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인일보=글┃김선회기자]1958년 9월 6일 중국 신화통신은 전 세계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타전했다. "명 13릉 가운데 하나인 정릉(定陵)이 발굴됐다. 능묘는 하나의 지하 궁전을 이루고 있다. 온통 청백색의 돌로 축조된 반달모양의 능묘 후전(後殿)에는 세개의 주홍색 관곽(棺槨)이 안치돼 있는데, 명(明)의 제13대 황제인 주익균(朱翊鈞)과 그의 두 황후(효단·효정황후)의 것이다. 시신주위는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옥그릇, 그리고 100필이 넘는 채색 비단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 비단은 3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금빛 찬란하다. 이곳에서 발견된 비단은 실전(失傳)된 명나라때의 견직물 제작 기법을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 명나라의 멸망을 초래한 '만력제'
베이징에 있는 명13릉 중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로 '정릉'이다. 다른 능들은 대개 지상의 화려한 건축 양식만 볼 수 있는 반면, 정릉에서는 진시황 때부터 전설로만 전해지던 황제의 '지하궁전'이 실제로 발굴돼 많은 유물을 함께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릉은 '정릉박물관'으로 불리기도 한다.
정릉의 주인공인 주익균(1563~1620)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 파견을 단행한 황제로 우리나라 역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그는 1572년 10살의 어린 나이에 황제로 등극해 이듬해 연호를 만력(萬歷)으로 삼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만력제(萬曆帝)'로 부른다. 만력제는 1620년까지 48년간 명나라를 통치했는데, 이는 역대 명나라 황제들 중 가장 긴 재위기간이었다. 그는 정치를 잘 알지 못했던 등극 초기에는 모든 일을 명대 최고 재상인 장거정(張居正·1525~82)에게 맡겼다. 장거정은 명실상부, 기강 확립, 명령 복종, 군비 확충 등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사심 없이, 그러면서도 단호하게 나랏일을 처리했으며 개혁에도 열심이었다.

그 덕분에 명나라는 어느 정도 모양새를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1582년 장거정이 죽고 만력제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개혁정책의 후퇴가 나타났다. 만력제는 황태자의 책봉 문제로 내각과 대립하면서 정사를 돌보지 않는 이른바 '태정(怠政)'을 지속했고, 명나라는 심각한 정치적 혼란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1589년 이후 25년간 조정(朝廷)에 나오지 않고 주색에 빠져들었으며, 개인 축재(蓄財)에만 열을 올렸다. 황제가 돈을 밝히니 고관과 환관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탐관오리가 돼 갔고, 백성들의 원성은 점점 커졌다. 만력제가 죽은 뒤로 3명의 황제가 대를 이었는데, 이미 만력제 때 뒤숭숭해진 민심은 후에 이자성의 난(1630~40)을 불러왔고, 그가 죽은 지 24년째 되던 해 마침내 명나라는 멸망을 맞고 말았다. 역사가들은 한결같이 "명나라가 망한 것은 숭정제(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때가 아니라 만력제 때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 중국 고고학 발굴의 신기원을 이룩한 '정릉'
만력제는 1584년 스물 한살의 젊은 나이에 자신의 무덤 건설에 착수한다. 정릉의 조영을 위해 군인과 민간인 2만~3만명이 매일 동원돼 일 년 내내 쉼 없이 공사를 했다. 그리고 1590년 6월 6년 만에 정릉을 완성했다. 전체 공정에 들어간 은 800만냥은 국고수입의 2년치에 해당하는 금액이었고, 이는 모두 백성의 혈세를 착취해 만든 것이었다. 만력제는 능묘가 완성된 뒤 30년이 지난 1620년에야 자신이 만든 무덤에 묻힐 수 있었다.

