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초대 국모의 능이라 할 수 있는 정릉은 다른 왕비의 능에 비해 상설의 규모가 작고 초라하다. 4각 장명등, 고석, 상석 등만이 원래의 것으로 추정되고, 나머지는 현종때의 작품으로 정릉의 수난과 복원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준다.

[경인일보=글/정종수 국립고궁박물관장]서울 성북구 정릉 삼거리에서 아리랑고개로 올라가는 도로를 따라 50m정도 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돌아드는 비좁은 골목길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산으로 올라가면 골목 끝에 매표소가 나오고 매표소를 지나 좀더 올라가면 조선 태조의 후비인 신덕왕후 강씨를 안장한 정릉(貞陵)이 나온다. 그런데 원래 정릉의 자리는 이곳이 아니다. 그동안 신덕왕후의 정릉은 막연하게 서울 한복판인 지금의 문화체육관 인근 또는 영국 대사관과 성공회 자리 부근으로 추정돼왔다. 그러나 신덕왕후의 능 석물로 보이는 문인석이 서울 중구 정동 소재 주한 미국대사관저 영내 하비브 하우스(Habib House)에서 발견되면서 정릉의 최초 위치는 미 대사관저 뒤편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취현방(聚賢坊)'이라 불렀다.

#조선 최초의 왕릉이 된 정릉

조선왕조 오백년 동안 가장 억울하고도 원통했던 왕비를 들라 하면 태조의 계비 '신덕 왕후'와 문종비 '현덕 왕후'를 꼽을 수 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아 자신의 능이 파헤쳐지는 수모를 겪었다. 그도 부족해서 자식들마저 반역으로 몰려 죽임을 당한 비운의 왕비들이었다.

▲ 정릉의 장명등. 고려 공민왕릉의 장명등과 모습이 같다.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1396) 강씨는 상산부원군에 추증된 강윤성의 딸로 태어났다. 친가는 고려의 권문세가로서 이성계의 권력 형성과 조선을 건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전해진다. 고려시대에는 고향에서 결혼한 부인인 향처(鄕妻)와 서울에서 얻는 새 부인인 경처(京妻)를 두는 것이 풍습이었다. 신덕왕후는 태조의 경처였는데, 향처인 신의왕후(神懿王后)는 태조가 즉위하기 전인 1391년 세상을 떠났으므로 조선이 개국된 1392년 신덕왕후가 조선 최초의 왕비로 책봉됐고, 그의 무덤인 정릉은 조선 최초의 왕릉이 됐다.

신덕왕후는 태조와의 사이에 방번, 방석 두 아들과 경순공주를 두었으며, 태조는 그녀를 극진히 사랑했다. 태조(이성계)와 신덕왕후가 처음 만나 사랑을 싹틔우게 된 계기에 대한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전의 어느 날, 말을 달리며 사냥을 하다가 목이 매우 말라 우물을 찾았다. 마침 우물가에 있던 아리따운 그 고을의 처자에게 물을 청했는데, 그녀는 바가지에 물을 뜨더니 버들잎 한 움큼을 띄워 이성계에게 건네주었다. 이성계가 버들잎을 띄운 이유를 묻자 뒷날의 신덕왕후가 된 그 처녀는 "갈증이 심해 급히 물을 마시다 체하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그리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대답을 들은 이성계는 그녀의 갸륵한 마음 씀씀이에 반해 부인으로 맞아들이게 된 것이다.

 
 
▲ 정자각 위로 올려다보이는 정릉 근경.

#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국모의 능

신덕왕후는 1396년(태조 5) 8월 13일 판내시부사 이득분의 집에서 병환으로 승하한다. 사랑하던 신덕왕후를 잃은 태조는 도성 안인 현 덕수궁 뒤편에 능역을 조성하고 그의 봉분 우측에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마련해 능호를 '정릉(貞陵)'으로 정한다. 그러나 원래 잘 조성된 정릉은 태종(이방원)이 즉위하면서부터 푸대접을 받게 된다. 태종은 태조가 승하한 다음해인 1409년 2월 23일 정릉을 도성 밖 양주 사을한록(沙乙閑麓·현 서울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긴다. 그는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주택지로 정해 세도가들이 정릉 숲의 나무를 베어 저택을 짓는 것을 허락하고, 청계천 광통교(현재의 광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태종은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데 쓰게 하도록 했으며, "석인(石人)은 묻고, 봉분은 깎아버려 무덤의 흔적도 남기지 말라"는 명을 내려, 능은 완전히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됐다.

