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글┃김학석·김종호·전상천·민정주기자]'모든 것은 마음속에 있고, 마음은 모든 것에 있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원효는 한 무덤에서 해골 물을 마시고 대오각성했다. '모든 것은 오로지 마음이 지어낸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간밤에 목이 말라 마실 때 그렇게도 달콤했던 물맛이, 뒤늦게 해골에 고인 썩은 빗물임을 알고는 구역질까지 한 자신의 모습에서 큰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천년 전 당나라 뱃길이 있던, 지금의 평택 포승과 화성 남양 사이 어디선가에서 원효는 다시 발길을 돌려 민중세상의 한복판으로 나아갔다. 대승불교를 일으킨 것이다. 대중국 전초기지로 급부상하고 있는 평택항은 미2함대가 주둔하고, 중국을 비롯해 동아시아로 가는 배들의 정박지다. 예전엔 대진나루로 소금과 쌀을 실은 배들이 오가던 주요 해로가 있던 곳이다.
화성 남양의 당성은 옛 서역 문물이 유입되거나 신문물을 배우기 위해 당나라 등으로 길을 떠나던 당항성이다. 원효가 머물렀을지도 모른다는 학계내 논란은 여전하지만 당시 당나라로 향하던 뱃길이었음은 분명하다. 당나라로 떠나기 전 고국에서의 마지막 밤에 역사를 변화시킬 뜻을 깨달았던 원효의 길, 시작이자 끝이었던 서해 바닷가에 서 본다.
■ 오도성지 수도사
한국 해군 이전으로 평택시 포승면 원정리 이주마을 한복판을 가로질러 산으로 올라가면 조우할 수 있는 '수도사'. 원효가 해골물을 마시고 득도한 곳으로, 염거가 창건하기 전에도 작은 암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원효가 이 근처에서 유하다 해골물을 먹고 뒤늦게 일체유심조의 깊은 뜻을 깨닫고 당나라 유학을 포기했다고 기록됐다. '마음 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겠느냐'(心生則種種法生 心滅則種種法滅)는 각성에 신라로 돌아간 것.
평택시가 원효의 도시임을 주창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평택시는 원효가 깨달음을 얻은 수도사에 참선을 경험할 수 있는 토굴 체험관을 만들 예정이다. 수도사 경내에 한꺼번에 10여명이 앉을 수 있는 토굴 1식을 만들어 일반 중생이 몸소 원효대사의 깨달음을 가상 체험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현 수도사는 템플스테이와 사찰음식으로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해 줘 명망이 높다. 템플스테이와 함께 불교문화의 한 맥을 이어온 전통 사찰음식 만들기와 사찰음식의 주재료가 되는 각종 산야초 가꾸기 및 채취 프로그램 등을 운영하고 있다. 수도사 적문스님은 지난 8월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지인 뉴욕 한복판에서 한국 사찰음식 전시회를 개최, 뉴요커를 홀리기도 할 정도로 사찰음식 명소로 재발견되고 있다.
■ 평택호서 걸어 나온 불상, 심복사
안성에서 빠져 나와 평택시청을 지나 도착한 곳은 현덕면 '심복사'. 취재차량보단 자전거로 가는 게 더 운치 있을 정도로 마을길은 단아하고 운치있다. 옛적엔 바닷물이 바로 아래까지 밀려 들어왔던 광덕산 자락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다.
천년사찰답지 않게 수수한 모습인 심복사는 천년 전 파주 문산포 천을문(千乙文)이라는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져 걸린 불상을 지게에 메고 오다 봉안한 것이다.
천씨가 지고 온 불상은 보물 제565호로 지정돼 있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다.
광배(光背)는 없지만 대좌와 불신은 거의 손상 없이 보존돼 있다. 머리는 신체에 비해 큰 편이고 얼굴은 살이 올라 있다. 코는 좁고 긴 삼각형을 이루나 좀 빈약해 보인다. 아래를 향한 가는 눈이나 작은 입 등의 세부 표현 역시 소극적이어서 여느 사찰이 모시는 불상의 활력감이나 위압감보다는 부드러운 인간미가 그윽하다.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를 보는 느낌이 든다.
계단 아래 멀찍이 서서 올려다보면 돌담 너머 대적광전의 지붕이 마치 돌담 위에 얹혀 있는 듯 빼꼼히 보인다. 발걸음을 돌려 사찰의 가장 높은 곳인 삼성각에 올라서면 먼 곳으로 평택호가 어슴푸레 비친다. 바다의 유혹이다.
