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굴과 발견, 인천을 다시 생각하다
1966년 3월1일 강화의 전등사에서 중국 철종(鐵鐘)이 발견됐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 철종은 우리나라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으로 송나라 시대의 것이며 856년전 제품으로 불교학상 또는 고고학상으로 보아 귀중한 연구 대상이라고 말하고 있다."(1966년 3월 1일자 3면)
요즘에야 조선시대 유물들은 자주 발굴되고, 심지어 신석기 문화재가 대규모로 출토되는 일도 종종 있다. 그래서 이런 문화재 발굴 기사에 사람들이 많이 둔감해졌지만 당시만 해도 희귀 문화재가 나오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예를 들어 요즘 사람들은 대부분 도자기하면 경기도를 먼저 떠올리기가 쉽다. 경기도 광주, 이천, 여주 등은 도자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 2년마다 도자비엔날레를 개최하고 많은 생활도자기를 판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전에 주목할 만한 기사가 한 대목 있다. "5백여 년 전에 도자기를 구워내던 길이 8m, 폭1.2m, 높이 1.5m의 반월형 솥틀(가마)이 국내에서 최초로 인천시 경서동 146 속칭 자기마을에서 발견됐다. 그런데 이번에 발견된 솥틀은 대접같은 것을 한번에 2천내지 3천개를 구워 냈으며 항아리 같은 종류의 도자기는 한번에 수백개씩 구워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1966년 4월 26일자 3면)
이 기사를 보면 예전엔 도자기를 경기도에서 뿐 아니라 인천에서도 대규모로 제작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40여년이 지난 지금 인천과 도자기를 연관짓는 사람은 많지 않다. 오히려 다음과 같은 기사에는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많다. "우리나라 화교(華僑) 문화의 '상징'이었던 '중화루(中華樓)'의 옛 간판이 인천시립박물관에 보관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중화루는 1910년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중국 요리점이었으며, 특히 국내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을 중국인 수십 명이 일본인에게서 공동으로 인수한 뒤 음식점으로 개조해 일약 '스타급 음식점'으로 성장시켰다는 점에서 개항기 중요 문화적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상징 건물이었다."(2010년 7월 9일자 1면)
'자장면' 하면 사람들은 인천을 떠올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기사는 당연하고 친숙한 기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경인일보는 이런 점에 착안, 아예 자장면 관련 시리즈를 연재한다. 지난 2009년 4월 10일부터 같은해 12월 25일까지 자장면의 기원과 일화 등을 담은 '자장면, 그 끝없는 이야기 타래-인천·산둥 그리고 세계의 자장면'을 연재해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은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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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거 위기의 문화재 다시 살려내다
경기도에서는 헐릴 뻔 했던 문화재를 언론의 힘으로 막았던 일이 있다. 1973년 경기도 문화재로 지정된 지지대(遲遲臺)비각이 헐린다는 소식이 경인일보에 게재되자 큰 논란이 일었다.
"경수간 고속화도로 건설공사로 인해 수원시 파정동 47에 위치한 지지대비각이 180년의 전설을 간직한 채 아쉬운 철거를 당해야만 한다. 정조대왕의 효성이 아로새겨져 180년간 수원의 상징인양 고갯길에 서있던 이 비각은 72년 6월 26일자로 경기도 지방문화재 사적 32호로 지정된 바 있는데, 경수간 고속도로 건설사업으로 헐리게 된 것이다."(1973년 3월27일자 3면)
이 기사가 나간 후 독자들의 항의가 시청을 비롯한 해당기관에 빗발치게 되고, 결국 신문기사의 힘 때문이었는지 한달만에 지지대 비각 철거는 보류하기로 결정된다.
"경수화고속도로공사로 헐릴 뻔 했던 수원시 파정동에 위치한 지지대 비각이 노선을 변경해 그대로 존속케 됐다. 당국은 노선변경 확정으로 지지대비각이 안 헐리고 존속하는 대신 노송 2그루가 옮겨심어져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1973년 4월 12일자 3면)
이런 언론의 역할을 교훈삼아 경인일보는 1995년 창간 35주년 기념으로 '수원성 2백년' 시리즈를 연재한다. 개발논리를 앞세워 원형이 훼손돼가는 수원성과 그 주변을 점검하고, 조선신도시의 찬란한 문화유적을 후손들에게 남겨주자는 의도로 기획됐던 이 시리즈는 역시 독자들로부터 많은 격려를 받았다. 이후 경기도와 수원시의 노력으로 2년후 수원성(화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영광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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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사와 항일유적 재조명
경인일보는 독립운동에 대한 재조명 차원으로 항일 유적과 애국지사들에 대해 심도깊게 다뤘다. 1982년 '독립운동 재조명' 시리즈를 통해 조선어학회 사건을 비롯한 민족 말살정책을 하나둘씩 점검하며 극일(克日)의 원천을 찾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제시했다. 같은해 9월에는 화성 제암리 교회에서 유해 발굴에 관련된 기사를 실어 독자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일제가 저지른 제암리 소타(燒打)사건 유골발굴 현장엔 모두가 말을 잃고 당시의 만행에 격분, 치를 떨었다. 63년전 1919년 4월 15일 일제가 제암리교회에서 저지른 처절한 집단 학살의 참상이 문공부와 경기도 공동조사단에 의해 24일 하오 화성군 향남면 발안중농고 뒷편 도이리 공동묘지 뒷편에서 드러나며 조사단은 발굴의 기쁨보다 울분을 삼켰고 유족과 주민들은 끝내 통곡을 터뜨렸다."(1982년 9월 25일자 7면)
이날 신문에 크게 실린 쇠못, 일본 맥주병 등은 당시 일제의 만행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줬으며, 독자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로부터 10여년 후 항일유적지였던 화성의 제암리와 안성의 원곡면 칠곡리가 3·1운동 유적지로 성역화 된다는 소식은 그나마 유족들과 독자들에게 위안이 됐다.
"도는 제암리에 20억원을 들여 1만7천3백55㎡의 터에 연면적 1천7백99㎡ 규모의 기념관을 내년말까지 신축한다. 또 안성시 원곡면 칠곡리에도 내년 말까지 24억원을 들여 3만3천㎡의 터에 연면적 1천66㎡ 규모의 기념관과 사당, 기념탑 등을 세우기로 했다."(1994년 4월 10일자 1면)
2003년에는 3·1만세 운동을 주도했던 36명의 사진이 국내 최초로 공개돼 다시한번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3·1절 84주년을 앞두고 4대 항일 항쟁지이자 유일한 무장투쟁지였던 화성지역의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36명의 사진이 발굴됐다. 기록으로만 전해져온 이들 독립운동가들의 당시 모습을 담은 사진이 입수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화성 3·1 운동의 전모를 실증적으로 밝혀내줄 귀중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2003년 2월 21일자 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