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글┃박승용·전상천·민정주기자]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깊은 산 작은 샘물에서 발원된 물들이 모여 냇가를, 곳곳에서 모인 작은 물줄기는 강이 되어 흘러간다.
세상의 가장 높은 처소에서 스스로 낮은 곳을 찾아가는 강줄기는 세상의 좋은 것들만 아니라 나쁜 것까지 모두 품어 바다로 모여 너나 없이 하나가 된다.
귀족 출신의 원효도 스스로 서민 대중과 고통받는 하층민 등을 끌어 안기 위해 낮은 곳으로 내려갔다.
요석궁의 과부 공주와 짧은 인연을 맺어 아들 설총을 낳고 스스로 승복을 벗어던진 채 소성거사(小姓居士)를 자처한 그는 지방촌락이며, 시장거리와 뒷골목을 승려가 아닌 세속인의 모습으로 내려가 살아갔다. 자신을 한없이 낮춰 민중의 벗이 된 원효는 가난한 사람과 천민, 거지, 어린 아이들까지 염불을 따라 부르며 정토의 바다로 나아갔다.
'내륙의 바다'라 불리는 충주호를 끼고 있는 충주 창룡사와 석종사, 남한강이 흐르는 여주 신륵사를 찾았다. 그 곳에는 물의 전설과 함께 사찰을 지키고 가꿔온 사람들이 빚어낸 아름다운 정취가 찰랑거렸다. 특히 도자의 고향 여주에선 백성이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함에 '한글' 창제로 사랑을 표하신 세종대왕과 '북벌의 꿈'을 꾼 효종, 그리고 비운의 민비 등을 만나 아픈 역사를 곱씹었다.
■ 충주 금봉산의 쌍절, 창룡사와 석종사
온천의 도시 충주 수안보에서 하룻밤을 유한 뒤 게으름을 탓하며 내달려 간 곳은 창룡사. 충북 충주 직동에 자리한 이 절은 원효가 신라문무왕(재위 661~681)때 지었다. 수행중 잠이 든 원효는 꿈에서 나타난 푸른 용이 여의주를 물고 가는 것을 하염없이 쫓아가던 도중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아 느티나무 아래 우물가에 서 있는 아름다운 처자를 보았다. 그 처자는 지친 원효에게 표주박으로 물을 떠주면서 "이 곳은 참 좋은 곳입니다. 스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하고 물었다. 꿀처럼 단 물을 마신 뒤 잠에서 깬 원효는 그것이 관음보살의 현몽인 것을 알고 꿈속의 장소를 찾아 충주 금봉산 중턱에 아미타불을 모시게 됐다고 전해진다.
어느 사찰이든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니지 않은 곳이 없지만 이곳 창룡사의 경관은 마치 '전설이 현실이 된 것'처럼 천혜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울창한 송림과 온 산을 뒤덮은 낙엽송으로 둘러싸인 창룡사 초입에는 나지막한 언덕, 그 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는 축대에는 잘 정돈된 현대식 가람의 모습을 드러냈다. 경내로 들어서면 자연풍경과 어우러진 전각들의 고풍스러운 자태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사찰 안의 나무 하나, 건물 한 곳까지 정갈하고 예쁘지 않은 곳이 없다. 화단의 나무, 계단의 난간, 건물의 벽면마다 풀이 덮여있어 따뜻해 보이며 풀과 나무를 정갈하게 가꾸어 놓은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 못지않게 사람이 지어낸 아름다움도 보는 사람을 기쁘고 설레게 한다.
이어 발길을 돌린 석종사로 가는 길엔 충주의 명물, 사과나무와 맞닥뜨렸다. 석종사는 훼손된 탑만 남아있던 폐사지에 혜국스님이 지난 2006년부터 재건립을 시작해 최근 완공됐다. 취재팀이 찾아갔을 때는 석종사에 폐사의 아픔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환골탈태의 상태였다. 한 눈에 봐도 깨끗하고 선명하고 반듯하다. 천년고찰의 멋은 없었지만 막 지어낸 산뜻한 사찰은 또다른 느낌을 줬다. 사찰 한 쪽에 300여개가 넘는 장독이 줄지어 있다. 여기에다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환경까지 더해졌으니 부처님께 불공드리는 기쁨도 더하겠다. 금봉산에 나란히 놓인 두 사찰은 자연과 인간이 아름다움을 겨뤄놓은 정취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줘 즐거움도 배가 된다.
