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이자 미학자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중심 인물이었던 아도르노는 상기한 쇤베르크의 유명한 논제를 들며 음악은 아름다움을 표현하기보다는 '진실'을 일깨워 주는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청중의 귀에 달콤하게 들리는 선율은 자체의 비판력을 상실한 장식품에 지나지 않지만 불협화음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며, 유희·순응적 태도를 부정함으로써 '진실'에 다가서게 한다는 것이다.
1900년을 전후해서 오스트리아 빈에는 쇤베르크와 베르크, 베베른을 중심으로 한 제2 빈 악파와 '비엔나 왈츠'가 공존하고 있었다. 19세기 새로운 음악소비 계층인 유산계급이 나타나면서 현대와 마찬가지로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려는 작곡가와 자신의 음악세계를 추구해 나간 작곡가로 나뉘는 현상이 나타난 것. 왈츠와 희가극(喜歌劇)인 오페레타를 작곡하는 음악가들과 달리 쇤베르크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해해 주는 작업을 해 나갔다. 쇤베르크는 상투적인 조성음악의 어법으로 만들어진 값싼 상품(음악)을 거부하며, 조성에 의존하지 않고 음악을 구축할 수 있는 원리를 찾았다. 조성의 준거로 인해 사용할 수 없었던 선율과 화성이 쇤베르크에 의해 작품의 전면에 나서는 것이다.
하지만 (따르든 이탈하든)조성이라는 대상이 없어지니 작곡가 스스로 한 음 한 음을 결정해야 했다. 쇤베르크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되며, 결국 '12음기법'을 낳는다. '12음기법'은 열두 개의 반음으로 하나의 음열을 만들고 이를 근거로 작곡하는 기법이다. 이 기법은 조성과 무관할 수 있으며, 악곡을 통일시키는 선율적 근거도 얻을 수 있었다. 쇤베르크의 음악적 표현은 이전 시기 작곡가들이 즐겨 택했던 사랑과 기쁨, 슬픔이 아니었다. '달에 홀린 피에로, Op 21'에서 보듯 불안, 긴장, 두려움, 내적 갈등, 충동 등이었다. 쇤베르크의 무조음악은 비록 청중과 괴리되지만, 진실을 보여주는 예술 본연의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쇤베르크의 고민과는 일정한 부분 떨어져 있었지만 비슷한 시기 러시아엔 스트라빈스키가, 헝가리에선 바르토크가 활동했다. 스트라빈스키의 대표작인 발레음악들에선 무조성의 경향이 뚜렷하지 않다. 그는 다채로운 화성과 다양한 음계는 물론 러시아의 민속가락을 쓰는 등 닥치는 대로 사용했다. 스트라빈스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강렬한 리듬은 춤추기에 적합했다. '봄의 제전'에서 볼 수 있듯이 스트라빈스키는 율동의 이미지를 잘 그린 작곡가였다. 민속음악의 색채를 강하게 띤 바르토크의 경우 고유한 어법으
다음 글에선 세계대전 후의 작곡가들이 모색한 '음악의 길들'을 걸어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