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일보=김선회기자]그리스 아테네, 이탈리아 로마, 이집트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고도(古都)의 하나로 꼽히는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은 중국 뿐 아니라 세계 유명 여행지의 하나로 매년 수십만명의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이곳은 기원전 202년 전한(前漢)의 수도가 돼 장안(長安)이라 불렸으며, 총 13개 왕조가 수도로 삼았을 만큼 역사, 문화, 경제, 교통이 발달했던 곳이다. 시안에는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있지만 이곳을 가장 유명하게 만든 건 역시 '진시황릉'과 '병마용'이다.
# 불세출의 '황제(皇帝)'가 잠든 황릉
많은 사람들이 진시황릉과 병마용을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이 둘은 각각 따로 존재하며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다. 우선 진시황릉은 중국 최초의 황제인 진시황제 (秦始皇帝)가 잠들어 있는 무덤으로 시안에서 동쪽으로 35㎞ 떨어진 린퉁현(臨潼縣) 여산(驪山) 남쪽 기슭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병마용(兵馬俑·병사와 말을 본뜬 인형이라는 뜻)'이라 부르는 병마용갱(兵馬俑坑)은 그와 1.5㎞ 정도 떨어져 있으며 1974년 시안 동쪽 외곽에서 발견돼 1987년 진시황릉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학자들은 진시황릉과 병마용이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둘은 무관한 것이 아니며, 병마용이 진시황릉을 보호하는 일종의 지하관문과도 같은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막상 진시황릉 앞에 도달하면 왕의 무덤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야산에 가깝다는 느낌이 든다. 우리의 조선왕릉 봉분 한개와는 비교도 안되고 경주에 있는 신라왕릉 보다도 몇십배 크다. 그도 그럴 것이 봉토 높이가 76m이고, 동서 폭이 345m, 남북 길이가 350m에 이르는 정방형의 거대한 산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규모면 이집트 쿠푸왕의 피라미드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큰 무덤이라는 표현이 과장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관광객들이 진시황릉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수백개의 계단을 따라 무덤을 오르는 것뿐이다. 정상을 오른다 해도 작은 기념품점과 진시황에 대한 약간의 기록이 적힌 안내표지가 있을 뿐이다. 때문에 그 위용에도 불구하고 뭐하러 힘들게 산에 오르냐는 불평을 하는 관광객들도 더러 있다. 중국은 현재의 기술로는 진시황릉의 완전한 복원이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전면적인 발굴을 유보하고 있으며, 최근 들어서는 이 일대를 '진시황릉유적공원'으로 지정해 현재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여기에는 보다 전문적인 유적박물관과 전시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 희대의 폭군인가 위대한 군주인가
진시황제는 불로불사(不老不死)에 대한 열망이 컸으며, 수양제(隋煬帝)와 더불어 중국 역사상 최대의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진시황제를 단순히 '폭군'이라는 두 글자로 정의를 내린다면 그것은 그에 대한 지나친 폄하다. 진시황제는 BC259년 조(趙)나라 수도인 한단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정(政)이다. 아버지인 장양왕이 죽자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즉위했으며, 기원전 221년 한·조· 위나라 등 총 6개의 제후국을 모두 제압하고 중국 최초의 중앙 집권적 통일제국인 진(秦)나라를 건설했다.
하지만 중앙집권 확립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진시황제는 모든 지식은 국가에서 관리하며 민간에서는 의약, 점술 및 농사 관련 서적 이외에는 30일이내에 모두 불사르도록 천하에 공포했다. 이것이 바로 분서갱유의 '분서(焚書)' 사건이다. 또 신선을 구하고 불로장생을 꿈꾸던 자신을 농락한 죄목으로 도사(道士) 및 관련 유생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해 모두 460명에게 사형을 내린다. 이들은 모두 수도인 함양(咸陽·현재의 시안)에서 매장당했으며, 이것이 바로 '갱유(坑儒)' 사건이다.
이렇듯 분서갱유로 인해 자신의 명예에 흠집을 내긴 했지만, 진시황제는 분열된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황제제도와 군현제의 정착, 문자와 도량형을 통일해 이후 2천년 중국 왕조의 기본틀을 만들었다. 전근대의 중국, 특히 유학 관료들은 진시황제를 폭군이라고 몰아세웠으나, 1974년 병마용 발굴 이후부터는 진시황제의 진취성과 개척성에 초점을 맞추어 재평가하려는 시도가 학계에서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 아직도 신비에 둘러싸인 진시황릉
우리가 현재 진시황릉의 내부를 눈으로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의 기록을 통해 황릉 안의 모습을 어느 정도 추정할 수는 있다. 사기에 의하면 진시황제는 즉위하자마자 여산에 자신의 수릉(壽陵·임금이 죽기 전에 미리 준비해 두는 무덤)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70여만명을 차출해 작업을 독려했는데, 땅을 깊게 파고 들어가 구리 녹인 물을 사방에 부어 방수처리를 한 다음, 그 안에는 궁전 모형과 문무백관의 자리를 만들고 진귀한 보물로 가득 채웠다. 그리고 도굴의 방지를 위해 화살자동발사기를 설치하고 무덤 주위에 강을 만들어 수은을 쉴새 없이 흐르게 했다. 무덤의 위쪽에는 일월성신(日月星辰)을 그려놓고 바닥에는 중국의 지리를 표기했으며, 인어(人魚·현재의 듀공으로 추정)의 기름으로 촛불을 밝혀 오랫동안 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다. 2대 황제 호해의 명령으로 시황제의 후궁 중에서 처녀들은 모두 순장시켰으며, 시황제의 관을 안장한 후에 보물의 위치와 각종 기계 장치를 제작했던 기술자들은 비밀을 누설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묘실의 복도를 막고 외문을 봉쇄해 단 한 명도 빠져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런 뒤 묘소위에 나무를 심어 언뜻 봐서는 보통 산처럼 보이도록 마무리 했다고 한다.

사마천의 이런 기록은 그동안 학자들 사이에서 진위 여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고대인의 과학, 건축기술로는 그런 일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중국학자들이 1962년부터 진시황릉을 본격적인 답사를 시작한 이후, 수십년간 물리탐사와 항공 관측, 지질에 대한 원격탐사를 실시한 결과 사마천의 기술이 결코 허황된 과장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2007년 중국 탐사반은 진시황릉의 봉토 35m 아래 지하궁전이 존재하며 궁전 주변에는 성벽이 둘러싸여 있다고 발표했다. 또 황릉 지표면의 수은 함량을 조사한 결과, 정상보다 20~30배 많음을 확인했다. 사기의 '수은이 흐르는 강을 만들었다'는 내용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또 묘실이 물에 잠기지 않고 완벽하게 보존돼 있으며 지하궁전에는 금속 부장품이 있음을 보여주는 조사 결과도 얻었다고 밝혔다.

※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