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주일만에 끝나버린 왕비생활
단경왕후는 12세때 성종의 차남인 진성대군과 가례를 올렸다. 진성대군은 반정으로 형인 연산군이 폐위되자 19세 나이에 왕으로 옹립됐는데 이때 단경왕후도 왕비가 된다. 그러나 좌의정이었던 친정아버지 신수근은 중종반정에 협조하지 않았고, 박원종 등의 반정세력에 의해 형제들과 함께 희생당한다. 그리고 신수근의 누이이자 단경왕후의 고모가 연산군의 왕비였는데 결국 신수근은 누이와 딸 중 누이를 고른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중종이 왕비의 폐위를 반대했더라도 반정세력의 입장을 꺾지 못할 일이다. 단경왕후를 왕비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가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자신들을 죽일 것 아니겠는가? 결국 반정세력들에 의해 중종이 왕위에 즉위한 후 7일만에 단경왕후는 왕비에서 폐위된다.
단경왕후의 20세는 그렇게 상실의 아픔으로 점철됐고 71세로 죽을 때까지 자식 하나 없이 중종의 사랑이 되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렸을 것이다. 야사에는 중종이 즐겨 타던 말(御馬)을 보냈더니 단경왕후가 왕을 보듯이 쌀죽을 쑤어 먹였다는 등 또 중종이 단경왕후의 집 쪽을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다는 말이 흘러나가 왕후가 궁중에서 즐겨 입었던 분홍 치마를 바위에 펼쳐서 그리움을 달래게 했다는 치마바위 전설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한 여인의 불쌍하고 기구한 생애를 달래고자 지어낸 말일 것이다.
# 중종의 사랑은 계비에게 돌아가고
정작 중종이 사랑했던 여인은 단경왕후가 아니었다는 것이 아래의 사실들로 드러난다. 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1491~1515)가 인종(仁宗)을 낳고 산후병으로 6일만에 죽자 신하들 사이에서는 단경왕후를 복위하자는 건의가 나왔다. 그러나 중종은 이를 물리치며 오히려 건의한 사람들을 유배보냈다. 게다가 장경왕후 곁에 묻히고 싶은 마음을 토로하며 "쌍릉 자리를 마련하라"고까지 했다. 그래서 중종의 능도 처음엔 장경왕후의 희릉(禧陵·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 곁에 조성됐지만,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1501~1565)에 의해 강남구 삼성동으로 천릉돼 선·정릉의 정릉(靖陵)이 된다. 결국 중종에게 단경왕후는 조강지처였지만 옛 여인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1698년 숙종은 단종과 단종의 왕비였던 정순왕후 송씨를 복위하면서 단경왕후의 복위도 꾀했지만 대신들의 의견 차이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나 사당을 짓고 제를 올리는 등 예를 갖췄다. 그러다가 1739년 영조때에 '단경왕후'라는 시호와 '온릉'이라는 능호도 받는다. 실록에는 '예(禮)를 지키고 의(義)를 지키는 것을 단(端)이라 하고,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공경하고 조심하는 것을 경(敬)이라 한다' 고 돼있는데, 아마도 온릉(溫陵)은 지아비인 중종의 따스한 정을 그리워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일 것이다. 온릉은 원래 단경왕후의 친정인 거창 신씨의 묘역이어서 단경왕후가 승하하자 이곳에 묻혔고, 지금도 신씨의 일가 무덤이 여러 개 보인다.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주변 묘들은 조만간 이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 돌을 쌓아 지하에 만든 비밀 도랑
정자각 바로 뒤에서 봉분까지는 둔덕이 약 50m 가량 길게 이어진다. 치마바위 전설이 생각이 날 정도로 긴치마를 두른 것만 같다. 추존한 왕비의 능이라서 단종의 장릉과 정순왕후의 사릉의 예를 따랐으므로 무인석은 없고 석양과 석호도 좌우에 두 마리씩만 배치했다. 그 가운데 석호는 마치 복슬강아지 모양을 닮았는데 호랑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만큼 귀여운 모습이다. 다만 꼬리는 S자 곡선을 그리며 등줄기 가까이 올라갔다. 능 뒤로 돌아가면 산들이 파노라마처럼 앞을 두르는데 왼쪽 끝에는 도봉산의 바위 봉우리가, 오른쪽 끝에는 북한산의 바위들이 멀리 보인다. 그 생애가 서글프지만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한 많은 한 여인의 마음을 헤아리다보니 봉분이며 석물들이 모두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온릉은 처음부터 능으로 조성한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 지하에는 '은구(隱溝·숨은 도랑)'가 보인다. 은구 안을 들여다보니 허리를 숙이면 저쪽 끝까지도 갈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참배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절충안이었을 것이다. 작으나마 물이 흐르는 계곡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아예 무시할 수도 없어서 은구를 가설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은 듯하다.
이장을 추진한다는 거창 신씨의 묘역을 둘러보니 문인석의 표정이 산 사람처럼 맑고 깨끗한데 아래쪽 산비탈에는 누가 그랬는지 '업어가려던' 문인석 한 기가 모로 누워있다. 취재를 마치고 내려와서 한여름처럼 더워진 날씨에 물 한 모금 청하자 관리인은 아주 좋은 암반수라며 얼마든지 마시고 담아서 가져가라고 한다. 한낮의 더위를 가시게 하는 시원함. 이 시원함으로도 씻을 수 없는 단경왕후의 생애를 그대로 두고 돌아서는 발길이 무척 무겁게 느껴졌다.
사진/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