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박상일기자]"차가 많이 다니는 위험한 큰길로 걸어서 통학하는 국민학교 아동 30여명을 매일 아침저녁 친절하게 태워다주는 고마운 운전사아저씨와 차장이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 의정부와 송추간을 운행하는 경향여객 71번 버스(운전사=장점출·57)는 사대리에서 송추국민학교까지 5리 길을 아동들을 보면 손을 들지 않아도 차를 세워서 태워다주곤 한다는 것…(중략)… 이 갸륵한 운전사와 차장(유연옥·22)을 표창하여 이 정신을 찬양하고 모든 운전사와 차장들의 본을 삼았으면 좋겠다고…." (1966년 2월 22일자 2면)

당시 농촌의 어린이들은 학교까지 몇㎞나 되는 길을 대부분 걸어서 다녔다. 초등학생들이 '책보'를 메고 흙먼지 풀풀 날리는 먼길을 매일 걸어서 통학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라도 내리거나 더위·추위가 극성을 부리면 학교 가는 일이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당시 시골길을 오가는 버스운전사들은 이런 아이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신문에는 가끔씩 이들의 이야기가 미담으로 실렸다.


몇달 후인 1966년 9월 11일자에는 안양에서 서울을 오가는 경남여객 버스기사들이 매일 100여명의 아이들을 무료로 태워준다는 미담기사가 소개되기도 했다.

1960년대 신문기사에는 옛날 이야기 속에서나 듣던 '삭발 봉양'이 실제로 등장하기도 했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시아버지의 회갑상을 차려준 효부의 이야기는 당시 독자들의 가슴을 울렸다.

"자신의 머리칼을 잘라 판 돈으로 시아버지의 회갑잔치를 치른 효부가 있다. 양주군 동두천읍 생연1리 『방죽골』 김신규(40·노동)씨의 처 남궁복순(37) 여인은 수양시아버지 박태봉(61) 노인의 회갑잔치를 앞두고 한숨과 눈물로 맞이하게될 아버지를 위해 지극한 효성으로 37년간 고히 길러온 머리칼을 가족 몰래 400원에 팔아 쇠고기 반근과 쌀과 술 한병을 사들고와 쌀밥을 공양하고… 회갑날인 25일 이웃 노인들을 초대하여 간소한 회갑잔치를 치루었는데, 이 사실을 안 초대받은 노인들과 가족들은 목이 메여 음식을 먹지도 못한 채 한때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한다…."(1966년 5월 29일자)


따뜻한 마음은 어른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코흘리개 어린 학생들도 자신이 모은 것을 선뜻 좋은 일에 써달라고 내놓는 일이 많았다. 어린이들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들은 어른들의 큰 선행보다 더 환한 웃음을 던져 주었다.

"국민학교 1학년 어린이가 입학때부터 저금한 돈을 몽땅 털어 육지 한 번 구경 못해본 섬 어린이들에게 학용품이라도 사 보내달라고 본사 부평분실에 기탁, 얼어붙은 세모의 날씨를 훈훈하게 했다. 26일 부평서국민학교 제1학년4반 김성희(7) 어린이는 입학할때부터 푼돈을 저축, 5백6십2원을 본보 부평분실에 가져와 도서 어린이들에게 학용품을 사서 보내주라고 말하며 기탁했다.…"(1966년 12월 27일자)

김성희 어린이가 낙도 어린이들에게 학용품을 보내달라고 성금을 기탁한 것은 당시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지역의 생활이 더욱 궁핍했음을 엿보게 한다. 그래서 당시에는 섬 지역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이뤄진 꾸준한 봉사활동을 다룬 기사도 종종 지면에 등장했다.


"육지에서 수십마일 떨어진 외딴 섬에서 공무에 열중하면서 여가를 이용하여 어린이들을 돕는 공복이 있어 주위의 인정을 흐뭇하게 하고 있다. 인천경찰서 축현파출소 소속으로 덕적면 율도리 초소에 근무하고 있는 이효열(30·인천시 남구 용현동 547) 순경은 섬 어린이들이 이발소는 물론 이발기구가 없어 가위로 이발을 하는 실정을 보고 이발기구를 구입, 어린이들에게 여가를 이용 이발을 해주고 있다. 그런데 덕적면에서도 멀리 떨어진 율도리에는 33호에 2백30명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유일한 교통수단인 정기여객선으로는 행정선이 덕적도에서 1주에 한번 정도 왕래하는 실정이다.…"(1970년 8월 21일자)

