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일보=글/정종수 국립고궁박물관장]서울 강남의 테헤란로 지하철 선릉역 8번 출구에서 3분 거리에 있는 선정릉(宣靖陵)은 선릉과 정릉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오늘 만나볼 정릉은 조선 11대 왕 중종(中宗·1488~1544)의 능이다. 중종에게는 3명의 왕후와 7명의 후궁이 있었으나 사후에는 어느 왕비와도 함께 있지 못하고 아버지 성종과 어머니 정현왕후 능인 선릉 옆에 홀로 묻혀, 정릉은 조선시대의 몇 안되는 단릉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정릉의 상설은 성종의 선릉과 같이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석양과 석호의 전체적인 자세는 선릉과 비슷하면서도 세부적인 표현에 있어서는 조금 더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인다. 반면 전체적으로 형식화된 경향이 있다. 문무인석은 높이가 3m가 넘을 정도로 큰 편이다. 문무인석 얼굴은 퉁방울눈이 특이하며 코 부분이 훼손되고 검게 그을려 있어 정릉의 수난을 상기시켜 준다.
#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던 임금
중종은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 사이의 둘째 아들이자 10대 왕이었던 연산군의 이복동생으로, 1488년(성종 19) 3월 5일 태어났다. 1494년(성종 25) 진성대군(晋城大君)에 봉해졌다가 1506년에 연산군의 계속된 폭정에 대항해 박원종·성희안 등이 일으킨 '중종반정'에 의해 조선 11대 왕으로 즉위하게 됐다. 이 중종반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반정 맨 앞에 선 성희안. 형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에까지 오른 그는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이 자문을 많이 구할 정도로 학문에 조예가 깊었다. 하지만 연산군이 망원정에서 연회를 즐기고 있을 때 평소 임금의 방탕과 폭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성희안은 분을 못이겨 그만 풍자적이고 훈계적인 시를 지어 올렸다가 연산군의 미움을 사 종9품 무관의 말단직인 부사용이라는 관직으로 밀려났다. 그후 성희안은 박원종을 만나 반정을 모의한다. 1506년 9월 1일, 박원종·성희안·신윤무 등은 훈련원에 무사들을 결집시켰다. 훈련원을 출발한 반정 세력은 창덕궁 어귀의 하마비동에서 영의정 유순, 우의정 김수동 등을 만나 함께 진을 치고 경복궁에 있는 대비에게로 가서 거사의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던 대비는 신료들의 요청이 계속되자 연산군 폐위와 진성대군의 추대를 허락하는 교지를 내렸다. 교지를 받은 반정 주도세력들은 먼저 권신·임사홍·신수근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했다.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연산군에게 옥새를 내놓을 것을 요구한다. 사태의 심각성을 안 연산군은 옥새를 내줬고, 반정군의 호위를 받으며 경복궁에 도착한 진성대군은 대비의 교지에 힘입어 조선 11대 왕 중종으로 등극한다.
중종은 즉위 초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다. 1515년(중종 10) 이후에는 조광조를 내세워 철인군주정치를 표방하여, 훈구파를 견제하고 사림파를 등용했으나, 과격한 개혁정치가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당파 논쟁이 끊이지 않아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는 등 조정이 안정되지 못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는 향약이 전국화되어 유교적 향촌 질서가 자리를 잡았으며, 인쇄술의 발달과 더불어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많은 서적이 편찬됐다. 경제적으로도 동전의 사용을 적극 장려하고 도량형의 통일을 꾀하였으며, 사치를 금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왕비가 셋 있어도 무덤은 나홀로
중종은 1544년 11월 15일 19살 창경궁에서 왕위에 등극한지 39년, 보령 57세로 승하한다. 장례는 5개월장이라는 전례에 따라 이듬해 2월 3일 현재 서삼릉 능역 내에 있는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 능인 희릉(禧陵) 오른쪽 능선에 안장된다. 왕의 유명에 따라 능을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조영하고 정자각은 왕과 왕비의 능 사이로 옮겨 설치했다. 그런데 한 달 뒤 조정에서는 왕비 문패 아래 왕이 있을 수는 없다해서 능호를 편안하다는 뜻으로 정릉(靖陵)으로 바꾼다 .
