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범은 광복 후 국내에 들어와 첫 지방 나들이 장소로 인천을 잡았다. 사진은 백범이 강화지역을 찾았을 때 모습. /김삼웅 저 '백범 김구 평전'

[경인일보=정진오기자]26일은 민족의 별, 백범 김구 선생의 61주기이다. 한·일 강제병합 100년이 되는 올해는 유난히 백범 김구의 발자취가 깊어 보인다. 경인일보는 백범의 61주기이자, 강제병합 100년이면서, 7월 민선 5기 개막을 앞두고 인천과 백범 김구와의 운명적 인연, 그리고 인천의 외딴 곳에 갇혀 있는 백범 동상이 가야 할 자리는 어디인지, 인천이 백범을 매개로 해 우리 민족사의 살아 있는 교육장이 돼야 한다는 점 등을 짚어 본다. ┃편집자 주

백범 연구자들은 '백범을 진정한 의미의 백범으로 만든 곳은 인천'이라고 입을 모은다. 두 차례나 인천 감옥에서 '지옥'같은 수감생활을 했고, 바로 거기에서 '신문물'에 눈을 떴다. 백범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진한 동포애'를 처음 접한 곳도 바로 인천이다. 이 때문에 백범은 중국에서 환국 후 첫 지방 나들이 코스로 인천을 잡았다.

백범 김구(1876~1949)와 인천과의 인연은 1896년 7월 26일 시작된다. 21세이던 그 해 3월 일제의 밀정 스치다를 처단하고 5월 13일 해주감옥에 수감됐다가 국내에서 가장 힘든 감옥이 있다는 인천으로 압송된 것이다. 옥바라지를 위해 모친 곽낙원 여사도 함께 왔다. 식모살이를 했다. 아들에게 하루 세 끼 사식을 넣어 주는 조건이었다.

불결한 감옥생활 중 장티푸스에 걸려 고생하던 김구는 목을 매 자살을 기도했다. 그러나 용케도 깨어났다. 일제의 '압력'으로 사형을 언도 받았다. 사형수 백범은 여러 가지 신서적을 읽었다. 스치다 처단이 '애기접주'에서 전국적 의혈청년으로 발돋움했다면, 인천감옥에서 접한 신서적은 백범에게 근대적, 공화주의적 안목을 갖게 했다. '동료 죄수'들에게 글도 가르쳤다. '김구'란 이름도 인천에서 얻었다.

사형 직전 고종 황제의 사형 집행 정지령이 내려졌다. 고종이 못 보고 재가한 '사형 안건'을 훑어 보던 입직 승지가 낯선 죄명(국모보수·국모의 원수를 갚음)을 봤고, 다시 품신해 '집행 정지' 어명을 받은 것이다. 마침 몇 시간 전에 서울과 인천의 공공기관 간 전화도 놓였다. 이 전화가 없었다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수도 있었다.

사형집행 소식을 듣고 인천의 객주 수십 명이 '몸값'을 들고 모여들었다. 사형이 취소되자 며칠이나 줄을 서 면회를 했다. 인천 사람들의 도움으로 탈옥에도 성공했다. 1898년 3월 9일이었다.

그 뒤, 1914년 어느 날. 105인 사건으로 17년 형을 받고 서대문 감옥에 수감 중이던 백범은 다시 인천 감옥으로 이감됐다. 혹독한 노역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죄수들과 쇠사슬로 허리를 묶인 채 인천항 축조 공사에 동원됐다. 얼마나 힘에 부치던지 물에 뛰어들어 죽고 싶었다. 하지만 허리를 같이 묶인 담배 훔친 죄수까지 죽게 할 수는 없어 생각을 고쳐 먹었다. 이듬 해 '가석방'으로 출옥했다. 첫 수감 때 탈옥한 사실이 발각됐다면 이 때 출옥은 없었을 것이다.

'백범을 백범답게 하기 위한 인천과의 인연'은 이렇게도 질기게 이어졌다. 1919년 상하이로 망명, 오로지 조국광복만을 위해 신명을 다한 백범은 1945년 11월 70 노구를 이끌고 김포비행장에 내렸다. 비행기에서 27년 만에 다시 본 첫 조국 땅은 바로 인천이었다.

1949년 백범이 흉탄에 간 이듬해, 백범이 그토록 온몸으로 막고자 했던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났다.

백범을 암살한 안두희는 인천에서 숨어 지내다 1996년 피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