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산 용성면 용전리에 있는 반룡사. 구룡산을 배경으로 동·서·남쪽의 삼면이 트여 조망이 탁월하며 반룡사 낙조(落照)와 운해(雲海)는 천불관음 자비에 비유될 정도로 아름답다.

[경인일보=전상천·민정주기자]경산은 원효와 그의 아들 설총,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 등 삼성현의 고향으로 유명하다. 특히 원효가 몇몇 소수의 선택받은 사람들만을 열반으로 이끄는 소승불교의 벽을 뛰어넘어 모든 민중, 중생구제를 위해 대승불교를 출발시켜 역사적으로 뜻깊은 곳이기도 하다.

경인일보 취재팀이 지난 8월23일 찾은 경산 반룡사 등에는 천년전 원효의 자취가 곳곳에 배어 있어 고된 여행길이 즐거움 그 자체였다.


■ '대승불교의 발흥지'=취재팀이 먼저 찾은 곳은 초개사. 신라 진덕여왕 2년(648)에 원효가 출가한 뒤 자신의 집을 희사해 창건한 절이다.

원효는 당나라 유학을 포기하고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와 초개사를 연 뒤 두문불출한 채 수행에 전념했다고 전한다. 이에 설총이 초개사에 있는 아버지를 뵙기 위해 맞은 편 산에서 책을 읽었으나 원효가 외면했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5층탑의 하대석 7점이 절터에서 발견됐다.

지금은 39㎡ 정도의 아담한 법당을 다시 짓고있다. 12월이면 속세로 뛰어들어 불교를 민중의 곁에 두고자 했던 원효의 뜻을 담은 초개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초개사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설총이 어린시절을 보낸 총지(설총의 아명)사가 있다. 이어 원효가 태어난 밤나무밭에 가봤지만 저수지와 군부대가 덩그러니 차지하고 있어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 제석사 법당 내벽에서 발견된 원효의 일대기를 그린 불화중 백고좌회, 소를 타고 가며 금강삼매경을 해석하고 있는 원효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 '바티칸 성당에 비유되는 제석사 불화'=400여년전 한 농부가 밭갈이를 하다가 발견한 불상과 탑신을 모신 경산 지인면 북사리의 제석사.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이었다고 하나 확실한 고증자료는 남아있지 않다.

취재팀이 제석사 법당 내벽에서 발견한 원효의 일대기를 그린 불화 10편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그의 일생을 생생하게 보여줘 마치 바티칸 성당의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지창조화를 보는 듯했다.

원효 불화중 유난히 눈길을 끈 것은 원효가 무애사상을 바탕으로 민중 속에서 활동하는 모습과 백고좌회에서 설법하는 모습. 백고좌회는 당시 신라시대 100명의 고승이 참가하는 인왕경대회이지만 원효는 높은 학식에도 불구, 파격적인 행보로 배척을 받아 참석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신라 왕비가 병이 나서 당나라에 약을 구하러 갔다가 금해(錦海)용왕이 황룡사에 '금강삼매경'을 보내 설법으로 치유토록 했다. 이때 원효는 누구도 해석할 수 없었던 금강삼매경을 강연하러 가는 길에 소의 뿔에 책을 놓고 강연문을 썼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송고승전' 황룡사 원효전에서 강연을 마친 원효가 "지난날 백개 서까래를 모을 때는 비록 참여하지 못했지만 오늘 아침 하나의 대들보를 가로놓는 것은 오직 나 혼자만이 할 수 있다"라고 던진 통쾌한 말이 귀에 생생하게 들리는 듯했다.

취재팀은 불화를 통해 천년을 넘어 우리에게 전해진 원효의 수행과 깨달음, 민중을 위한 가르침을 어렴풋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이어 제석사에 남아있는 석조좌불과 부서진 탑신 석등연화대석 등 신라말기의 유적을 둘러봤다.

▲ 신라말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팔공산 원효암 마애여래좌불상. 원효암 뒤편에 주형(舟形)모양으로 감실을 파고 반양각으로 좌불상을 새겼다. 굵은 연경(連逕)끝에 연화좌를 둔 형식으로 입구에 오르다 보면 한송이의 연꽃봉오리를 연상케 한다.

■ '구룡산 왕재, 반룡사'=다음 순례지는 반룡사다. 경산 용성면 구룡산에 자리잡은 이 사찰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그의 왕후가 딸 요석공주와 손자인 설총을 만나기 위해 친히 납신 '왕재'로도 유명하다.

반룡사는 매년 '원효·설총·요석공주 대제회'를 열어 그들의 원혼을 달래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제사 뒤 구룡산 왕재를 오르는 맨발 산행은 원효와 어린시절을 보낸 설총, 부귀영화를 뒤로한 채 왕궁을 떠나온 요석공주와의 만남을 기릴 수 있어 뜻 깊다.

