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글 /이민식 수원박물관 학예연구사]온 나라가 온통 월드컵 16강 진출로 인해 열광의 도가니이다. 국민 너나 할 것 없이 좋아라하고 맘껏 기뻐하고 있다. 이렇게 자랑스런 업적을 이룬 우리나라 월드컵 대표팀의 전문 훈련 장소가 '파주'에 있다는 것은 웬만한 축구팬이라면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훈련 장소와 매우 가까운 곳에 세계문화유산이자 사적 제203호인 '장릉(長陵)'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은 대개 잘 모른다. 오늘은 월드컵 열기만큼이나 뜨거운 날씨를 무릅쓰고 찾아가 본 장릉에 대해 알아본다.

▲ 장릉 근경. 병풍석과 상석 난간석과 장명등은 영조때 천장을 하면서 새로이 만들어진 것이고, 그밖의 석물은 옛 것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장릉은 17세기와 18세기의 석물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 드라마틱한 삶을 산 왕(王)의 비공개 능

아직 일반인에게 비공개로 돼있는 장릉은 방문하기전 관계 기관에 연락하면 오히려 호젓한 분위기 속에서 답사할 수 있다. 그전에 꼭 한가지 염두에 둘 것은 조선시대 왕릉중 '장릉'이라는 명칭을 가진 능이 3기나 있어 제대로 확인하고 출발해야 한다는 점이다. 먼저 강원도 영월에 있는 제6대 단종의 장릉(莊陵) 그리고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인조의 친부, 원종의 장릉(章陵)이 있다. 마지막으로 오늘 우리가 살펴볼 파주의 장릉을 합해 총 3기인 것이다.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위치한 장릉은 조선 16대 인조(仁祖·1595∼1649)와 그의 원비 인열왕후(仁烈王后·1594~1635) 한씨의 합장릉이다. 인조는 선조(宣祖)의 손자이자 추존왕 원종(元宗)의 아들이다. 그는 두 명의 왕비를 두었는데 첫번째가 인열왕후이고 두 번째는 장렬왕후(莊烈王后·1624~1688)다.

▲ 장릉 병풍석.

인조는 조선의 어느 왕보다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왕이었다. 반정이라는 특별한 과정을 거쳐 즉위한 것도 매우 드라마틱하고 재위 기간에 두 번의 큰 전란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1607년(선조 40) 13세때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지고 곧 이어 군(君)에 진봉(進封)됐는데 1623년 김류, 이귀, 이괄 등 서인이 주도하고 남인이 동조해 일으킨 반정(反正)으로 왕에 추대됐다. 그런데 이듬해 논공 행상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한양을 점령하자 인조는 충청도 공주(公州)로 피난갔다가 난이 평정된후 환도하기도 했다.

# 융릉의 모델로 추정되는 장릉

1635년 12월 인조의 부인 인열왕후가 42세의 나이로 먼저 죽자 파주부(坡州府) 북쪽 20리 거리의 운천리(雲川里)에 안장됐고,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왕비의 봉분 옆에 별도의 봉분을 갖춰 안장됐으나 1731년(영조7) 능에 문제가 생겨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면서 두 무덤은 합쳐지게 된 것이다.

▲ 인조가 삼전도서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며 청에 항복하는 예를 행하는 '삼배구고두례' 장면과 삼전도비(사진 아래).

처음 능을 조성할 때는 건원릉의 석물 제도 기준을 따라 제법 규모를 갖췄으나 영조때 천장을 하면서 합장을 하게 되자 규격이 맞지않은 병풍석 등은 새로 마련했고 일부 석물은 기존의 것으로 그대로 사용했다. 따라서 장릉은 17세기와 18세기의 석물이 공존하는 능이라고 볼 수 있다. 병풍석에 화려한 꽃 문양이 새겨져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정조가 조성한 '융릉(사도세자)'의 병풍석과 너무 흡사했고, 능을 시립하고 있는 무인석도 그러해 융릉을 조성할 때 장릉을 모델로 삼아 조성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봉분을 둘러싼 곡장 3면을 비롯해 상석, 고석, 장명등, 망주석, 문인석, 무인석, 석마 , 석양, 석호 등의 석물이 정성껏 잘 갖춰져 있다. 그리고 봉분 아래에는 정자각을 비롯해 비각과 홍살문이 배치돼 있다. 비각 안에는 1731년 이장할 때 건립한 방부개석(方趺蓋石) 양식의 위풍당당한 능표석이 서 있는데, 그 앞면에 큼지막한 전자(篆字)체로 '조선국 인조대왕 장릉 인열왕후부좌'라고 쓰여 있다.

