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글/김두규 우석대교수]선릉은 조선 제9대 임금인 성종(成宗·1457~1494)과 그의 계비 정현왕후(貞顯王后·1462~1530) 윤씨의 능으로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다. 지하철 2호선 선릉역에서 걸어서 3~4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인근 주민들이 산책하거나 가볍게 조깅할 수 있는 아담한 공원이다. 왕릉과 왕비릉이 서로 다른 언덕에 있는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으로 돼있으며 왼쪽 언덕에는 정현왕후의 능이, 오른쪽 언덕에는 성종의 능이 배치돼 있다.
#살아선 다복했던 임금, 죽어선 치욕의 삶
서울 중심가에 있어 누구나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왕릉이지만 다른 왕릉에 비해 능역은 매우 좁고, 주변의 고층 빌딩에 포위된 상황이다. 그런데 선릉이 원래부터 이렇게 옹색하게 자리하지는 않았다. 해방 이후 역대 정권, 특히 박정희 정권때 능역의 많은 부분들이 민간에 팔렸기 때문이다. 다른 왕릉들도 마찬가지였지만, 이곳은 그 정도가 심했다. 단독 주택에 비유하자면 담장과 행랑 그리고 마당까지 남의 땅이 되어버리고 안채 일부만 남아있는 꼴이랄까. 이러한 이유때문에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당시 이곳을 제외시킬 생각을 했었다고 등재신청 작업에 참여했던 이창환 상지영서대 교수는 회고한다. 그런데 '도심 개발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나마 보존되어 남아 있는 것이 더 기적'이라고 당시 이곳을 방문했던 외국의 세계문화유산 실사단원들은 칭찬을 했다고 한다.
살아 생전의 삶뿐만 아니라 사후의 삶도 있다. 생전의 성종은 기록상으로만 보면 비록 나이 40을 못 넘기고 죽긴 했으나 경국대전(經國大典) 반포 등 조선 전기의 문물제도 완수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가정적으로도 12명의 부인에 16남 12녀의 자녀를 두어 다복한 임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후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맏아들 연산군의 일이다. 물론 성종 생전에 연산군이 훗날 그렇게 포악해질 것이라고 아버지 성종은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그 일도 그렇지만 사후 성종을 욕보이게 한 가장 큰 사건은 그로부터 100년 후에 발생한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들이 성종과 그의 왕비의 능을 파헤치고 관을 불태워 버린 것이다. 그래서 현재 선릉의 두 능에는 유해가 없다. 터가 나빴던 탓일까?
#신하의 잘못된 판단으로 정해진 선릉의 자리
필자의 전공이 풍수학이므로 풍수적 관점에서 선릉의 장소가 정해진 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조선왕실뿐만 아니라 사대부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풍수 글 가운데 하나가 중국의 성리학자 주자(朱子·1130~1200)가 쓴 산릉의장(山陵議狀)이다. 주자는 이 글에서 '장사를 지낸다 함은 유골을 잘 감춘다는 것'이라고 했다. 주자는 이 글을 중국(宋)의 영종 황제에게 올려 풍수지리가 무엇인지를 알게한 것이다. 주자의 이러한 발언을 염두에 둔다면 선릉은 '유골을 잘 감추지 못한 땅'으로서 처음부터 문제가 있지는 않았을까?
