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라의 천년고도 경주를 대표하는 불국사는 한국의 불교를 대표하는 사찰이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기도하다.불국사는 부처님의 화엄장엄세계인 불국토를 현대의 사바세계에 화현시킨 신앙의 완성체로서 경내의 수많은 국보급 문화재와 보물들은 매년 수백만의 내·외국인 방문객을 불러모으고 있다.

[경인일보=글┃전상천·민정주기자]원효의 대승불교가 만개한 경주. 경산에서 시작된 원효의 발길이 민중을 만나 '대승불교'를 꽃피웠던 경주는 '불교'와의 조우를 통해 한국 정신문화의 뿌리가 됐고, 그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문화유산의 '보고(寶庫)'다.

경주 길가의 기왓장 한 조각에서도 신라 천년의 벅찬 숨결이 느껴지고, 분황사 등 경주 곳곳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귓가에 바람으로 전하는 '무애의 도' 즉, 원효의 정신이 서려있다. 일출이 솟기도 전에 취재진을 뒤흔들어 깨운 원효는 새벽과 한낮의 경주, 그리고 오후의 경주의 맨낯을 보여주며 "왜 '민중'(民衆)에, 그리도 천착했는지를…", "이 시대에 이 길로 우리를 불렀는지"를 끊임없이 속삭였다.


■ 민중에게 '해' 처럼 다가선 원효

경주 서라벌 도요지에서 첫날 밤을 지낸 취재진이 무거운 눈꺼풀을 걷어낸 것은 8월 24일 새벽 4시 30분. 토함산 새벽 연무를 뚫고 새색시마냥 제모습을 드러낸 일출은 보는 이의 가슴에서 '붉은 심장'이 돼 버렸다. 먼 바다 저편에서 수십여개의 산 봉우리를 넘어서 우리를 뒤덮은 햇살은 그 자체가 희망이고, 열정이 돼 우리의 기억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이어 찾은 불국사는 산사의 다른 절들과 차별화 된 웅장함이 느껴진다. 지금도 수많은 불제자 등이 즐겨 찾는 이 곳은 한번쯤은 학창시절 수학여행이나 MT 등을 통해 찾아본 곳일 게다. 영화 '신라의 달밤'이 공전의 히트를 친 이유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곧이어 찾은 곳은 연등이 하늘을 가릴 것 같았던 분황사. 취재진이 찾은 날은 공교롭게도 불가에서 부처의 탄생과 출가, 성도, 열반일을 합한 4대 명절에 더하여 우란분재(盂蘭盆齋·음식을 죽은 자의 영혼에 바쳐 거꾸로 매달려진 고통을 구한다는 뜻)로 섬기는 5대 명절인 '백중'이라 사람들로 크게 붐볐다.

▲ 황룡사 9층목탑은 높이 82m로 아파트 27층 높이에 달한다.신라 변방의 침해를 누르고자 건립된 목탑은 1238년(고려 고종25)몽골 침략으로 인한 병화로 불타 버렸다.

중국 유학을 포기한 원효가 오랫동안 수행한 분황사에는 '혈사'(穴寺)에서 열반한 원효의 유해로 만든 소상이 안치돼 있었다. 고려시대에 화쟁국사(원효를 일컬음)비가 세워진 곳이기도 한 분황사의 석탑은 관광객에게 가장 인기있는 보물이다.

동쪽으로 나 있는 문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황룡사(皇龍寺) 터가 보인다. 신라 진흥왕 14년(553) 월성(月城)의 동북쪽에 새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사찰로 고쳐 지었다.

선덕여왕 14년(645)에 백제의 기술자인 아비지(阿非知)를 초청, 93년만에 완성했다는 82m높이의 황룡사 9층 목탑은 지금 아파트 27층 높이에 달할 정도로 웅장함을 자랑했다. 천년의 시·공간을 초월한 9층 목탑은 건축기술이 신이(神異)에 가까운 것임을 웅변해 준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현대 기술로도 알 수 없는 불가사의다. 그만큼 복원도 어려운 황룡사지 한복판에서 하늘과 좌우를 대보는 것 그 자체가 전율을 느끼게 한다.

원효는 중년 이후를 백정, 술장사들과 어울려 살았다. 목이 고부라진 호롱병을 들고 저잣거리에서 춤을 추며 이를 거리낌 없음 즉, '무애'(無碍)라 했다. 경론에서 노래 구절을 따와 무애가를 만들어 부르며 글을 모르는 대중에게 불교의 교리를 전했다. 경주에서 대승불교가 꽃을 피운 것은, 오랜 전쟁으로 고통을 받던 대중의 마음을 달래주려던 원효의 불심,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토함산은 신라의 얼이 깃든 영산으로 일명 동악이라고도 불린다.석굴암과 함께 불교의 성지이자 문화재의 보고이며 토함산위로 떠오르는 해돋이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일으킬 정도로 벅찬 감동을 자아낸다.

