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재는 신라 아달라왕(阿達羅王)3년(서기 156년)이 북진을 위해 개통한 길로 백두대간 계립령에 해당된다. 경북 문경과 충주를 잇는 가장 빠른길로 남한강 수운과 연계해 한양을 잇는 국방상 중요한 길이지만 문경새재 개통으로 옛길로서의 역할을 넘겨주고 지금은 자연생태 탐방길로 찾는이들이 늘고 있다.

[경인일보=]길은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면 잊혀진다.

원효의 길이 천년의 시간이 지나 지금 우리네 기억에서 '박제'가 됐듯이, 옛 길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월악산 국립공원을 관통하는 문경의 고갯길 '하늘재'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 문헌상 가장 오래된 길로 기록된 하늘재는 신라시대부터 고려~조선시대까지 문경서 충주를 지나 서울, 한양·개성을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할 교통로다. 하지만 조령문, 문경새재 도로가 나기 전까지 사람이 다니던 이 길은 지금, 잃어버린 역사의 길이다.

원효가 지란지교(芝蘭之交)인 의상대사와 2차례나 함께 넘었던 문경 하늘재는 우정의 길이다. 불심의 높고 낮음을 경쟁했던 두 사람은 전국을 이분(二分), 천년사찰을 세웠던 평생지기다. 한양길에 오른 수많은 사람들이 이 고갯길에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발길을 멈춘채 눈물을 참고, 고향 부모님을 향해 절을 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천년전 이 고갯길을 넘었던 원효·의상의 꿈이, 그 황금같은 우정이 아련하기만 하다.

▲ 괴산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불상이 앉아있는 대좌(臺座)와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가 모두 갖춰진 완전한 형태의 불상으로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 청운의 꿈을 좇는 길, 문경새재

문경은 도시 전체가 우리나라 문화지리의 보고이자 박물관이다.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의 소통로로서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로 불리던 '문경새재'(명승 제32호)가 있다. 또 우리나라 최고(最古, 서기 156년 개척)의 고갯길인 '하늘재'말고도 옛길의 백미(白眉)이자 한국의 차마고도로 일컬을 수 있는 '토끼비리'(명승 제31호) 등 국내의 내로라(?)하는 길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 태종 14년(1414)에 개통된 이후로 약 500년 동안 한양과 영남을 잇는 주요 교통로인 문경새재. 당시 한양에서 동래까지 가는 고개는 모두 3개로 추풍령과 문경새재, 죽령이 있었으나 문경새잿길이 열나흘 길로 가장 빨랐다 한다. 유독 과거시험 치르 가는 선비들이 '장원급제 길'로 부르며 문경새재로만 한양으로 가기를 고집한 데는 추풍령은 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은 대나무처럼 미끄러진다는 점에서 회피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문경새재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 옛 길에는 이 곳을 지나는 길손들 중 한 개의 돌이라도 쌓은 선비는 장원급제하고, 몸이 아픈 사람은 쾌차하고,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은 옥동자를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소원성취탑에는 지금도 사람들의 기원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문경새재의 옛 이름이 기쁜 소식을 듣다라는 의미의 '聞慶'인 것을 보면 그저 떠도는 풍문에도 진실이 담겨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문경새재국립공원의 제1관문부터 제3관문까지 이어지는 10㎞구간에는 걷는 즐거움에 푹 빠진 사람들로 가득했다. 연인끼리, 가족끼리, 어릴적 친구끼리, 자매처럼 다정한 수녀님들도 맨발로 혹은 서로를 의지하며 걸었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도 오랜 여정을 함께 한 이들의 발길을 멈추게 만들진 못했다. 길 위에 서 있는 이들은 '잠시 쉬어가면 된다'며 전혀 개의치 않은채 얼굴마다 행복감이 충만했다.

새재 길엔 여궁폭포와 용추계곡 등의 아름다운 자연 경관과 함께 원터, 교구정터, 성황당과 각종 비석들이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고, 최근엔 KBS 촬영장이 들어서 관광명소로 인기다.

'옛길 박물관'을 들러 사라진 옛길과 일제시대 이후 잃어버린 옛 지명, 백두대간까지 길의 문화상을 보여줬다. 각종 여행기와 풍속화, 문경의 여러 문화 유산을 한 눈에 견식할 수 있어 좋았다.

▲ '문경새재'는 조선태종14년(1414년)에 개통된 도로이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관도로 주홀관, 조곡관, 조령관등 3개의 관문과 원(院)터등 주요 관방시설과 정자와 주막터, 성황당과 각종 비석등이 옛길을 따라 잘 남아있는 역사적·민속적 가치가 큰 옛길이다.

■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기다림의 길, 하늘재'

백두대간의 수많은 고갯길 중 가장 많은 전설과 이야기가 얽혀있는 문경하늘재. 월악산 국립공원내 역사·자연생태관찰로 보존된 이 길은 신라 제8대 아달라왕 재위 3년(서기 156년)에 북진을 위해 개통된 고갯길로, 경북 문경에서 충주로 나아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하늘재가 끝나는 곳에 있는 충주는 남한강의 수운을 이용해 한강 하류까지 일사천리로 뻗어나갈 수 있는 국방상 전략적 지리 요충지이기에 그 중요성은 한없다.