사실 조선왕조실록의 해당 부분들을 읽어보면 이해가 잘 안되는 상황들이 전개된다. 1494년 성종이 죽자 여러 왕릉 후보지들이 논의되는데, 그 가운데 현재의 자리가 최종적으로 정해진다. 그런데 이곳은 원래 남의 무덤이 있었다. 다름 아닌 세종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무덤자리였다. 광평대군은 성종의 작은 할아버지이다. 임금이라는 이유로 작은 할아버지의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고 자신이 그곳에 묻히게 된 셈이다. 그런데 당시 왕실에서는 이 자리를 처음부터 꺼림칙하게 여겼다. 성종의 어머니로서 당시 생존해 있던 인수대비(仁粹大妃)가 이곳이 후보지로 오르자 풍수적인 이유에서 적극 반대한다. "내가 듣기로는 비록 미천한 사람이라도 길지에 장사하면 반드시 그 발복(發福)을 받고, 존귀한 사람이라도 불길한 곳에 장사하면 그 화(禍)를 받는다 하는데, 광평의 묘는 비록 사람과 땅이 서로 맞아서 마땅히 그 발복을 받을 것이라 하나, 혹시나 흉해(凶害)가 없는가? 한 번 장사하고 나면 후회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한 까닭은 당시 광평대군의 자손들이 병들거나 요사한 경우가 많아 불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던데다가, 그 주변 왕실 종친들의 무덤이 많아 그것들을 이장하려면 나라에서 부담해야 할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상주(喪主)인 연산군 역시 할머니 인수대비의 의견과 같았다(이때까지는 연산군이 생모인 폐비윤씨 사건을 몰라 할머니 인수대비와 사이가 나쁘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 자리를 강력하게 추천한 이가 왕실의 외척이자 훈구공신인 영의정 윤필상(1427~1504)이었다. 그는 다른 후보지들보다는 이곳이 훨씬 좋은 길지인데, 다만 무덤의 좌향이 잘못돼 광평대군의 후손에게 그러한 불행한 일이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편다. 물론 지금도 시중의 풍수 술사들 가운데 그러한 주장을 하는 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직접 윤필상의 주장을 들어보자. "광평의 묘는 건해좌(乾亥坐)로서 수파(水破)가 장생(長生)이므로 흉하지만, 지금은 그 위에 임좌(任坐)로 정하므로 수파(水破)가 문곡(文曲)이니, 길하기가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쉽게 표현하면 광평대군 묘의 좌향에서 각도를 15도 정도 틀어서 능의 좌향을 정하면 흉함이 길함으로 바뀐다는 주장이다.
사실 그는 해당 이론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었고 왜곡한 것이다. 그 왜곡이 고의적이었는지 아니면 착각에 따른 실수였는지 알 수 없다. 이때 그가 근거로서 제시한 것이 호순신의 '지리신법(地理新法)'이란 풍수서였다. 조선 초기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를 계룡산으로 정했을 때 당시 경기관찰사 하륜이 계룡산 도읍지 불가론을 관철시킨 근거가 된 것이 바로 이 지리신법이란 풍수서였다. 풍수 이론은 크게 형세론( 形勢論)과 방위론(이기론·理氣論)으로 나뉘는데, 지리신법은 후자에 속한다. 터가 육안으로 보아 균형과 조화를 갖추었는지를 따지는 것이 형세론이다. 그러한 형세론에 부합한 뒤에 무덤의 좌향을 살피는 것이다. 지리신법의 저자인 호순신 역시 형세론을 전제한 뒤에야 방위론을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필상이 왕실의 어른인 인수대비와 왕인 연산군을 고집스럽게 설득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킨 이유가 무엇인지 필자는 풍수학자로서 궁금하기 그지없다.
#이장한 광평대군의 자손들은 번성해
아무튼 이렇게 해 1495년 4월에 성종의 유해가 안장돼 장례가 마무리되는데, 이미 불길한 일은 그 전부터 시작된다. 장례 한 달 전쯤인 3월, 연산군은 부왕 성종의 묘지문을 읽으면서 처음으로 어머니 윤씨가 폐비가 된 것을 알게 된다. '그날 연산군은 밥을 먹지 않았다'고 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연산군과 왕실의 비극이 시작된 날인 것이다. 반면 성종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인 대모산 자락(현 서울 강남구 수서동 일원역 부근)으로 이장된 광평대군의 무덤은 그 후손들의 묘들과 함께 지금까지 온전히 전해진다. 게다가 광평대군이 이곳으로 이장된 뒤 그 후손들이 번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주이씨 문중은 조선시대 문과에 850명의 합격자를 배출했는데 그 가운데 광평대군 후손이 115명이나 된다고 한다. 그 후손들은 이 묘역의 명당 발복이라고 믿고 있다. 성종 임금을 광평대군의 묘지에 안장하려고 풍수설까지 왜곡했던 당시의 실력자 윤필상은 어찌 됐을까? 그로부터 몇 년 후 그는 연산군에 의해 멀리 진도로 유배돼 죽임을 당한다. 이 모든 일들이 우연일까 아니면 땅의 탓일까?
갈수록 물질화돼 땅을 무시하고 땅을 갖고 온갖 장난질을 하는 이 난폭한 시대를 보면서 더욱더 나는 그것이 우연이 아닌 땅과 인간과의 잘못된 만남 탓이라고 믿는다. 아니 그렇게 믿어야 마땅하다, 풍수학인으로서!
사진 / 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