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신창윤·김종화기자]한국 프로스포츠는 지난 1982년 6개 팀으로 구성된 프로야구가 탄생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후 1985년 프로축구, 1996년 프로농구에 이어 2004년 프로배구가 순차적으로 설립됐다. 빠른 정착을 위해 지역 연고지 제도를 도입한 각 프로리그들은 2천만명이 거주하고 있는 수도권을 최대의 마케팅 시장으로 판단, 소속팀의 연고지로 적극 활용했다.

시장성이 큰 만큼 많은 팀들이 수도권에 터를 잡고 팬 몰이에 나섰지만 결국 일부 팀들은 이 지역을 떠나기도 했다. 경인일보를 통해 비쳐진 4대 프로 스포츠에 대한 역사를 살펴본다.

# 한국 축구를 대표하는 경인지역 팀들

한국 프로축구에서 경인지역 연고팀들은 리그를 선도했다.

경인지역에서 처음으로 탄생한 팀은 현재 제주유나이티드FC의 전신인 유공 코끼리다.

유공코끼리는 1982년 12월 17일 창단, 이듬해인 1983년 한국 프로축구 원년 슈퍼리그에 서울·인천·경기 지방을 연고로 참가했다.

광역연고제가 정착된 1987년부터는 경인지역을 연고지로 사용했다.

1991년 서울 동대문운동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지만 프로축구연맹이 '지방축구 활성화'라는 명분으로 1996년 일화 천마(현 성남 일화)와 LG치타스(현 FC서울) 등과 함께 경기도로 강제 이전을 권고해 부천으로 연고지를 이전하며 팀 명칭도 부천 SK로 바꿨다.

1988년 서울에서 창단한 성남 일화는 1996년 천안으로 연고지를 이전한 뒤 2000년 지금의 성남에 새 둥지를 틀었다. 성남은 2001년 첫 우승을 시작으로 3년 연속 정상을 지키며 명실상부 한국 프로축구 최고의 팀으로 자리잡았다.

1995년 창단한 수원 삼성은 21번의 공식대회 우승컵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K-리그에서 가장 많은 수의 서포터스를 보유하고 있다. 2004년 3월 K-리그 13번째 구단으로 공식 출범한 인천 유나이티드는 특정기업이 아닌 시민주 공모를 실시해 195억원의 창단 자금을 마련해 창단했다.

인천 유나이티드는 2005년 창단 2년 만에 정규리그 통합 성적 1위와 통합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시민 구단의 성공 사례를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 '프로축구팀들 '수원 잡아라' 불꽃대결(1995년2월16일).

# 명문 구단으로 도약하고 있는 농구와 배구

세 번째 창설된 프로농구는 경인지역에 2개의 팀이 운영되고 있다.

KT&G의 전신인 안양 SBS는 프로농구 원년인 1997년 안양을 연고지로 선택했고, 2006년 KT&G로 이름을 바꿨다.

또 다른 농구팀인 전자랜드는 역사가 깊다. 1994년 대우증권 실업농구단으로 창단, 1999년 신세기 통신에 인수되며 신세기 빅스로 팀 명칭을 변경했고, 2년 뒤인 2001년 신세기 통신이 SK텔레콤에 합병되면서 인천 SK빅스로 팀 명칭을 변경한 뒤 결국 2003년 전자랜드가 팀을 인수했다.

실업리그를 운영하던 한국 배구는 기존의 실업리그 체제로는 배구의 저변 확대와 실력 향상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야구, 축구, 농구에 이어 단체 구기 종목으로는 네 번째 프로 스포츠를 출범시켰다.

현재 경인지역에 연고를 두고 있는 팀들이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던 데 비해 프로배구 인천 대한항공은 2007년 구미 LIG손해보험을 꺾고 리그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

또 지난 시즌에는 수원을 연고로 하는 KEPCO45가 팀을 창단해 신흥 명문 구단으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이외에도 프로배구는 여자팀의 현대건설과 흥국생명이 각각 수원과 인천을 연고로 지역 프로배구 활성화에 기여하고 있다.

▲ 프로농구 인천 신세기빅스 탈꼴찌 시동(2002년12월18일).

# 2천만 수도권 시민들과 함께 한 프로야구

1981년 프로야구 창립이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당시 전국을 6개 권역으로 나눠 각 권역당 1개 팀이 연고지로 삼는 것을 원칙으로 했지만 경인지역을 연고지로 삼고 창단할 팀이 마땅치 않았다.

이 무렵 갑작스럽게 등장한 그룹이 바로 '삼미'다.

팀을 창단하려는 다른 그룹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았던 삼미는 야구에 대한 열정만큼은 다른 그룹에 뒤지지 않았다. 창단이 결정되자 지역 출신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 구성에 박차를 가했고 이듬해인 1982년 2월 야구단 엠블럼(경인일보 1982년 2월 3일자 8면 보도)을 공개했다.

삼미는 삼성과의 원년 개막전 경기를 5-3으로 승리하며 기분좋은 출발을 보였지만 엷은 선수층으로 인해 이후 연패를 거듭한 끝에 하위권으로 추락했다. 또 1985년에는 모 기업의 부도로 같은 해 5월 1일 청보식품으로 매각이 결정됐다.

경인지역 연고팀의 수난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50대 그룹에도 들지 못했던 청보는 구단 매입 후 2년 뒤인 1987년 모 기업이 법정관리로 넘어가며 힘겨운 나날을 보냈고 급기야 같은 해 7월 태평양화학이 인수했다. 하지만 태평양도 5년 뒤인 1992년 선경그룹과 매각 협상에 들어갔지만 실패했고 1995년 7월 현대가 야구단 인수를 결정, 마침내 1996년 3월 창단식(경인일보 1996년 3월 11일자 1·13면 보도)을 가졌다.

그러나 현대가 2000년 서울 입성을 발표하자 같은 시기 연고지 이전을 약속받고 창단한 SK가 인천으로 입성했다.

 
 

# 야구 명문으로 부활 견인, 현대와 SK

프로리그에서 창단을 받아 주지 않자 독자적인 리그를 창단하겠다고 선언했던 현대의 합류로 야구계는 일대 지각 변동이 일어난다. 현대가 태평양을 인수하기 전 프로야구에서 경인지역 야구는 만년 하위권 팀의 상징일 뿐이었다.

현대 이전 팀들이 이룬 최고의 성적은 1994년 태평양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2위를 했을 뿐 중하위권에 머물면서 정상을 차지하지 못했다.

한국시리즈 우승에 대한 경인지역 야구팬들의 열망은 현대가 이뤄냈다.

1996년 프로야구에 발을 들여놓은 현대는 같은 해 준우승을 차지했고, 1998년 첫 정상(경인일보 1998년 10월 31일자 1·7면 보도)에 올랐다.

또 2000년에는 정규시즌에서 91승40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두산과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우승을 차지했다.


현대는 2001년 후반기 이후 홈구장을 서울로 옮길 예정이었지만 자금난으로 취소돼 2007년 팀이 해체 수순을 밟을 때까지 임시로 수원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수원에서 둥지를 튼 현대는 2003년과 2004년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우승을 차지해 경인지역 야구팬들의 야구 갈증을 풀어줬다.

현대가 2007년 야구단을 전격 해체하자 신흥 명문 SK가 그 자리를 대신 채워줬다.

2000년 창단을 발표한 SK는 초대 강병철 감독과 2대 조범현 감독이 지휘봉을 잡는 동안 팀 리빌딩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김성근 감독이 2007년과 2008년(경인일보 2008년 11월 2일자 1·15면 보도) 팀을 정상으로 이끌며 신흥 명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