■ 선덕여왕 촬영지, 오봉산 주사암

취재진은 685m 높이의 오봉산 정상 바로 아래 주사암으로 향했다. 원효의 절친한 지기인 의상이 창건한 천년고찰인 '주사암'은 "산성 안에 이 사찰을 두면 신라는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이 전해진다. 천년 신라가 멸망한 지금, 절벽처럼 깎아 세운 오봉산 바위에선 인기리에 종영된 드라마 '선덕여왕'의 마지막 장면 촬영이 이뤄져 감회가 새롭기만 하다.

취재진이 주사암을 찾은 까닭은 오봉산 정상에서 경주시내까지 뻗어 내려간 길을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Tip' 때문이었다. '길'을 보여주기 위해 백마디 말보다 한장의 사진,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직업적 소산 때문이다. 취재진은 원효트레일 전일정을 통틀어 오봉산 등정 만큼 가장 힘들고 허탈하면서도 우리의 열정을 열렬하게 뿜어낸 곳은 없다고 생각한다.

융통성 없이 네모 반듯한 네바퀴 기계는 정확히 두 바퀴의 폭 만큼만 허락하는 좁은 산길을 오르고 내리는 동안 지표면의 굴곡보다 더 파괴력 있게 머리와 허리를 잇따라 강타, 체력 소모가 심했다.

▲ 백중 기념 연등이 빼곡히 걸린 경주 분황사.

취재진은 '원하는 길'을 찾기 위해 능선을 따라 우뚝 솟은 바위산과 깎아지른 절벽 바위를 기어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두시간 가까이 '그림같은 장면'을 좇아 산을 휘젓던 취재진은 자연의 심술에 결국 굴복하고 말았다. 허탈했다. '길'은 거기에 없었던 것이다. 대중을 위한 불교를 만들려던 원효는 그럼, 얼마나 많이 좌절했을까란 생각에 웃음이 떠올랐다.

동시에 취재팀은 '길'을 찾아야 한다는 일념에 얼굴에 알알이 맺힌 땀방울에도 서로를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받침목이 돼 산 위로 올려주고 내려주며 간 '동행' 길에서 우리는 한결같이 원효를 떠올렸다. '대중을 위한 불교'를 주창한 원효를 이 시대에 다시 부활시키겠다는 우리의 의지는 더욱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 혜공과 공력을 겨루던 포항 오어사

경주서 포항까지 한달음에 내달려 도착한 '오어사'. 옛이름은 항사사(恒沙寺)로 혜공이 머물렀다. 이 절을 끼고 도는 저수지인 오어지에는 설화가 서려 있다. 원효는 여러 불경의 소(疎)를 지을 때마다 의문이 생기면 늘 혜공을 찾아와 묻고, 농담도 즐겼다. 어느날 원효와 혜공이 시냇가에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돌 위에 대변을 본 뒤 '너는 똥을 누고 나는 고기를 누었다'며 서로의 심력을 겨뤄본 곳이다. 이 때부터 '내(吾) 물고기(魚) 절'이란 뜻을 따라 오어사라 불렀다. 오어지를 가로지른 다리를 건너 길을 따라 걸으면 원효암에 도달한다.

오어사는 훗날 대구 동화사에서 중건했다고 한다. 거기서 천년사찰인 동화사가 우리를 천년전부터 부르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면 오산일까….

※ 인터뷰 / 김호상 신라문화유산연구원 조사연구실장

"문화재 복원은 곧 역사를 복원하는 일인 만큼 아주 중요합니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 김호상 조사연구실장은 "과거 우리 선조들이 만든 예술품과 그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 등을 찾아내 복원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고, 후손들에게 풍부한 전통문화를 물려주는 일"이라며 이 같이 밝혔다.


김 실장은 "경주는 매장문화재 발굴 가능성이 있는 곳이 2천360여곳에 달하고, 지정문화재만 316점을 보유한 보물창고"라며 "경주시가 추진중인 역사도시조성계획에 따라 원효와 요석공주가 만났다는 월정교가 복원중"이라고 덧붙였다. 또 "황룡사 9층 목탑의 경우도 당시 건축기법이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어떤 방법으로 복원할지에 대한 논의만 계속되는 등 제자리 걸음 상태"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특히 김 실장은 "복원된 문화재가 원형을 간직한 문화재보다 가치가 덜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지만 복원코자 하는 건물 등 유적에 대한 고증자료가 없는 만큼 복원 당시 당대인들의 최고 기술이 집약돼 의미가 크다"며 "문화재가 오랜 시간이 지나면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우수한 복원은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의미를 뒀다.

※ 사진┃조형기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