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글/이창환 상지영서대학 조경과 교수]서울시 성북구 석관동에 위치한 의릉(懿陵)은 조선 왕조 제20대 임금인 경종(景宗·1688~1724)과 그의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1705~1730) 어씨의 능으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한 언덕에 앞뒤로 나란히 배치한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 형태의 능이다. 상부의 곡장을 두른 것이 경종의 능침이며 아래 곡장이 없는 것이 선의왕후의 능침이다. 실록에는 의릉이 석관동 천장산(天藏山) 신좌인향(申坐寅向)에 있으며 흥인문(동대문)으로부터 10리 거리에 있다고 전한다. 이곳은 1960년대 초 당시의 중앙정보부가 의릉 경역(境域·경계가 되는 구역) 내에 자리잡았던 탓에 일반인에게는 철저히 봉쇄된 구역이었다. 그 당시 중앙정보부가 관리하며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연못을 만들고 돌다리를 놓는 등 훼손이 심해 궁궐의 후원처럼 변모하기도 했다. 이후 문화재청이 10년에 걸쳐 복구해 지금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으며, 국가안전기획부로 변경된 중앙정보부가 이사가면서 의릉은 1996년 5월 1일 일반인에게 다시 공개됐다.

▲ 의릉 근경.여주 영릉(寧陵·효종)에서와 마찬가지로 왕과 왕비릉을 좌우로 놓지 않고 앞뒤로 나란히 놓아 왕비릉 뒤에 왕릉이 있다.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임금

경종은 1688년(숙종 14) 10월 27일 숙종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왕궁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나인 출신의 희빈 장씨이다. 숙종은 인경왕후, 인현왕후, 인원왕후 등 세 명의 왕비가 있었으나 그들에게서 아들이 없어 1690년(숙종 16) 당시 3세였던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가 폐출되자 왕후가 되었다가 1701년(숙종 27) 죽은 인현왕후를 저주했다는 '무고의 옥' 사건으로 사사된다. 이때 경종의 나이 14세였다. 그 뒤로 경종은 병약하여 세자로 있으면서 그의 이복동생 연잉군(훗날 영조)이 대신해 세자대리청정을 하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1720년(숙종 46)에 숙종이 승하하자, 세자였던 경종은 소론의 지지를 받으며 33세의 나이로 즉위한다. 당시는 노론과 소론의 위험한 당쟁이 계속되던 때였는데, 당시 노론의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가 중심이 돼 경종의 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하자는 주장을 한다. 병약했던 경종은 소론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721년 8월 이를 허락한다. 그러자 노론측은 한 발 더 나아가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경종을 두고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 과정에서 노소론의 대립은 격화됐고, 결국 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 4대신들은 파직 후 유배를 당한다. 그 뒤에도 소론 강경파들은 노론의 숙청을 요구했다. 1722년(경종 2)에는 노론측이 세자 시절에 경종을 시해하려고 했다는 것을 빌미로 노론 4대신을 사사하며 수백 명의 노론파를 제거한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소론이 정권을 독점하게 되지만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승하하고 영조가 즉위하자 조정에는 또 한 차례 숙청의 바람이 불게 된다.

▲ 의릉 석호.

#비운의 어머니 탓에 병약했던 아들

경종의 부인 선의왕후는 1705년(숙종 31) 10월 29일 함원부원군 어유구의 딸로 태어났다. 경종이 세자 시절 첫 번째 세자빈이었던 단의왕후가 병을 앓다가 1718년(숙종 44) 승하하자, 같은 해 9월 13일 세자빈에 책봉됐다. 그리고 1720년 6월 13일 경종이 즉위함에 따라 왕비가 됐다.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매사에 조심스럽고 온유한 성품을 지녔다고 한다. 선의왕후는 1724년 경종이 승하하자 왕대비에 올랐다가 1730년(영조 6) 6월 29일 경덕궁 어조당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한다.