결국 우리가 보고 있는 정릉은 신덕왕후가 죽은지 260여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 현종에 의해 복원되면서 현재와 같이 재조성된 것이다. 그렇다면 태종의 이런 행동은 어디서부터 기인한 것일까? 원래 태조는 강씨 소생인 막내 방석을 특별히 사랑했다. 태조는 신덕왕후 강씨의 공을 거론하면서 그의 소생을 세자로 세우기 위해 배극렴과 조준, 정도전 등을 내전으로 불러 세자 책봉 문제를 의논했다. 그런데 배극렴 등은 자신의 소생을 세자로 봉하려는 신덕왕후의 강력한 의지를 알고, 성격이 광패한 첫째 방번을 제쳐두고 그보다 좀 나은 막내 방석을 세자로 봉하도록 건의한다. 당연히 태조 이후의 왕위는 정종(2대 임금) 아니면 방원에게로 돌아가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어린 이복 동생 방석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것은 왕자들간의 골육상쟁을 예고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 2년 후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데 원망을 품은 방원(태종) 일당은 1·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신덕왕후의 소생인 방번과 방석을 살해하고 신덕왕후는 평민으로 강등시켜 버렸다. 그에 따라 당연히 능도 묘로 격하됐던 것이다.

▲ 서울 성북구 정릉동 산87-16.

#새로 옮겨진 정릉의 이모저모

정릉은 선조때 신덕왕후의 복위가 논의되고, 변계량이 쓴 이장 축문에 '능이 성 동북쪽에 위치했다'는 기록을 통해 겨우 복원의 실마리를 찾게 됐다. 그 후 신덕왕후는 송시열의 상소로 복위되고 1669년(현종 10) 11월 1일, 마침내 그의 신주가 태조와 함께 종묘에 나란히 봉안된다. 이때 능의 재실도 중수되고 조정은 수호군(守護軍) 30호를 두어 능을 관리하도록 했다. 한편 능을 봉하고 제사를 베풀며 신주를 종묘에 안치하던 날 정릉 일대에 소낙비가 쏟아졌는데, 이 비를 백성들은 '세원지우(洗寃之雨)'라 불렀다. '신덕왕후의 원한을 씻어주는 비'라는 뜻이다.

당초 처음 취현방에 능을 조성했을 때는 고려 공민왕처럼 화려한 병풍석과 난간석은 물론 무인석까지 모두 있었을텐데, 지금의 정릉은 다른 왕후의 능에 비해 능 상설의 규모가 작다. 정릉을 빠져나와 북악터널 쪽으로 가는 도로 좌측에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원찰 흥천사(興天寺)가 있다. 정동 자리에 있던 이 원찰은 연산군때 불타 버려 폐허로 방치되다 정조에 의해 현재의 자리로 옮겨 새로 지어졌다. 이 절은 제향때 두부를 공급해 일명 두포사(豆泡寺)로 불리기도 한다.

▲ 정릉 숲길과 산책을 즐기는 방문객들.

대개 조선왕릉의 공간이 직선으로 축을 이루는데 비해 정릉은 자연 지형에 맞춰 조성돼 있다. 현종때 능으로서의 지위를 되찾아 정자각과 홍살문이 세워지고 석물도 복구됐지만, 병풍석과 난간석은 설치되지 않았다. 능에 오르면 봉분과 혼유석, 망주석, 문석, 석마 그리고 봉분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석양과 석호가 한 쌍씩 보이면서 3면의 곡장이 둘러쳐졌다. 그리고 봉분 좌우에 망주석과 중앙에는 사각의 장면등이 세워졌다. 이처럼 단출한 정릉의 상설제도는 뒤에 영월 단종의 장릉을 조성할 때 참고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 최초의 국모가 자신의 아들을 왕자로 만들려는 과욕을 부려 오히려 자식을 죽이는데 일조하고, 본인의 무덤마저 파헤쳐지고 옮겨지는 수모를 겪었으니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진 / 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