중종에 이어 인종(12대)이 왕위에 오른지 8개월만에 죽자 문정왕후(중종의 제2계비)는 자신의 소생인 명종(13대)을 왕으로 즉위시킨다. 문정왕후는 친정 9촌 아저씨 윤임을 사사시키고 동생 윤원형을 권력 핵심으로 내세워 세상을 온통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다. 그리고 문정왕후는 지금의 서울 강남에 있는 봉은사 주지 보우와 의논해 9촌 고모되는 제1계비 장경왕후와 남편 중종을 갈라놓는다. 중종이 제1계비 장경왕후 옆에 묻힌 지 7년만인 1562년(명종 17년) 9월 4일 지금의 서울 강남 삼성동 선정릉 자리로 천장한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천장의 이유는 다름 아닌 능지가 풍수지리적으로 불길한 땅이라 선왕을 모실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지대가 낮아 조금만 비가 와도 침수돼 재실에 물이 들어가 많은 피해를 입었다. 선조실록은 '정자각(丁字閣) 앞이 지세가 낮아 장마가 질 때마다 강물이 불어 홍살문까지 잠겨 배를 타고 다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중종과 함께 안장되기를 바랐던 계비 문정왕후 역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재 태릉(泰陵)에 단릉(單陵)으로 안장돼 있다. 그리고 중종의 원비였던 단경왕후는 양주의 온릉에 안장됐다. 중종은 결국 왕비가 3명이나 됐지만 그 어떤 부인 옆에도 묻히지 못하는 측은한 신세가 된 것이다.

# 시신 없는 무덤, 정릉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릉 40기는 대부분 한 번도 발굴되지 않은 처녀분이다. 하지만 선릉과 정릉은 예외다. 그렇다면 이 두 능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1593년 4월 13일 선조는 경기좌도 관찰사 성영으로부터 선릉과 정릉이 왜군에 의해 파헤쳐지고, 왕의 시신은 불에 타버렸다는 비보를 듣는다. 선조는 바로 통곡을 하며 대궐문에서 슬픔을 나타내는 의식을 행한다. 확인해 보니 선릉(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은 불에 타 능침에서는 시신이 사라진채 타다 만 뼈 잿더미들만 나오고 무덤 속은 이미 비었으며, 정릉(중종의 능)에서는 염할 때 입혔던 옷이 벗겨진 시신이 무덤 속에 가로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 시신이 중종의 것인지 아닌지 확실하지가 않았다. 이를 가려내기 위해 선조는 영의정 최홍원, 좌의정 윤두수, 부원군 정철 등 원로대신부터 전에 중종의 얼굴을 보았던 궁녀들까지 동원해 확인했지만 중종이 승하한 지 오래돼 외모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몇 없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사람들도 고령이라 그 확인이 쉽지 않았다. 시신의 확인이 쉽지 않자 조정에서는 일찍이 왕의 체격을 잘 알고 있는 덕양부인과 궁녀 등을 시켜 왕의 모습을 글로 적게 한 다음 시신과 대조토록 했다. 이들 보고서에 따르면 왕은 중키로 이마에 검은 사마귀가 있었는데, 녹두보다 조금 작았고, 살찌지도 여위지도 않았으며, 얼굴은 길고 콧마루는 높았다고 했다. 하지만 중종의 능침에서 나온 시신은 살은 썩어서 떨어졌고, 검은 사마귀는 알아볼 수 없고, 왕의 얼굴은 길고 턱뼈도 길었는데 이 시신은 네모난 얼굴을 하고 있으며, 배 위에 대여섯 군데 칼 맞은 흔적 등 여러 정황으로 볼때 다른 사람의 시신 같다며 시신 확인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야기를 했다. 왜군이 왕릉을 욕보이기 위해 가져다 둔 시신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혹시나 중종의 시신일지도 모르기에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뼈와 타다 남은 재를 가지고 다시 오례의에 맞춰 염을 해 안장한다. 그래서 조선왕릉 중에서 선릉과 정릉은 시신이 없는 무덤이 된 것이다.
사진/조형기 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