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년대 스포츠를 이끈 고교 야구
경인지역에서 고교 야구의 인기는 당시 어느 종목에 견주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우선 인기 몰이는 인천고가 먼저 시작했다. 1952년부터 3년간 인천고는 전국 무대를 휩쓸면서 구도(球道)라는 명성에 맞는 성적을 냈고 이어 동산고가 각종 전국 대회를 휩쓸면서 그야말로 경인지역 야구 전성시대를 열어젖혔다. 이랬던 분위기는 60년대에도 계속 이어졌다.
1961년 8월 동산고가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데 이어 같은 해 10월 서울에서 열린 제42회 전국체전에서도 고등부 야구 우승을 차지해 경인지역 국민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궜다.
더불어 전국 4대 도시 고교야구대회에 인천고와 동산고가 인천 대표로 출전하며 일반 시민들의 야구에 대한 관심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했다. 전국 4대 도시 고교야구대회는 서울과 인천, 대구, 부산 등 4대 도시의 대표팀이 출전해 지역의 명예를 걸고 결전을 벌였던 것으로 지금의 왕중왕전과 같은 성격이었다. 사실 이 대회는 인천고가 1954년 휴전 이후 부활된 제9회 청룡기 대회와 제8회 황금사자기, 제35회 전국체전에서 모두 우승한 것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50년대에는 매년 정기적으로 개최되던 것이 60년대 들어 비정기적으로 열렸고 70년대에는 '인천시장배 4대 도시 대회'로 이어지다가 사라졌다. 제8회 대회는 경인일보의 전신인 인천신문사와 경기도야구협회가 공동으로 대회를 개최해 야구 열기가 계속 이어져 나갈 수 있도록 했다.
당시 일본에서 귀국해 한국 야구에 진출했던 김성근 SK감독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김 감독은 "한국 야구는 인천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0~60년 인천고와 동산고의 지역 라이벌전은 경인지역을 넘어 전국적인 관심거리였다.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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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스포츠 사에서 가장 어두웠던 60~70년대
경제개발이 한창이었던 60년대와 70년대에는 올림픽과 아시안게임,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친 스타플레이어들이 많지 않았던 시기다. 먹고 살기도 힘들었던 시대인 60년대와 70년대에는 전문적인 스포츠 선수를 꿈꾸는 선수들조차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학교 스포츠를 중심으로 아마추어 스포츠에 대한 변화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대회는 경인일보의 전신인 인천신문사의 창립과 함께 시작된 '제1회 교육감기 쟁탈 도내 국민학교 대항 핸드볼대회'다.
대한핸드볼협회가 주최하고 경기도핸드볼협회와 인천신문사가 주관한 이 대회는 선수 발굴과 저변 확대라는 측면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지역별 '교육감기 쟁탈 국민학교 대항 연합 체육대회'의 운영도 당시 학교 스포츠와 관련한 기사 중에서 빼놓고 보지 말아야할 기사다. 교육계에서는 '교육감기 쟁탈 국민학교 대항 연합대회'의 개최로 당시 체육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사회적인 분위기를 개선하고 유망주 발굴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69년도에는 상인천중학교에서 야구 선수 발굴을 위해 연식 야구대회도 개최했는데 때로는 교육청과 지역 신문이, 때로는 각 학교별로 대회를 개최해 선수 발굴에 힘썼다.
이 외에도 지역 스포츠 붐을 일으키기 위해 국제 대회도 열렸다. 1968년에는 일본 와세다 대학교 야구부와 미국 빅토리아농구단이 경기도청이 있었던 인천을 방문해 지역 팀과 경기를 가졌다.
또 1969년에는 경인일보사의 전신인 경기연합일보사가 주최한 한일여자대학 초청 친선 농구경기가 열렸다. 한국 대표팀으로 한양대학팀이, 일본 대표팀으로는 안죠학원대학팀이 각각 참여해 친선 경기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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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
# 소년체전의 시작과 경인지역 학교스포츠
학교 스포츠가 본격적으로 안정을 찾기 시작한 것은 1972년 제1회 전국소년체육대회가 시작되면서부터다. 전국소년체육대회의 개최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도 있지만 대회가 열리면서 유망주 발굴에 대한 체계가 잡힌 것도 사실이다.
경인지역은 1972년 서울에서 열린 제1회 대회에서 종합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첫 대회의 정식 종목은 육상, 수영, 축구, 야구, 테니스, 연식정구, 농구, 배구, 탁구, 태권도, 핸드볼 등 19개 종목이었다. 첫 대회에서 3위라는 준수한 성적을 올린 경기도였지만 지역 학교 스포츠가 자리잡지 못해 제2회 대회부터 제5회 대회까지 3위권 밖으로 밀려나며 부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77년 서울에서 열린 제6회 대회에서 또다시 3위에 이름을 올렸지만 또다시 충청북도와 충청남도, 경상북도, 서울 등에 밀려나며 상위권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1981년 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되며 경기도에서 분리됐고 열악했던 학교 체육은 두 지역의 분할로 더 열악해질 수밖에 없었다. 비로소 경인지역 체육이 한국을 이끌 유망주를 육성하게 된 것은 80년대 중반부터다. 1985년 경상북도에서 개최한 제14회와 1987년 부산 경남 일대에서 열린 제16회 대회에서 경기도가 종합 2위에 오르며 신흥 스포츠 도시로 부상했다.
이후 대회에서는 종목별 종합시상과 개인시상식만으로 치러지면서 지역별 공식 집계가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현재 체육계에서는 한국 스포츠를 이끌 유망주의 산실로 경인지역 스포츠를 꼽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