하지만 하늘재는 조선초 문경새재가 개통되면서 역할을 넘겨 줬고, 지금은 옛 길로 잊혀졌다. 뒤늦게 문화재청이 지난 5월 '하늘재 옛길'을 국가지정 명승 제49호로 지정한데 이어 충청북도가 '자연환경 명소 100선'에 올림에 따라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환경이 세간에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늘재엔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패망의 한을 품고 이 고개를 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국방의 요충지였던 이 길을 통해 달아나야 했던 한 나라의 왕자와 공주의 슬픔이 서려있는 탓인지 취재진이 찾은 하늘재는 나무와 풀벌레가 숨을 죽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고요했다.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 하늘재 길은 비를 물씬 머금은 흙과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풀잎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조차 들리는 듯했다.

말 한마디 없이 묵묵히, 열심히 걷고 있는 발걸음에 꿋꿋이 수천년 산을 지켜오던 자연의 삶을 발견, 감동할 즈음, 눈앞에 '김연아를 닮은 나무'가 서있었다. 한쪽 다리를 머리 위로 높이올려 양 손으로 붙잡고 있는 모양으로 자란 나무다. 그렇게 하늘재 옛길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가 더해졌다.

하늘재를 내려오면 충주 중원 미륵사지 절터내 오층석탑(보물 95호), 석불입상(보물 96호), 삼층석탑, 석등, 귀부(龜趺), 당간지주, 불상대좌 등의 석조 유물과 말과 주막들이 크게 번창한 것으로 추정되는 미륵대원터 등 귀한 문화재를 만날 수 있다.

■ 괴산 칠보산의 각연사

신라 법흥왕 2년인 515년에 유일 스님이 창건한 각연사는 여느 유서깊은 절 못지않게 서려있는 전설이 흥미롭다.

스님은 원래 칠보산 너머의 사동 근처에 절을 짓고자 했지만 아침마다 전날 나무를 다듬고 남은 대패밥을 까치가 물고 날아간 곳을 뒤쫓아가 보니 연못에서 이상한 빛이 나서 들여다보니 석불 한 기가 들어있었다. 이에 스님이 못이 있는 곳으로 절을 옮겨 짓고 석불을 모신 후 '깨달음이 연못의 부처님에서 비롯됐다(覺有佛於)'고 해 각연사란 유래가 전해진다. 보물 제433호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통일신라 말기의 빼어난 불상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충주 수안보 인근에서 취재진은 오랜만에 지우(知友)를 만났다. 지난 시절 추억을 회상하며 세태의 변화를 논하는 등 밤을 지새웠다. 시간을 되돌리지 못하는 아쉬움에 어떻게든 그 순간을 잡고자 욕심을 부린 것이다. 사람의 발길이 닿으면 길이 나고 그곳에는 항상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스며든다.

옛인(人)들은 문경재가 험한 산지형에도 불구,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끝내 길을 냈던 기개가 있었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새로운 도전을 의미한다. 길에서, 중생을 구하고자 미지의 세계로 길을 떠났던 개척자 원효를 만났다.

※ 인터뷰 / 조록환 농진청 녹색관광실장

"다른 문화와 역사 연결… 지역간 소통 '그린로드'"

"원효의 길은 농촌과 농촌을, 마을과 도시를, 전혀 다른 문화와 역사를 지닌 지역 공동체를 연결시켜 주는 '그린로드'입니다."

농촌진흥청 조록환 녹색관광실장은 "그린로드는 새로운 길이 아닌 예부터 농촌 주민들이 건너 마을에 다닐 때 사용한 길을 재발견, 그 길을 따라 농촌문화를 몸소 체험한다는데 여느 길과 다르다"며 이같이 밝혔다.


농촌 발전과 도시인들의 관광욕구를 동시에 충족시킬 그린로드 개발에 주력하고 있는 조 박사는 "농촌지역의 경관, 역사와 문화 자원을 활용해 '보고 느끼고 맛보고 체험할 수 있는' 어메니티의 길, '그린로드'"라고 정의했다. 또 "농업과 농촌, 그곳에서 생을 꾸려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그린로드는 단순히 현존하는 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함께 걸어온 사람들이 만들어온 문화, 역사, 자연, 환경이 녹아 있는 길을 의미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백두대간 등 농촌마을과 별도로 개설, 무관하게 사용되는 길과는 달리 그린로드는 지역농촌문화를 100% 체험할 수 있도록 길 여행객들이 농촌에 머물며 체험할 수 있어 차별된다"며 "길에는 지역농촌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이웃들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녹여져 있다"고 소개했다.

조 박사는 마지막으로 "21세기에 '환경은 곧 우리 사회의 자본'이 되기 때문에 농촌의 아름다운 경관을 따라 걷는 여행길 '그린로드'는 녹색성장의 새로운 틀인 만큼 관심을 가져 줄 것"을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