경종이 병약해서인지 아니면 항간에 전하는 그의 시어머니 희빈 장씨가 사사받기 전 자신의 아들인 세자 경종을 붙들고 살려 달라는 과정에서 세자의 고환을 잡아당겨 남자로서의 기능을 상실해서인지 슬하에 자녀가 없다.

▲ 의릉 전경. 의릉은 신좌인향(申坐寅向·서남서에서 북북동방향)의 언덕위에 두 봉분을 앞뒤로 놓은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의 능이다.

경종은 4년간 재위하는 동안 신하들의 당쟁에 시달려 뚜렷한 치적을 남기지 못했다. 1724년(경종 4) 8월 25일 마음의 병을 이기지 못하고 창경궁에서 승하한다.

경종이 창경궁 환취정에서 승하하자 같은 해 12월 16일 양주 중량포의 천장산 기슭 언덕에 예장하고 능의 이름을 '의릉'이라 칭했다. 그로부터 6년 후 1730년(영조 6) 6월 29일 경덕궁 어조당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계비 선의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10월 19일 경종 왕릉 아래에 능을 조영했다. 그래서 의릉은 동원상하릉이며, 조선왕릉 중 효종의 영릉과 더불어 두 곳이 이런 형식이다.

능은 경종의 이복동생인 영조가 즉위하면서 상주(喪主)가 돼 묏자리를 잡고 조영한 것이다. 이후 영조는 이복형이며 자신에게 왕위를 물려 준 경종의 능침을 자주 찾아 정성을 다했다고 전해진다.

▲ 의릉 정자각.

#작고 왜소한 석물들이 특징

의릉은 위쪽에 자리잡은 경종의 능에만 곡장을 둘렀고, 혼유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석물들은 각각 별도로 배치했다.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가 묻힌 여주의 영릉(寧陵)이 이와 같은 구조인데, 이러한 배치 양식은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생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 이유이며, 자연의 지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능원을 조성하려는 우리 민족만의 자연관을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능묘 조각들은 고양시 서오릉에 위치한 그의 부친 숙종의 명릉(明陵) 예를 따라 규모가 작고 왜소하며, 속오례의(續五禮儀) 규정에 의거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조선 초기 신도비형식으로 비각을 세웠으나 세조의 능역조영을 간소화하라는 명에 의해 없어졌다가 영조 때 와서 많은 왕릉을 구분하기 어렵다 하여 이때부터 비각을 세우기 시작한다. 영조 때 최초의 비각은 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비각이다.

능침의 봉분은 난간석으로 설치했으며, 난간 석주에 방위를 나타내는 12지를 문자로 간략히 새겨 넣었다. 망주석 세호는 모두 위를 향해 기어오르게 조각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형태에서 부친 숙종 명릉(明陵)의 망주석 양식을 충실히 모방하고 있다. 장명등은 지붕이 4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숙종 때 이후 나타난 새로운 형식으로 건원릉부터 나타난 8각등에 비해 한결 간략하면서도 소박한 인상을 준다.


문무석인은 전체적으로 4등신의 땅딸막한 비례에 움츠러든 어깨가 경직된 느낌이다. 갑주(甲胄)를 걸치고 장검을 두 손으로 힘차게 짚고 있는 무석인의 뒷면에는 짐승 가죽을 나타내기 위해 꼬리가 말린 것을 재미있게 표현했다. 의릉의 석호는 꼬리를 옆으로 간추리지 않고 등으로 올려놓아 긴장감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왕후릉은 왕릉과 마찬가지로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으로 봉분을 호위하고 있으며, 석물들의 배치 또한 왕릉과 같은 형식이다. 의릉의 정자각은 정청이 앞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에 양쪽에 1칸씩 익랑을 덧붙인 것이 특이하다. 이렇게 정청을 앞면 3칸 측면 2칸으로 한 것은 비슷한 시기에 조영한 휘릉, 숭릉, 익릉, 의릉에서 볼 수 있다. 배위청은 옆면 1칸 앞면 2칸의 건물로 일반적이다.

사진/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