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계 8대 불가사의 '병마용'
양씨 일행이 발견한 곳은 바로 진시황의 병마용 종장갱(從葬坑·부장품을 넣어둔 구덩이)이었다. 진시황릉의 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병마용갱'은 그 안에 들어있는 병마용들의 위용만으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중국 고대 병종의 배치 및 병기장비, 전략과 전술을 잘 보여주는 사료로서의 가치도 매우 크다. 찌를듯한 기세를 지닌 위풍당당한 병마용 대군은 그 옛날 한(韓)·위(魏)·초(楚)·연(燕)·조(趙)·제(齊) 등의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중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던 진시황제의 정예부대를 상징한다. 1974년 1호 병마용갱의 발견에 이어 1976년 1호갱의 북쪽에서 2호갱과 3호갱이 각각 발견됐다. 1~3의 숫자는 발굴 순서에 따라 붙인 것이다. 중국은 1979년 병마용갱 유적지 바로 위에 '진시황병마용박물관(秦始皇兵馬俑博物館)'을 지어 관람객들이 이미 발굴된 병마용의 모습과 현재의 발굴 현장을 모두 지켜볼 수 있게 했다.
병마용갱의 발견은 중국을 놀라게 했고, 나아가 전세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중국 자체 통계에 따르면 병마용 개방 이후 유치된 관광객은 5천만명에 달하며 그중 해외 관광객이 500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이때문에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푸틴 전 러시아 대통령 등 세계 각 나라의 지도자들도 병마용을 관람하곤 했다. 이들 중 특히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은 1978년 병마용을 관람하고는 "현존하는 세계 7대의 불가사의가 진시황 병마용의 발견으로 인해 8대 불가사의가 됐다"며 "피라미드를 보지 못했으면 진정으로 이집트를 여행한 것이 아니고, 병마용을 보지 못했다면 진정으로 중국을 여행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이 널리 퍼짐에 따라 병마용갱은 '세계 8대 불가사의'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됐으며, 1987년 병마용갱을 포함한 진시황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계속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병마용 1호·2호·3호갱
1호갱은 3개의 갱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고, 규모가 크다. 길이 230m,폭 62m의 크기를 자랑하며 전시되고 있는 병마용만 해도 6천여점으로 당시 중국 1개 군진 규모의 병력이다. 1호갱의 북동쪽으로 20m 떨어진 2호갱은 보병과 기병, 궁노수, 전차 등 여러가지 병종으로 혼합적으로 편성한 군 진형이다. 각종 무사가 90여점이 있고, 전차용 말이 350여마리, 기병용 말이 116마리, 전차가 89대 있다. 손자병법에는 "병세가 쉬울 경우 전차를 많이 사용해야 하고, 아주 위태로울 경우 궁노(弓弩)를 많이 사용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는데 이 말처럼 2호갱은 당시의 군사 사상과 용병 원칙을 생동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2호갱에서 동쪽으로 120m 떨어진 3호갱은 현재 발굴된 3개의 갱 중 가장 작은 규모인데, 'ㄷ자' 모양을 하고 있다. 현재까지 3호갱의 발굴품은 도용(陶俑) 66점과 전차 1대에 불과하다. 1·2호 갱에 비해 비록 규모가 작고 출토된 유물은 적지만 3호갱은 1·2호 갱의 지휘부대인 것으로 추정된다.

병마용갱에 서 있는 도용들의 크기는 1.75~1.96m, 도마(陶馬)의 높이는 1.5m, 길이 2m로 실물보다는 조금 크게 만들어졌다. 병사들은 겉옷만 입은 것과 갑옷을 입은 병사로 구분돼 있다. 그리고 병사들의 얼굴은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생김생김이 제각각 다르다. 도용들은 통째로 빚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전국의 유명 장인들에 의해 머리, 몸통, 팔 다리가 각각 제작된 후 결합된 것인데, 최근 역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제각기 다른 얼굴을 위해 8종류의 틀이 사용됐다고 한다. 몸의 다른 부위도 각기 여러 종류의 틀이 있어 이들을 조합해 다양한 형태의 병사들을 제작한 것이다. 다만 다리 부분은 대부분 동일한 형태로 같은 틀을 사용해 대량 생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조립을 위해서는 각각의 부분을 맞춘 뒤 다음 과정으로 넘겨주는 생산 공정에 따른 조립 라인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 우리가 몰랐던 병마용의 진실
우리가 흔히 책자나 사진 속에서 볼 수 있는 병마용은 유약을 바르기 전의 도자기 모습처럼 '흙빛'을 한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원래 병마용은 대부분 채색이 돼있었다. 병사들의 머리는 검정색, 얼굴은 연한 오렌지색으로 칠해졌으며, 갑옷과 기타 장신구들도 군청색과 초록색, 흰색과 빨간색 등으로 색깔이 입혀졌었다. 그리고 병사들의 손에는 무기가 다 들려 있었는데, 지금은 대부분 빈손이다. 어찌 된 영문일까?
역사학자들은 사마천의 '사기(史記)'와 반고의 '한서(漢書)', 역도원이 쓴 '수경주(水經注)' 등을 종합해 볼때, 진나라 말기 진의 수도 함양을 공격했던 항우(項羽·BC 232~BC 202)와 그의 군대 때문에 이렇게 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항우의 군대는 진나라를 침범하자마자 아방궁(阿房宮)을 비롯해 진시황릉과 관련된 유적 여러 곳을 불태웠다. 황릉은 심하게 파헤쳐지고, 병마용 갱을 발견한 군사들은 갱도에 불을 지르고 도용들을 닥치는대로 부쉈다. 게다가 도용들이 들고 있던 실제 병장기들을 모조리 수거해 자신들의 무기로 재사용한다. 이렇게 안 좋은 상태로 매장된 병마용들은 2천년 넘게 땅속에 묻혀있으면서 침습(浸濕)을 받으며 다시한번 수난을 당했던 것이다. 실제로 병마용박물관에서 발굴 현장을 둘러보면 목조로 된 기둥들이 새카맣게 불에 타고 그을린 흔적을 찾아볼 수 있어 역사서의 신빙성을 뒷받침한다. 어쩌면 우리가 오늘날 이 정도의 병마용이라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이라고 여겨질 정도다.

그런데 본격적인 병마용의 발굴이 시작되면서 그나마 채색이 남아있던 도용의 색깔들도 갑작스런 햇빛 노출과 산화, 발굴·보존 기술의 부족으로 대부분 바래져 버렸다. 시안 시내에 위치해 있는 '산시역사박물관(陝西歷史博物館)'에 가면 아직 색깔이 남아있는 도용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마저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중국 정부는 한동안 진행되던 병마용 발굴을 20여년간 중단했으며, 문화재 발굴 기술과 과학 기술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렀다고 판단된 2009년 6월 13일에야 발굴을 재개했다. 아직까지 병마용갱은 확인된 규모의 3분의 1밖에 발굴되지 않았다. 병마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