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김선회기자]중국의 수도인 베이징(北京)을 찾는 관광객들은 누구나 톈안먼(天安門), 쯔진청(紫禁城), 완리창청(萬里長城) 등을 먼저 찾게 된다. 그런 연후에 역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은 명13릉(明十三陵)을 돌아보곤 하는데, 사실 명나라 황제들이 잠들어 있는 명13릉뿐 아니라 완리창청과 쯔진청도 명나라와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완리창청은 진시황 때에 건축한 오리지널이 아니라 명태조 주원장의 지시로 명대에 개보수해서 만든 것이며, 영화 '마지막 황제'의 푸이(溥儀)가 떠오르는 쯔진청도 사실은 명나라의 3대 황제인 영락제 때부터 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 명나라 최대의 능묘군 '명13릉'
명13릉은 중국 베이징 북쪽 약 40㎞ 지점에 있는 창핑구 천수산 아래에 조성된 명대(明代·1368~1644) 13명의 황제와 23명 황후, 1명의 귀비가 한데 묻혀 있는 능묘군이다. 이곳은 황제 13대의 능이 있기 때문에 '명13릉'이라고 통칭되고 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구리시에 있는 조선왕릉의 최대 능원인 동구릉(東九陵)과 비교할 수 있다.
현재 13개의 능이 모두 공개된 것은 아니고, 성조 영락제의 '장릉(長陵)', 목종 융경제의 '소릉(昭陵)', 신종 만력제 '정릉(定陵)' 등 3개의 능만 공개되고 있다. 이 중 특히 정릉은 내부에 숨겨져 있던 지하궁전이 발굴돼 호화로운 금은 그릇, 왕관과 장신구 등의 부장품이 출토됐으며, 지하묘실은 박물관으로 만들어져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게 해놨다. 명13릉은 철저하게 풍수지리학자들의 계산에 의해 조성된 것이다. 이 거대한 능원의 동, 서, 북 3면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남쪽에는 용산(龍山)과 호산(虎山)이 마주 서 있어 마치 전체 능묘군이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국은 주(周)나라(약 BC 1066~BC 221년) 때에 이미 흙을 쌓아 올려 무덤을 만드는 법이 나왔다. 그 후 역대 제왕들은 저승에 가서도 생전의 지고무상한 영광을 누리기 위해 능침의 규모를 확대하기 시작했다. 명태조 주원장은 개국 후 난징(南京)에서 황위에 오르고 능묘도 난징에다 건설했다. 3대 황제 영락제는 황위에 오른 후 1421년 도읍을 베이징으로 옮겼는데, 수도를 옮기기도 전인 1409년부터 베이징에 자신의 능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13개 능 전체의 건조공사는 무려 200여년에 걸쳐 진행됐다. 당대 봉건 황제들이 백성의 출입을 철저하게 금지했던 황릉이 오늘날 관광지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며, 명13릉은 난징의 명효릉(明孝陵)과 함께 2003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 조카를 죽이며 집권했지만 최대의 치적을 남긴 '영락제'
명13릉 중에서 규모가 제일 큰 '장릉(長陵)'은 명태조 주원장의 넷째 아들이자 제3대 황제를 지낸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1360~1424)의 능이다. 주원장은 원(元)나라의 정치권력이 안정되지 못했던 원인을 분석하고, 자신의 아들 26명 중 9명을 지방의 왕으로 분봉해 병권을 주고, 중앙의 병풍 역할을 하게 했다. 북쪽 변방인 연경(燕京·현재의 베이징)의 왕이었던 '주체(朱棣·영락제)'는 9명의 제후왕 중 세력이 제일 컸고 야심도 대단했다. 주원장이 70세로 병사한 뒤 그의 손자인 혜제(惠帝) 건문제(建文帝)가 16세로 즉위했는데, 건문제는 대신들의 건의에 따라 제후왕의 세력을 억누르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접한 주체는 곧바로 흥분해 부하들과 함께 1399년 일종의 쿠데타인 '정난(靖難)의 변'을 일으켰다. 그는 4년에 걸쳐 반대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수도였던 난징을 함락, 1403년 황제로 등극하기에 이른다. 황위를 빼앗긴 건문제는 난징 함락 이후 행적이 묘연해 당시 성안에서 불 타 죽거나 인근에서 자살한 것으로 전해진다. 때문에 2대 황제 건문제는 명13릉에 묻히지 못하게 된다. 영락제는 친조카였던 건문제를 사지로 몰아넣고 황제로 즉위했기에, 집권 과정이 이와 비슷한 조선의 7대 임금 '세조'에 비견되기도 한다.
