은 도성으로부터 100리 안에 조성돼 다행스럽게도 왕실에서 친히 제향을 받들 수 있었다. 반면 영월의 단종 장릉은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조영된 능원이라 왕의 친행이나 조정(삼정승 또는 관찰사)에서 제례를 지내기가 어려워 영월의 현감이 대행케 했다. 지금도 단종제의 초헌관은 영월군수가 한다. 이후 단종제는 영월 최대의 축제로 자리 잡았다. 후손들이 지내는 제사를 통해 단종과 정순왕후가 이승에서의 한을 풀고 하늘나라에서라도 행복하게 해후하길 바란다.

사진 / 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