이처럼 1960~1970년대에는 어려운 이들을 돕는 따뜻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주변에는 도움을 주는 사람들 보다는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더 많았다. 때로는 이런 안타까운 사연들이 신문에 소개돼 도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일류 중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은 됐으나 입학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울고 있는 모성애가 있다. 이 슬픔의 주인공은 시내 숭의동 1114번지서 단간셋방살이를 하고있는 이경수(44)씨의 둘째 아들인 수영(13)군과 그의 어머니 조(40)여인이다. 이군은 올해 송림국민학교를 재학하고 있으면서 인천중학교에 합격의 영광을 얻었으나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이군의 가정에서 입학금을 마련하기는 상상도 못할 일. 이런 딱한 사정을 안 인천중학에서는 지난 16일에 마감한 입학금 납부기한을 이군에게만은 27일까지로 연기를 해주었으나 별다른 도리없이 어린 동심은 하루하루 날짜를 안타깝게 보내고 있는 것이다.…이군의 어머니는 자식의 얼굴을 쳐다보며 한없이 울먹인다."(1966년 12월 22일자)


이같은 이 군의 안타까운 사연은 당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특히 김해두 인천시장이 직접 이군을 돕겠다고 나서면서 이군은 생각지도 않던 큰 도움을 받게 된다.

"자식을 위한 엄마의 간절한 안타까움이 결실. 이제 수영군도 남부럽지 않게 합격한 인천중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입학금 마련의 길이 막혀 허락된 입학마저 포기해야 되는 학생·학부형이 어찌 수영군과 그의 어머니 조여인 뿐이겠느냐만은… 수영군에 관한 기사를 읽던 김해두 시장은 그대로는 보아넘길 수 없었다.… 김시장은 망설임 없이 이군을 돕기로 하고 이군을 위해 입학금을 비롯해 교복 및 책값 그리고 1년간의 학비 일체를 부담하겠다고 말했다."(1966년 12월 23일자)

1960년대 중반께 인천신문(현 경인일보)에는 유난히 미담 기사가 많이 실렸다. 장애인 친구를 위해 5년동안 같은 반에서 공부하며 책가방을 날라주고 손발이 되어준 인성여고 3학년 여학생의 이야기, 열네명의 고아들을 양자로 들여 이들을 키우고 대학까지 보낸 미군 군무원 이야기, 푼푼이 모은 저축을 털어 월남전 참전 장병들에게 손수건을 만들어 보낸 인일여고 2학년 여학생 이야기 등등 한달이면 몇차례씩 따뜻한 온정이 담긴 이야기들이 지면에 소개됐고 독자들은 이들에게 감동하고 좋은 일에 동참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같은 분위기는 1970년 수원에서 좋은 결실을 맺기에 이른다. 아픈 사람이 많던 그때, 부족한 의료시설과 비싼 병원비로 인해 병원의 문턱을 넘기가 어렵던 그때, 환자들을 위해 꾸준히 '사랑의 인술'을 펼쳐오던 수원기독병원이 경기연합일보(현 경인일보·인천신문에서 제호 변경)와 손을 잡고 병원내에 '자선병실'을 개원한 것이다.


"8월 15일로써 창간 10주년을 맞는 「경기연합일보」는 그 기념사업으로 수원기독병원과의 협정아래 경기도민을 위한 자선병실을 개설하기로 했습니다. 이 사업은 우리나라에서 전례없었던 파격적인 것으로 사회봉사를 의식하는 두 기관의 합의에 따라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제 우리를 도와준 모든 사회와 지역주민에게 보은할 것을 각오하고 연간 최소 200만원 최고추정액 500만원이 소요되는 자선병실을 2년동안에 걸쳐 개설하여 「돈이 없어 목숨을 잃게된 동족」을 구하기로 했습니다.…"(1970년 8월 15일자 사고)

사회의 따뜻한 이야기를 찾아내 보도하는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미담의 주인공으로 나서기도 한 경인일보의 정신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진다. 70년대에만 '리어카 모으기 운동'(1972년 3월), 수재민 돕기, '길거리 휴지통 기탁운동'(1973년 3월), '장한 아내상' 신설(1974년 6월), '시설아동 후원자 맺어주기'(1975년 3월) 등이 펼쳐졌고, 이후로도 '안성 배 팔아주기 운동'과 '수해농가 가축보내기 운동'(1990년), '우리고장 쌀 팔아주기'(2001년 10월), '우즈베키스탄 의료봉사단 파견' 및 '우즈벡 어린이 무료 심장수술'(2004년) 등으로 따뜻한 마음 지키기에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