영락제는 제위에 오른 뒤 난징 조정의 많은 관료들을 처형하고 자신의 권력에 도전할 만한 기타 변방의 제후왕 세력을 약화시킨 뒤 자신의 근거지인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겼다. 베이징 천도로 북방에 대한 방위가 용이해졌고, 중국 전체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그는 천도 후 14년간 100만명의 인부를 동원해 황궁인 쯔진청을 건설케 한다. 그리고 태조 때부터 시달렸던 왜구를 소탕하고 티베트, 운남의 서남 만족(蠻族)과 베트남까지 정벌해 타타르해협에서부터 남만주에 이르는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게 된다. 또 환관 정화(鄭和)로 하여금 대함대를 이끌고 동남아시아, 서남아시아를 거쳐 아프리카 케냐 해안까지 7회에 걸쳐 대원정군을 보내 명나라를 해외에 과시하고 세력을 확장했다. 내정면에서는 문화정책에 힘을 기울여 2만여 권에 이르는 '영락대전(永樂大典)'과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 '성리대전(性理大全)'과 같은 대규모 편찬사업으로 비판세력을 흡수하는 등 역량을 발휘하기도 했다.
# 명13릉의 주릉(主陵)인 장릉(長陵)
1424년 영락제는 제5차 대외 정벌에 직접 나섰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만 병사하고 만다. 23년간 천하를 호령했던 한 인물이 마침내 장릉의 지하 현궁(玄宮)에 깊이 잠들게 된 것이다. 13개의 황릉 중에서 영락제의 장릉이 제일 처음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머지 12황제의 능은 이보다 더 크게 만들어질 수 없었다. 대신 나머지 능도 똑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져 건물의 구조는 거의 같다. 명13릉의 주릉(主陵)인 장릉의 건축물은 쯔진청의 구조를 모방해 붉은 담장에 황색 기와를 사용했고, 건물과 누각이 어울려 황제의 권위를 잘 보여준다. 장릉의 중심건물은 '능은전(陵恩殿)'인데, 과거 황실의 제사를 모두 이 건물에서 지냈다. 장릉의 능은전은 금사(金絲)를 입힌 60개의 녹나무 기둥이 받치고 있다. 가운데 있는 네 개의 기둥은 높이가 14.3m에 직경이 1.17m에 이른다.
이와 같은 커다란 녹나무 기둥은 중국 건축사에서 똑같은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것으로 쯔진청의 태화전(太和殿)에도 사용되지 않았을 정도다. 능은전 안에는 영락제의 동상이 있는데 많은 관광객들이 동상 앞에 지폐와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빈다. 아마도 절대권력을 행사했던 대황제의 '기(氣)'를 조금이라도 받고 싶은 사람들의 소망 때문이리라. 장릉을 따라 밑으로 한참 걷다 보면 명13릉의 광활한 신도(神道)를 만날 수 있다. 우리의 조선 왕릉 신도는 불과 몇 십미터 이내인데, 이곳 신도는 13개의 능이 모두 한 개의 주신도(主神道)를 사용하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길이만 800여m에 이르며 문·무인석, 낙타, 코끼리, 해태, 기린(麒麟) 등 총 18쌍의 거대한 석물을 배치해 놨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