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최해민기자]"기부자가 '우대'는 받지 못하더라도 '박대'받아선 안됩니다."

빈민가 실업자에서 카이스트 박사로, 박사에서 수백억원대 자산가로. 그 길을 열어준 모교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재산을 털어 장학재단에 기부했다 100억원대의 증여세를 물게 돼 세무서와 법정 공방을 벌이고 있는 기부천사 황필상(64·전 카이스트 교수, 현 수원 교차로 회장·구원장학재단 이사장) 박사.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역전의 역전을 거듭한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다.

일제시대 당시 경북 예천의 한 면사무소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중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옥고를 치른 아버지 슬하에서 4남3녀 중 막내로 1947년 태어난 황 박사.

그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정말 배고프고 가난했던 시절'이라고 잘라 말했다. 가난때문에 이사를 거듭하던 황 박사 가족은 급기야 서울 청계천 빈민촌에 정착했고, 황 박사는 어린 시절을 빈민가에서 배곯아 가며 보내게 됐다.

황 박사는 "그땐 지긋지긋한 가난탓에 부모님이 참 원망스러웠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 가난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밑거름이 된 것 같아 부모님께 감사한다"고 말한다.

10대 후반, 빈민가에서 우유배달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던 그는 군을 제대하고 나서 다시 빈민가로 돌아왔다.

그때 좀 철이 들었다는 그는 취업을 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봤지만 어느 곳에서도 찾는 이 없었고, 이듬해까지 실업자로 지내면서 급기야 자살까지 결심했다고 한다.

황 박사는 "죽으려 하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음이야 언제든지 '선택'할 수 있지만 패배자로 죽느니 한번 해보고 싶은 걸 이룬 다음에 죽자는 생각이었다"고 회고했다.

26세 나이에 뒤늦게 다시 책을 잡아 든 황 박사는 그때부터 '죽기 아니면 살기'로 공부했고, 이듬해인 1973년 늦은 나이에 수원 아주대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아주대는 1회 입학생을 맞았고, 도서관 등에서 아르바이트로 고학하던 황 박사를 인재 육성 차원에서 프랑스 유학까지 시켰다.

30대 후반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해 다시 돌아온 황 박사는 불과 몇 년전 자살을 결심했던 빈민가의 26세 실업자가 아닌 국내 석학의 반열에 올라와 있었고, 그야말로 수재들이 모여있다는 카이스트에 교수로 재직하게 된다.

교수 재직날을 그는 '못 배운 한(恨), 못 가졌던 한 중에서 첫번째 한은 시원하게 풀었던 때'라고 술회했다.


하지만 애초부터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탓인지,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남들보다 7년 늦게 시작한 공부가 그렇게도 어려웠다고 한다. 황 박사는 국내 학계에 큰 획을 그을 자신이 없을 바에야 '다른' 길을 가보는 게 어떨까란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남 부럽지 않은 교수생활도 스스로 나태해질까 겁이 나 또다른 도전을 결심했다.

이에 학교 후배가 사업으로 성공하는 것을 보고 자신도 이번엔 '못 가졌던 한'을 한번 풀어보자는 심산에 수원에 터를 잡기로 했다.

황 박사는 "무주공산 같았던 생활정보지 업계에 수원교차로라는 획을 그어보기로 했다"며 "청계천 빈민가에서 죽음을 결심했던 마당에 겁날 게 아무 것도 없었고, 그 도전정신이 수원교차로를 이만큼 성장시킨 것 같다"고 말했다.

공부면 공부, 사업이면 사업, 그가 손 댄 일들은 모두 그렇게 빛을 발했다. 투명한 세무회계 처리로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으로부터 세무 혜택까지 받은 황 박사는 수백억원대 자산을 이룩하면서 주변을 다시 둘러보게 됐다.

그는 자신이 이룩한 부(富)가 온전히 자기의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빈민가 실업자를 박사로 만들어 준 모교 아주대에 무언가 보답을 하기로 결심했다.

이에 지난 2002년 황 박사는 사재를 털고, 아주대 동문모임 등으로부터 지원을 받아 구원장학재단이라는 공익법인을 설립했다.

이후 그는 장학금 출연을 위해 자신이 운영하던 회사의 주식 210억원 상당(전체의 90%)을 기부했고, 그 수익금으로 그동안 1천500여명의 모교 장학생에게 23억여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또한 황 박사는 아주대에 8억5천만원을 연구비로 기탁했고, 대학발전기금 등 각종 명목으로 무려 87억여원을 환원했다.

하지만 지난 2008년 3월 수원세무서는 황 박사의 기부행위를 세법상 '증여'로 판단, 기부액의 65%에 해당하는 140억여원의 증여세를 부과했고, 황 박사가 증여세부과처분 취소를 법원에 구하면서 소송이 시작됐다.

2년여에 걸친 지루한 법정공방 끝에 지난 7월 수원지법 행정3부(재판장·이준상 부장판사)는 황 박사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황 박사가 애초에 주식을 아주대에 기부해 장학사업에 사용하려는 의사가 있었을 뿐 처음부터 공익법인 설립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현재 보유하고 있는 주식 10% 또한 아주대측이 생계 유지의 이유로 권함에 따라 보유한 것일뿐 내국법인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함으로 볼 수 없다"며 증여세 부과처분을 취소하라고 판결했다.

당초 세무서측은 "공익법인이 주식을 출연받은데 대해 공익목적 사업의 효율적 수행을 위한 출연이기는 하나, 증여세법에 따라 공익법인이 내국법인의 의결권 있는 주식의 5%를 초과해 출연한 경우이므로 증여세를 부과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었다. 돈은 되지만 주식은 기부용으로 할 수 없다는 천편일률적인 근거를 든 것.

이에 대해서도 법원은 "근대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 주요 역할이었지만 근대 국가 이상은 공적 과제가 폭발적으로 증대되면서 정부의 재정지출만으로 사회복지, 문화사업, 교육 등 다양한 공익사업 수요를 충족하기엔 불가능해졌다"며 "이로써 민간단체나 개인의 공익사업 참여가 불가피해지면서 공익사업에 출연하는 재산에 대해 일정부분 증여세 혜택을 주는 것은 그 법 취지를 제대로 실현시키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현재 세무서측의 항소로 최근 고법으로부터 2심 통고장을 받은 황 박사는 "선량한 기부자들이 박대받지 않게 하기 위해 이 싸움을 계속할 것"이라며 "차후 승소든 패소든 재원이 허락한다면 헌법소원을 내 기부자들을 괴롭히는 악법은 폐지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어렸을 적부터 가난과 굶주림으로 고생해 젊은 시절부터 이마에 주름살이 가득했다던 그는 "지금 위치가 어떤가에 따라 타인을 깔봐서도 안되고, 또 스스로 기죽을 것도 없다"며 "빈민촌 자살기도자가 석학이 되고 자산가가 될 수 있는 사회인 만큼 바로 오늘 최선을 다한다면 누구나 인생역전의 기회는 온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