무더위 속에 왕릉 답사를 끝내고 잠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쉬고 있는데, 일행들의 화젯거리가 처음에는 왕릉과 관계된 것이었다가 어느덧 월드컵 경기로 옮겨가 얘기꽃을 피우게 됐다. 그래서 일행 중 한 사람의 제안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월드컵 국가대표팀의 훈련 장소를 구경하기로 하고 자리를 뜨기로 했다. 우리 선조가 남긴 문화유산이 세계문화유산이 된 만큼 우리의 월드컵대표팀도 이번 대회에서 세계 만방에 그 맹위를 떨치기 바라면서 맑고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능역을 빠져 나왔다.

▲ 장릉 전경.

# 양란과 인조반정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인조는 이렇게 나라가 어수선한 와중에 광해군때 명(明)과 만주에서 새롭게 발흥하는 후금(後金)과의 사이에서 중립정책을 펴오던 것을,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으로 전환했다. 그결과 1627년 후금이 군사 3만여명으로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일으켜 파죽지세로 평산(平山)까지 쳐들어오게 되고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다가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형제의 의를 맺어 물러가게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636년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 후금이 군신(君臣)의 관계를 요구하자 조선은 강력하게 반발했고 청은 10만 대군으로 재침,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켰다. 이때 조선의 백성들은 물론이고 인조 자신도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 항전하면서 모진 고초를 겪었다. 척화파(斥和派)와 주화파(主和派) 간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된 끝에, 인조는 결국 주화파의 뜻에 따라 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현 서울 송파구 삼전동)에서 군신의 예를 맺고,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을 볼모로 하자는 청측의 요구를 수락하고 말았다.

▲ 장릉의 재실.

그런데 1645년 청에서의 오랜 억류 생활을 벗어나 귀국한 소현세자가 돌아온 지 얼마 안돼 죽자,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을 후계자로 정하지 않고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웠다. 이같은 인조의 조치는 훗날 현종과 숙종때 치열하게 전개된 예송(禮訟)의 불씨가 됐다. 다음해에는 소현세자의 빈 강씨를 사사(賜死)했고 3명의 어린 손자도 제주도에 유배보냈다. 이유야 어떻든 병자호란의 후유증으로 인해 인조 자신도 개인적으로 많은 아픔을 겪게 됐던 것이다.

한편 그동안 인조반정에 대해서는 역사가들의 해석이 부정적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같은 배경에는 광해군의 외교 정책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최근에 이뤄진 연구 성과는 이와 달라 인조반정에 대한 우리들의 시각을 다양하게 해준다. 즉 광해군 등극과 함께 집권한 대북(大北) 세력은 당시의 지배 계층이던 사림(士林) 가운데 소수 세력에 불과하고 사상적으로는 조선이 국시(國是)로 천명한 주자학(朱子學)에 얽매이지 않는 비교적 자유로운 학문적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다수 세력인 퇴계 계통의 남인과 율곡 계통의 서인에 대항해 인목대비(仁穆大妃) 유폐라든가 영창대군 살해 등을 강행하고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의 위패를 문묘(文廟)에서 내보내고 자파의 산람학자인 남명 조식을 문묘에 배향하려는 운동을 일으켰다가 정권에서 축출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인조반정을 계기로 남인과 서인은 정권을 확고히 장악하고 사회적 안정을 꾀하면서 주자학 이념의 이론적 토대위에 그들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예치(禮治)의 사회를 구축하려고 했던 것이다. 또 서인과 남인 사이에 일어난 예송(禮訟)은 그간 당파싸움의 전형으로 비판받아 왔지만 이제는 예치의 실현 방법에 대한 정치이념의 차이에서 야기된 차원 높은 학문 논쟁으로 재해석되고 있어, 우리가 그동안 인식해 오던 인조반정의 의미를 되새겨 보게끔 하고 있다.

사진/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