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은 역사적인 격변기마다 '전장'(戰場)의 한복판에 있었다. 한국전쟁때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 7개 사단은 3주안에 남한 땅 전체를 점령한다는 계획 아래 남침했다. 낙동강 전선마저 위협받던 1950년 8월 중순 인천상륙작전은 기획됐다. 워싱턴 군 수뇌부는 반대했지만 도쿄 사령부에 있던 맥아더는 밀어붙였다.
인천상륙작전 구상은 당시까지만 해도 '직접 개입'하지 않았던 중국측이 입수해 김일성쪽에 전해졌지만, 북쪽은 믿지도 않았고 가능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9월 15일. 인천항 일대와 인천항을 엄호하듯 감싸고 있던 월미도는 초토화됐다. 당시 전황을 보도한 '런던뉴스'에 따르면 262척의 함선(미국 194, 영국 12, 캐나다 3, 호주 2, 뉴질랜드 2, 프랑스 1, 네덜란드 1, 일본 32, 남한 15척 등)에 4척의 순양함, 10척의 전함이 이틀동안 예비 폭격을 감행한 뒤였다. 오전 6시에 월미도 상륙이 이뤄졌고, 30분 후에 월미산 정상에 미 해병대 깃발을 꽂았다. 상륙부대는 오전 7시 1분에 월미도 전역을 탈환했다. 북한군의 저항은 극히 미미했다. 절대적인 열세 국면에 있던 전황을 일거에 뒤바꿨다는 평가를 받는 인천상륙작전은 예상보다 손쉽게 이뤄졌다.
그리고 3년이란 치열한 공방전 끝에 휴전했다.
미국측 자료에 의하면 한국군 전사자 41만5천명, 부상자 42만9천명에 미군 전사자 3만3천명, 부상자 10만5천명이었다. 북한군과 중국군은 전사자만 150만명에 이를 것으로 미 행정부는 추정한다.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2010년 월미도에는 세 가지 풍경이 동시에 펼쳐진다. 지난 11일에는 '전쟁의 장소' 월미도를 '평화의 터'로 승화시키자는 차원에서 매년 개최되는 월미평화축제가 열렸고, 15일에는 국가 차원의 상륙작전 재연 행사가 대규모로 치러진다. 또 월미도 한 귀퉁이에선 상륙작전과 함께 삶터를 빼앗긴 '원주민'들이 살던 곳을 돌려달라고 2천100일이 넘게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에 직접 참가했던 '한국군'은 아직도 그 생생한 기억을 담고 인천에 살고 있으며, 상륙작전으로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은 피해자들도 역시 인천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인천은 '보혁 갈등'의 중심지가 되기도 한다. 때론 남북 관계 경색과 화해무드의 극단적 상황을 왔다갔다하는 진원지가 되기도 한다.
경인일보는 인천상륙작전 60년을 맞아 기획 시리즈를 몇 차례에 걸쳐 싣는다.
| ||
맥아더의 인천상륙 순간. '인천상륙작전'으로 '한국전의 영웅'이 된 맥아더가 인천에 첫발을 내딛는 장면이 호주 종군기자(Alan Lambert)의 카메라에 잡혔다.
기록에 따르면 맥아더가 인천을 처음 방문한 날은 작전 이틀 뒤인 9월 17일이었다. 맥아더 사진은 '연출'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누군가의 부축을 받는다든지, 고개를 숙이고 있다든지, 얼굴에 근엄함이 떨어지는 사진을 찍기는 쉽지 않았다. 맥아더 바로 뒤에도 숨은 듯 '장군'을 지키는 누군가의 두 손도 보인다. 따라서 이 사진은 맥아더나 인천상륙작전과 관련한 사진 중 '희귀본'이란 평가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경인일보는 9·15 인천상륙작전 60주년 기획 취재중 한 독자로 부터 이 사진 원본을 제공받았다. 이 독자는 10여년 전에 미국의 한 인사로부터 "인천과 연관이 깊은 기념물"이라는 말과 함께 이 사진을 선물로 받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