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원장의 넷째아들인 성조(成祖) 영락제가 부친을 위해 1413년에 세운 신공성덕비루(神功聖德碑樓). 비석을 보호하는 외벽은 정사각형 모양으로 구성돼 있으며, 비석을 떠받치고 있는 돌거북은 용왕의 아들을 상징한다. 비문에는 2천746자에 달하는 주원장의 일생이 기록돼 있으며, 난징지역에서 가장 큰 고비석(古碑石)이다.

[경인일보=김선회기자]중국 난징(南京)은 장쑤성(江蘇省)의 성도다. 장강 하류 비옥한 삼각주 토지위에 발달한 탓에 예로 부터 강남 경제의 중심지로 명성을 떨치며 모두 10개의 나라가 이곳을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중반 동안 난징은 최악의 시기를 보냈다. '태평천국의 난(1851~1864)'으로 도시가 쑥대밭이 됐고, 신해혁명(1911∼1912) 당시 공화국의 임시정부로 엄청난 변화를 몸소 체험하기도 했다. 그리고 가장 큰 사건으로 30만명 이상의 무고한 사람들이 일본군에게 희생되기도 했다. 현재 난징은 전쟁의 아픔과 상처를 딛고 신흥공업도시로 성장해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고 있다. 바로 이곳에 명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과 황후 마씨(馬氏)의 능인 '명효릉(明孝陵)'이 자리잡고 있다.

#'거지'에서 '황제'까지 오른 명(明) 태조 주원장

▲ 명태조(홍무제) 주원장의 어진.
난징시 중산(鐘山) 두룽푸(獨龍阜)에 있는 명효릉은 명나라의 첫 황릉이며, '효릉(孝陵)'이라는 명칭은 마 황후의 시호인 효자(孝慈)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에 묻힌 명태조 주원장(1328~1398)은 참으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중국 역사상 이처럼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몽골족이 지배하던 원(元)나라 말기, 국가지도부는 천재지변에 대처할 능력을 상실했고, 이와 동시에 각종 공공사업에 대규모 노동력을 징발해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했다. 어린시절 가뭄과 기근으로 부모형제가 굶어 죽는 모습을 목격했던 주원장은 성장 과정에서 워낙 세파에 시달렸기 때문에 사람다루는데 있어서 수완이 좋았고, 각종 사태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시킬 줄 았았다. 그는 불과 열 살 정도의 나이에 스스로 절에 들어가 잔심부름으로 목숨을 부지하다가 그뒤 행각승이 돼 회하(淮河) 유역을 떠돌며 걸식했다. 그후 홍건적이었던 곽자흥(郭子興)의 부하가 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곽자흥의 양녀와 결혼해 그의 사위가 됐다. 주원장은 곽자흥의 군대가 분열되자 독자적으로 군대를 모아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원나라 강남의 거점인 난징을 점령하게 된다. 이후 그는 각지의 군웅들을 모두 굴복시키고 1368년 난징에서 명(明)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홍무(洪武)'라 칭한다. 세계 역사상 최초로 걸인 출신의 황제가 등극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주원장이 연호를 홍무로 썼기때문에 그를 '홍무제(洪武帝)'라고 일컫기도 한다.

▲ 중국 혁명의 선도자 쑨원(孫文)이 묻혀 있는 중산릉(中山陵).

주원장은 집권하자마자 한족(漢族)의 왕조를 회복시킴과 동시에 원나라 시절 행했던 모든 몽골 풍속을 금지시키고 중앙집권적 독재체제의 확립을 꾀했다. 하지만 극단적인 중앙집권제 실시를 위해 재상 자리도 폐지하고, 금의위(錦衣衛)라는 별도의 사찰기관을 두고 잘못이 있는 신하들에게 매질을 하는 등 공포정치를 실시해 신하들의 원성도 많이 샀다. 또 30여년의 재위 기간 동안 네차례에 걸친 숙청작업을 통해 고위 관리를 비롯해 장군, 지주, 국자감의 학생들까지 무자비하게 처단했다. 그렇게 절대권력을 누렸던 주원장은 만년에 고독하게 살다 70세의 나이로 병사했고, 그가 죽은 이후 26명이나 되는 아들들 사이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 '명릉(明陵)'의 표본이 되다