■ 신라와 중국의 교통 출입구, 당성(黨城)
화성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九峰山) 위에 있는 삼국시대의 석축 산성인 당성을 오르는 입구에는 밤나무가 유독 많았다. 적갈색으로 익어 속을 드러낸 채 바닥에 누워 있는 밤송이를 피해 오르는 길은 생각보다 어렵진 않아 푹신함을 느낄 정도다. 오가는 이가 많지 않은 듯 길 위에는 잔풀들이 제법 촘촘히 돋아 있었지만 15분쯤 숨이 벅차오르는 오르막길을 걸으니 정상에 도착했다. 1971년 사적 제217호로 지정된 당성은 둘레만 1천200m이고, 현재는 동문·남문·북문의 터와 우물터, 건물지가 남아 있다.
당성은 해적 소탕을 위한 군사시설이자 대당 무역을 비롯, 군사적 요충지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 일대에는 당시 중국을 상징하는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소정방과 관련있는 '소'자가 붙은 지명인데, 금완면의 소곡이나 인천의 소래가 그 예이다.
당성 정상 아래로 밭과 길, 집과 나무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시가지가 보인다. 천년 전이라면 집들이 아니라 배들이 정렬해 있을 곳이다. 당성 앞까지 차오르던 서해는 어느새 저만치 물러서고 사람에게 삶의 터전을 내주었다. 어쩌면 배가 물러나고 집이 들어앉은 저 곳 어디쯤이 원효가 당나라행 배를 타려던 곳일 게다. 취재진은 신흥사에 들렀다가 다시 길을 떠난다.
※ 인터뷰 / 김용국 동아시아전통문화연구원 원장
역사적 한계 뛰어넘는 스토리텔링 중요
"원효길이 관통하는 각 지역의 원효 관련 이야기들이나 유물, 유적을 개발·복원하는 게 관건입니다."
동아시아전통문화연구원 김용국 원장은 원효길 복원과 관련, "역사적인 기록에 한계가 있는 만큼 역사 그 자체에 함몰되지 말고 현존하는 유물 등과 관련된 설화적 요소에 집중, 스토리텔링 작업을 하는 게 중요하다"며 이같이 밝혔다.
또 "평택 수도사와 화성 당항성 등의 역사적 근거에 대한 논란은 원효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기 직전의 마지막 코스인 만큼 신라와 당나라가 어떤 해양루트를 사용했는지 등을 유물과 민간전승 설화 등을 포함, 이른 시일내에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원효길을 검증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 원장은 화성 팔탄면 금산사에서 설총을 모시고 있는 것 그 자체를 원효와의 연관성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제시하기도 했다. 특히 그는 평택이나 화성 서신 등은 천년 이전에는 바다가 마을 안까지 밀려왔던 지역이어서 지금의 행정구역으론 한 권역으로 묶였을 가능성도 큰 점을 고려, 육로가 아닌 당 시대의 뱃길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조언했다.
김 원장은 마지막으로 "바닷물이 서로 통하는 것처럼 이야기가 통하면 원효길은 자연히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며 "원효와 관련 특정지역으로 그 활동범주를 단정짓는 우를 범하면 안 된다"고 경고했다.
※ 관록과 패기의 조화 끈끈한 팀워크 자랑
'길에서, 원효를 만나다' 특별취재팀은 단출하지만 꽤나 단단했다.
취재단의 유일한 홍일점인 민정주 기자는 사회부 2년차로 막내지만 만장일치로 취재팀장에 추대, 식사 메뉴 고르기부터 험한 산길 오르기 등 모든 취재 일정을 앞장서 소화, 신라시대 화랑에 비춰 결코 뒤지지 않았다.
뉴스페이퍼에서 이미지나 글보다 더 많은 무언가(?)를 전해주고 있는 사진은 소위 이 업계에선 전설적 인물로 알려진 조형기 경인일보 편집위원이 도맡아 주었다. 조 편집위원은 30년간 취재현장을 누비며 체득한 다양한 경험들을 후배들에게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해 주려해 렉스톤 차량은 흡사 '네 바퀴로 움직이는 기자교실'을 방불케 했다.
마지막으로 원효의 길을 기획했던 경제부 전상천 기자. 탐사보도에 있어서 자타가 공인하는 베테랑 기자인 그는 취재에 필요한 전문가 및 숙소 헌팅, 취재비 마련 등 '길에서 원효를 만나다'를 기획취재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담당했다. 더불어 산길을 능수능란하게 취재차량을 몰아 준 백승현 기사의 안전운행도 가히 절대적으로 한몫 했다.
사진┃조형기편집위원 hyungphoto@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