1956년 5월 19일. 이날은 중국 고고학사의 신기원을 이룩한 날이었다. 중국 고고연구소 발굴대원들이 정릉의 보성 안쪽의 돌에서 수도문(遂道門·통로입구)이라는 글씨를 발견한 것이다. 발굴대원들은 흥분했다. 고고학적 방법으로 제왕의 능묘를 발굴하는 일은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들이 2개월간 수도문이라고 새겨진 돌 밑을 파고 들어가자 큰 벽돌로 쌓은 대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궁의 통로로 통하는 첫 번째 대문을 발견한 것이다. 그후 1958년 7월 말까지 만 2년 2개월 동안 2만여명의 인원과 40만 위안이 투여돼 땅속에 깊숙이 묻혀 있던 지하 현궁의 실체가 드러나게 됐다. 400여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도 일단 지하궁전 안에 들어가 보면 무엇보다 그 휘황찬란함에 사람들은 크게 놀라게 된다. 세밀하게 조각해 놓은 거대한 돌과 화려하고 웅장한 지하의 현궁은 중국 고대건축의 풍격과 예술의 정수가 담겨 있다. 정릉의 지하궁전은 5개의 높고 큰 전당(殿堂)으로 구성돼 있는데, 총면적은 1천195㎡, 깊이 27m(지하 9층 규모)에 달한다. 이곳에서 출토된 문화재는 무려 3천여점에 이른다. 그 중에는 제후들이 생전에 궁중에서 사용했던 일용 기물과 복식이 많다. 황제와 황후가 사용했던 금관과 봉관, 제작이 정교한 금주전자, 옥잔, 옥사발, 청화자기, 삼채자기 화로 등은 중국에서도 보기 드문 진품으로 당대 최고의 공예수준을 보여준다.

# 관은 버려지고, 황제의 시신은 불타오르다
정릉의 지하궁전 발굴이 끝나고 1959년 9월 30일 정릉박물관이 정식으로 개관한다. 그런데 개관 당일 새벽, 현장에 있던 박물관 주임은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답시고 황제와 황후의 시신이 들어 있던 관곽(棺槨)을 버리라고 지시한다. 관곽이 낡아 시멘트로 새롭게 복제를 해놨으니 더 이상 필요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몇몇 사람들이 말렸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결국 만력제와 두 황후의 관곽 3개는 무덤 옆에 있는 산등성이에 조각난 채 버려졌고 그 주위에 살던 농민들이 그것을 수거해서 궤짝이나 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경우인가? 하지만 이보다 더 어이없는 일이 곧 발생한다. 1966년 중국 대륙에 엄청난 회오리 바람이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전무후무한 무산계급의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마오쩌둥의 지휘 아래 100만이 넘는 소년·소녀 홍위병들은 톈안먼광장을 떠나 사찰, 공원, 고건축물, 문화유적지를 찾아서 닥치는 대로 부쉈다. 그리고 정릉의 지하궁전을 찾아낸 홍위병들은 이곳이 봉건시대의 상징이며 황릉의 주인이야말로 지주계급의 총 대표이자 반동분자라며 지하궁 안의 유물을 정리한 건물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명루 위 '정릉(定陵)'이라고 새겨진 편액에는 페인트칠을 해 못 쓰게 만들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자신들이 하는 일에 더욱 자신감을 가진 홍위병들은 지하 창고에 보관돼 있던 만력제와 황후의 시신 3구와 황제·황후의 초상화, 발굴 관련사진 등을 모아놓고 모두 소각시켜 버린다. 1966년 8월 24일 '혁명적 행동'이라는 이름 아래 정릉 앞 광장은 불바다가 됐다. 자신의 능을 만들기 위해 수많은 이들을 희생시켰던 황제는 그렇게 스러져갔던 것이다.

정릉을 둘러보면서 우리의 조선왕릉 중 '선릉(宣陵)'이 떠올랐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자리잡은 선릉은 9대 임금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가 묻힌 곳인데,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들이 능을 파헤치고 관을 꺼내 불태워 버렸다. 그래서 현재 선릉에는 두 사람의 유해가 없이 그냥 봉분만 덩그렇게 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누가 그랬던가. 비록 나라는 다르지만 문화재의 훼손과 그 안에 담긴 문화적 상처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사진┃김종택기자 jongtaek@kyeong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