특히 산행이 끝날 무렵 사방이 트인 반룡사앞 마당에 드리워진 낙조는 취재진을 순식간에 환희지(歡喜地·기쁨의 자리)로 빠지게 만들었다. 환희지는 '깨우침을 얻은 법신보살이 보게 되는 천국으로 들어가기 직전의 자리'를 뜻한다. 낙조를 보며 요석공주와 원효스님의 사랑이 어느 정도였을지 절로 상상이 된다.

앞으로 해가 지고 뒤로 달이 뜨는 정 남향에 자리잡은 반룡사는 고려시대의 석학 이인로(李仁老·1152~1220)가 낙조의 아름다움을 '산거'라는 시로 노래했을 만큼 절경이다.

반룡사의 또다른 자랑거리는 사찰음식 식재료다. 좋은 기와 땅과 볕과 물이 만들어낸 식재료여서 사찰의 음식 맛이야 두말할 나위 없이 좋다.

반룡사의 주지 혜해스님은 "원효와 설총, 요석공주의 행적이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구룡산 왕재에 관한 이야기는 모두 역사적 사실이지만 설화적 전설로 치부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 경산 반룡사의 낙조 전경.

■ '팔공사 연꽃위의 마애여래좌상'=아쉬움도 잠시, 취재진은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팔공산에 숨어있는 또다른 보물을 찾아 이동했다. 산길을 올라 산 중턱에 도착하자 깎아지른 바위에 부처님이 앉아계셨다. 아름다운 연꽃 속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부처를 조각한 마애여래좌상은 국내에선 드물게 연꽃의 연경(꽃대)이 조각돼 있어 그 가치가 독특하다.

그 아래 있는 원효암에서 원효가 의상과 중국유학을 논의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이곳 동쪽 산 기슭에 원효가 수도했다는 석굴과 삼복더위에도 얼음같이 찬 약수가 나온다는 '냉천사'가 있다. 팔공산의 물은 시원하기도 하지만 장군수라고 불릴 만큼 몸에 좋다기에 취재진은 약수를 한 잔씩 나눠마시고 발길을 경주로 돌렸다.

취재팀은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시간임에도 원효가 문무왕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중창한 경주 기림사로 향했다. 이 절은 단청을 칠하지 않아 수수한 빛깔 그대로 고찰의 기품이 느껴지며 지붕과 기둥 모양의 선과 결 그 자체로 아름다웠다. 대적광전과 그 양옆의 진남루, 약사전 건물 가운데는 여러 갈래의 가지가 밑둥에서부터 부채꼴 모양으로 뻗어오른 나무가 한 그루 서있고 그 나무 주변에 세 개의 돌이 마치 의자처럼 둘러 있었다. 그 돌에 원효와 의상, 혜초가 마주 앉아 이야기 하는 듯하다.

원효 트레일 첫날, 오늘 하루 동안 넘나든 천년의 시간이 새삼 아득해진다. 돌아보니 무심한 우리만 그냥 스쳐지났을 뿐 천년전의 원효는 경산이라는 작은 도시안 사찰에서, 산에서, 길 이름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 경산 팔공산의 원효암 전경.

※ 인터뷰 / 김종국 前 경산시립박물관장

"동화스러운 설화 10여편 탐구…"

"원효에 관한 설화가 없었으면 우리 역사의 상당부분이 복원은커녕, 우리에게 존재하지조차 않았을 것입니다."

'경산의 원효박사' 김종국 전 경산시립박물관장은 "신라역사는 고려나 조선시대의 역사에 비해 턱없이 빈약한 만큼 원효의 일대기 또한 정확한 고증자료가 존재하지 않아 대부분 추정으로만 복원이 가능하다"며 이같이 밝혔다.


김 전 관장은 "경북 경산은 원효의 출생지이지만 활동했던 곳이 아니라 간과되기 쉽다"며 "그러나 경산에 전해지는 10여개의 원효 설화는 그 분의 일대기를 추정할 수 있는 출발점이기에 큰 의미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설화는 언뜻 듣기에 비현실적인 내용이 많지만 신비스럽고 동화같은 스토리 속에 당대의 정치경제 환경과 설화의 주인공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내용을 포함하는 경우가 많다"며 "불지촌이라는 밤나무 아래서 원효의 어머니가 원효를 출산 하자 오색구름이 땅을 뒤덮었다는 설화가 대표적인 예"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20년 넘게 원효에 관한 설화를 연구해 온 김 전 관장은 마지막으로 "설화는 우리의 문화와 역사가 담겨 있는 자랑스러운 구전역사이므로, 후손인 우리들은 이를 발굴, 전승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강조했다.

사진/조형기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