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현 총리가 90년대 말 숨 막히는 권력 투쟁의 와중에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며 사실상 러시아의 최고권력자에 오른 지 9일로 11주년을 맞는다.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무명 인사였던 푸틴이 1999년 8월 9일 보리스 옐친 당시 대통령에 의해 총리 대행으로 전격 발탁되면서 이후 혼란에 빠진 러시아의 통치권이 서서히 그에게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이듬해 대통령에 당선돼 8년 동안 2기를 연임한 뒤 2008년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에게 크렘린의 권좌를 물려주고 총리로 내려앉은 그는 지금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실세 지도자로 군림하고 있다. 그의 총리 대행 발탁 11주년이 러시아 정치에서 여전히 의미를 갖는 이유다.

   1999년 8월 9일 크렘린 내 행정직을 거쳐 소련 시절 국가보안위원회(KGB)의 후신인 연방보안국(FSB) 국장을 맡고 있던 푸틴은 옐친 대통령에 의해 총리 대행으로 지명됐다. 그의 나이 46세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의외의 인사였다.

   옐친은 전격 인사를 단행하며 "내년에 있을 대선에서 푸틴이 후보로 나서길 원한다"고 말해 사실상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언했다.

   뒤이어 8월 16일 푸틴은 하원인 국가두마의 인준을 거쳐 정식 총리에 취임했다.

   이후 건강이 더욱 나빠진 옐친이 푸틴에게 국정을 맡기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그는 하루 아침에 최고 국정 책임자가 됐다. 1999년 12월 31일 옐친이 전격 사임하고 대통령 직무대행을 떠맡은 푸틴은 이듬해 3월 대선에서 53%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가 된 것이다.

   크렘린에 입성한 푸틴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극심한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으로 위기에 빠진 러시아를 안정시키며 국민의 신임을 얻어갔다.

   러시아 연방과 두 차례나 전쟁을 치르며 독립을 시도하던 카프카스 지역의 체첸 자치공화국을 무력으로 굴복시켰고, 옐친 시절 온갖 편법과 불법을 동원, 막대한 부를 축적한 뒤 정치적 영향력까지 행사하던 신흥재벌(올리가르히)에 대한 대대적 사정을 단행, 이들의 기를 꺾어 놓았다.

   때마침 찾아온 고유가 상황을 적극 활용, 1998년 디폴트(채무불이행)까지 몰렸던 경제를 성장 기조에 올려놓았다.

   푸틴 집권 이후 국제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 이전까지 러시아 경제는 연 7%대의 고도성장을 계속했다.

   국민 생활은 눈에 띄게 나아졌다. 1년 넘게 밀리던 월급이 제때 나오기 시작하고 급여 수준도 크게 올라갔다.

   국내 생산이 회복되고 수입이 확대되면서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텅 비다시피 한 상점 앞에 긴 줄을 서던 일은 옛말이 됐다.

   그 결과 푸틴에 대한 지지율은 70%대로 치솟고 그를 '구세주'로 칭송하는 여론이 번져 갔다.

   크렘린의 자유언론과 야당 인사 탄압, 체첸 주둔 러시아군의 인권 유린, 관료들의 부정부패 등을 지탄하는 야당의 목소리는 대다수 국민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푸틴은 2008년 5월 3기 연임을 금지한 헌법 조항에 밀려 크렘린궁을 떠났다.

   그는 3선 개헌이란 무리수를 두는 대신 대통령에서 총리로 물러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는 실용적 선택을 했다.

   후임엔 동향(상트페테르부르크)에 레닌그라드 대학(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대 후배로 90년대 초 상트페테르부크 시정부 시절부터 근 20년을 동고동락한 메드베데프를 앉혔다.

   이로써 러시아엔 형식상의 최고지도자인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실질적 권력자인 푸틴 총리가 함께 통치하는 '이중권력'의 시대가 열렸다.

   지금도 '러시아를 실질적으로 통치하는 것은 푸틴'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국제금융 위기의 여파로 경제 사정이 어려워진 최근까지도 그에 대한 지지도는 60%대를 웃돌고 있다.

   더딘 경제회복과 근절되지 않는 부정부패, 민주주의 후퇴 등을 비판하는 반(反) 푸틴 여론이 고개를 들고 있지만 그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흔들리지 않고 있다.

   그가 2012년 대선에 재출마할 것이란 관측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푸틴 스스로도 대권 재도전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그는 지난해 12월 현지 언론을 통해 생중계된 국민과의 대화에서 크렘린 복귀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대선 출마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아직 시간은 많다"고 답변해 출마 의사를 강하게 내비쳤다.

   올해 6월 초 프랑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이미 메드베데프와 함께 차기 대선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를 생각하고 있다"면서 "2012년에 무엇을 할 것인가는 (각자 일의) 결과에 달렸다"고 말했다. 상황에 따라 직접 대선에 출마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러시아 헌법은 대통령의 3연임은 금지하고 있지만 연임 후 물러난 뒤 다시 입후보하는 것은 허용하고 있다.

   푸틴이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한 뒤 연임까지 하면 최대 2024년까지 집권할 수 있다. 2008년 말 대통령의 임기를 4년에서 6년으로 늘리는 개헌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가 18년(1964~1982)을 장기집권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기록을 뛰어넘는 장수 지도자가 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