주원장은 자신이 살아있을 때 이미 묏자리를 정하고 능을 조성할 것을 명했다. 명효릉은 홍무14년(1381) 착공됐으며, 이듬해 마황후가 죽자 공사중인 황릉에 먼저 매장됐다. 홍무31년(1398) 주원장이 병으로 사망하자 이곳에 묻혔으며, 32년의 공사기간을 거쳐 영락제(永樂帝) 때인 1413년에 드디어 능이 완공됐다. 능 조성을 위해 동원된 인부만 10만명에 이르며 순장된 관인이 10여명, 병사와 시종이 46명이라 전해진다. 명효릉은 한나라부터 송나라까지의 능제에 바탕을 뒀지만, 신도석물은 완전히 새로운 체제로 조성됐다. 능 주변에는 실물 크기의 코끼리, 말, 기린(麒麟), 낙타 모양의 석수(石獸) 12쌍과 문·무인석 4쌍이 늘어서 있다. 명대는 도합 14명의 황제가 통치를 했는데, 주원장을 제외한 13명의 황제는 베이징에 있는 명십삼릉(明十三陵)에 묻혀 있다. 이는 명의 3대 황제 영락제가 주원장 사후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北京)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태조 이후 명나라 황제들은 모두 이 능을 모방해 황릉을 건설했으니 명효릉은 실로 '명릉(明陵)'의 표본이 된 셈이다.

▲ 능 앞에 낙타 석물을 세워 놓은 것은 명효릉이 처음이다. 낙타는 국력의 강성과 서역(西域)의 안녕을 상징한다.

문헌에 의하면 건축 당시에는 능원(陵園)과 방성(方城·네모진 성곽)등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었으며, 그 주위에 수만그루의 청솔나무와 1천여마리의 꽃사슴들이 노니는 웅장하고 수려한 경관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건축물과 주변 경관은 명나라말 청(淸)의 군대가 장강 이남을 공격할 때 파손됐으며, 태평천국의 난 진압 과정에서 남아있던 부분마저 훼손됐다.

한편, 일설에 의하면 주원장이 죽은 뒤 인부들이 난징의 13개 성을 모두 열고 관을 운구해 성밖으로 나가 그를 매장했다고 전해진다. 이때문에 주원장의 진짜 능은 난징 서쪽의 조천궁(朝天宮) 삼청전(三淸殿) 지하에 있다는 설도 있고, 황성(皇城)의 만세전(萬歲殿) 지하, 또는 베이징의 만세산(萬歲山)이라는 설도 있다. 이는 주원장이 사후 도굴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이토록 보안에 신경썼음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능은 현재 원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초라한 편이다. 그래도 유네스코는 그 가치를 인정해 명효릉을 200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 돌로 된 아치 모양의 금수교(金水橋). 일명 오룡교(五龍橋)라고도 한다.

#고종황릉 조성까지 영향을 미친 명효릉

현재 명효릉에는 많은 건축물들이 남아있지는 않아서 그런지 외국 관광객들보다는 난징 시민들이 더 많이 찾는다. 황제의 무덤이라기보다는 거의 공원에 가까운 분위기다. 그리고 사실 명효릉보다는 명효릉 바로 옆에 있는 '중산릉(中山陵)'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린다. 중산릉은 중국혁명의 아버지로 불리는 쑨원(孫文·1866~1925)의 무덤으로 중산(中山)은 그의 호다.

'난징 방문시 중산릉에 들르지 않았다면 중국인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산릉은 모든 중국인들이 한번쯤은 반드시 참배하고 싶어하는 곳이다. 명색이 명 태조의 능이지만 관광객 유치 능력면에서는 명효릉이 중산릉에 한참 뒤지는 셈이다.


명효릉은 조선왕릉을 조성하는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바로 26대 임금 고종이 만년에 황제릉을 조성하기 위해 이곳을 참조했던 것이다. 조선왕조실록과 의궤를 보면 "정유년(1897)에 사람을 보내 명나라 능제를 살펴보게 했더니 모든 석물이 아주 굉장했다고 한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를 합장된 남양주의 홍릉(洪陵)과 비교해 보면 석물의 종류, 도상, 배치에서 비록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명효릉의 제도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왜 고종은 시기적으로 가까운 청대(淸代)의 능을 모본으로 삼지 않고 명대의 능을 참고 했을까? 그것은 바로 조선의 청에 대한 거부의식과 명나라에 대한 숭배의식 때문이었다. 또 새로운 황제국을 탄생시킨 고종이 명나라를 새롭게 세운 태조의 능에 더욱 큰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저멀리 중국에 있는 중국 황릉 한기가 우리의 역사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셈이다.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