■ 생명의 여주 남한강과 신륵사
충주를 벗어나 이천 장호원을 거쳐 취재진이 도착한 곳은 신라 진평왕때 원효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진 여주 신륵사.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던 원효가 7일간의 정성스런 기도를 드리니 못에서 9마리의 용이 승천, 사찰을 짓게 됐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고려말인 1376년(우왕 2), 나옹(懶翁)과 혜근(惠勤)이 머물렀던 200여칸에 달하는 대찰이었던 신륵사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능이 옮겨온 뒤 1472년(조선 성종 3)에는 영릉원찰(英陵願刹)로 삼아 보은사(報恩寺)라고 불리기도 했다.
당초 영릉(英陵)을 여주로 옮기면서 영릉의 원찰로 신륵사를 다시 중건하자는 내용이 담긴 '신륵사중수기(神勒寺重修記)'를 쓴 조선후기 문인 김병기는 "홍수와 범람이 잦은 남한강의 자연환경과 지역적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옛 선인들이 이곳에 신륵사를 세우고 강을 돌본 것에서 생겨난 설화"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신륵사는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치성드리는 마음만으로 지금의 아름다움을 얻은 것이 아니다. 선조의 노력을 이어받아 유산을 지키고 가꾸는 사람들의 노력이 신륵사를, 한반도 곳곳을 장식하고 있는 보물들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이어 찾은 남한강 강줄기는 지금 시민단체와 천주교·불교 등 종교계의 남한강 보 설치 및 모래 준설공사를 반대하기 위한 기지(?)가 자리잡고 있어 세간의 이목이 집중돼 있다. 유려한 산수를 자랑하던 이곳도 외지인들의 발걸음에 시끄럽기 그지없었다. 보 공사를 반대하는 이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 있고, 순찰을 돌던 젊은이들의 검문검색으로 긴박한 순간이 계속돼 긴장감마저 팽팽하게 나돌았다. 스스로 있는 게 자연(自然)인 만큼 그 일부인 강엔 사람의 발길이, 손이 닿지 않은 그 때가 더 좋았으리라….
■ 한글의 세종, 북벌의 효종
남한강 교각을 가로질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왕릉중 대표적인 '세종대왕릉'으로 향했다. 조선 제4대 왕인 세종과 소헌왕후가 함께 모셔진 영릉은 조선시대 최초의 합장릉이다. 호랑이와 양, 말 등의 12지신 동물과 문무대신 석상들이 왕릉을 지키고 있었다.
왕릉에는 재실, 홍살문, 수라간, 정자각 등 왕의 제사를 위한 제반시설이 잘 갖춰져있고 주변 환경도 빼어나 죽어서도 남부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릉에서 700m 정도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왕릉이 있다. 조선 제17대 왕 효종과 인선왕후의 무덤인 영릉(寧陵)이다. 두 개의 왕릉이 하나의 능선에 위·아래로 놓여있다. 이러한 형태의 쌍릉은 조선왕릉 중 최초다. 꽉막힌 영릉이지만 산에서 흘러내려 온 물로 도랑을 내는 등 세심한 주의가 눈길을 끈다.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서 8년간 볼모생활을 한 효종은 즉위 후 은밀히 북벌을 꿈꾼 왕이다.
찬란한 가을 햇볕에 세종·효종 왕릉은 생동감이 넘쳐 아름다워 보였다. 죽은 사람에게도 예를 갖추고 식사를 올리는 산 사람의 정성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냈고 우리에게 여전히 즐거움을 주었다.
햇살이 따갑던 오후 명성왕후 생가를 찾았다. 일제의 한반도 침략에 반대했다가 일본 낭인에 의해서 피 살된 그녀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지만 민족의 슬픈 역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도자의 고향 여주에서 고달사지나 목아박물관 등이나 생활도자 전시관들을 찾아 작은 옹기나 찾잔 등을 골라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고향서 만날 가족과 친구, 연인 등을 위해 작은 선물을 마련하는 것, 그 자체가 행복감을 충만케 한다.
사진┃조형기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