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인일보=글/조성면(문학평론가·인하대 강의교수)]인천역과 동인천역은 쌍둥이 형제 같다. 역간 거리도 가깝고 인천이란 이름도 그렇고 자유공원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인천역에서 차이나타운을 거쳐 자유공원으로 올라가 홍예문을 거치거나 율목동 쪽으로 틀어 긴담모퉁이길과 기독병원을 지나면 곧바로 동인천역과 연결되니 이 둘은 모두 응봉산 식구들인 셈이다.
경인철도가 들어서기 이전까지 인천을 규정하는 핵심요인은 한남정맥과 서해바다였다. 백두대간 13정맥의 하나인 한남정맥은 안성의 칠장산에서 시작되어 서북쪽으로 내달리는 봉우리들로 느리게 이어진 야트막한 완행열차와 같다. 수원의 광교산, 의왕의 백운산, 군포의 수리산, 시흥의 소래산과 인천의 철마산을 거쳐 부천의 계양산까지 이어지는 용맥이 바로 인천을 구성하는 지세인 것이다. 형기론(形氣論)의 관점에서 인천도호부가 자리한 관교동은 한남정맥의 한 줄기가 우백호로 감싸고 있는 장풍국이며, 문학산은 서울의 남산 같은 안산(案山)이었다.
근대적 도시공학이나 토목공학이 없었던 시대 풍수는 자연과학이었다. 풍수의 핵심은 바람과 물을 어떻게 다스리고 이에 적응하느냐 하는 것이었거니와, 우리에게는 삶과 농경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건해풍(乾亥風)과 곤신풍(坤申風)의 피해를 어떻게 막아내느냐가 핵심 사안이었던 것이다.
건해풍은 겨울철 시베리아에서 불어오는 차갑고 날카로운 북서풍이요, 곤신풍은 올여름 수도권 일대에 큰 피해를 입힌 곤파스처럼 서남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폭탄 곧 태풍을 말한다. 그러니 산을 등지고 남향으로 집을 짓고 그 앞에 방풍림의 역할을 하는 남산(안산)의 존재는 풍수의 요체가 된다. 이런 점에서 양택 풍수의 대원칙인 배산임수와 남향집도 실상은 곤신풍을 막고 일조권을 확보하며 생활용수를 확보하기 위한 방편이었으며, 풍수의 금기인 건해풍은 십이지로 보면 해자축(亥子丑)으로 북쪽이요 오행으로는 겨울이며 물을 가리키는 것이니 음양오행은 전근대시대의 자연과학이며 우주의 기운과 에너지 그리고 방향과 계절 등을 아우르는 종합적 우주론이었던 것이다.
풍수가 자연과학으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한계는 꼭 여기까지다. 이후부터 풍수를 통해서 길흉화복을 이야기하는 것은, 남당(楠堂) 조민행(趙敏行) 선생의 지적대로 '학(學)'이 아닌 '술(術)'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천 시내의 지세를 악어가 서해바다로 뛰어들어가는 형국 곧 악어출진형이라 하는 것은 과학이 아닌 비유이며, 팩트가 아닌 은유이고, 논증이 아닌 편의주의적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풍수적으로 인천이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태어나고 배타적이긴 하지만, 지기 싫어하고 기상이 씩씩하여 장차 항해 네트워크를 주도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만큼은 과학적 타당성을 떠나서 왠지 설득력 있게 들리며 꼭 믿고 싶은 마음도 든다.
한남정맥을 진산으로 하고 문학산을 남산으로 삼는, 인천의 공간구조가 요동치고 크게 왜곡된 것은 경인철도가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제물포항을 통해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던 뱃길과 신포동에서 싸리재와 쇠뿔고개(우각리)를 거쳐 부평과 소사로 이어지는 경인가도의 영향력이 급격히 축소되고, 경제활동의 중심이 인천도호부가 있던 관교동에서 일본 조계가 있던 중앙동과 관동 그리고 청국조계였던 선린동쪽으로 옮겨졌다. 이렇게 각국 조계가 들어서고 경인선이 개통되자 인천사람들은 조계의 변두리 지역인 북성동과 만석동 일대로 밀려나게 되었으며, 또한 동인천역 맞은편 역세권인 용동에서 도원역에 이르는 구간에 청과물시장이 새롭게 들어서 상권을 이루었으니 여기가 바로 '채미전거리(참외전거리)'다. 채미전거리는 한때 크게 번성하던 전국적인 상권으로 성가를 높이기도 했는데, 이제는 대형마트들에 밀려 몇몇 청과물가게들만이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으니 도시와 시장도 우리처럼 성주괴공(成住壞空)을 되풀이하며 생로병사를 겪는 것인가.
근대 문명의 총아인 철도는 놀라운 속도와 정확성으로 세상을 바꾸어 버렸다. 지역 간의 차이를 크게 약화시키고 근대인들의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과 감각을 변화시켰는가 하면, 상거래와 물류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여 자본주의 발전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철도 노선은 공간의 지배권 내지 자국 영토의 상징이 되었고, 따라서 철도 부설권 획득은 토목 프로젝트 차원의 의미를 넘어서는 정치·경제적 사건이 되는 것이다.
경인철도 역시 공간의 축소와 시간의 단축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수도권을 정거장으로 이루어진 세계로 재편하였다. 기러기가 군무를 펼치고, 갈대가 바람의 소식을 전하던 작은 포구 제물포는 사라지고 한국 최초의 근대 도시, 국제도시 인천이 탄생하였다. 돛배가 경강을 한가로이 오가며, 보부상들이 등짐을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흥타령으로 넘어가던 목가적 경인가도는 종언을 고하고 정확하고 합리적인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이 찾아온 것이다. 전통적인 여행과 모험은 사라지고 관광과 통근과 통학만이 남아 있는 차가운 문명의 시대를 만들어낸 것이다.
철도는 도시와 도시를 잇는 위대한 네트워크지만, 다른 길과 공존을 허락하지 않는 배타적 문물이기도 하다. 철도가 등장하는 순간, 도시는 완벽하게 양단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양편으로 갈라진 도시가 소통할 수 있는 길은 고가와 육교로 공중 부양을 하거나 땅 속을 뚫고 통행하는 방법뿐이다. 시인 하이네(H. Heine)는 이를 공간 살해라고 표현했다. 요컨대 하이네의 말대로 출발지와 목적지만이 의미를 가질 뿐 사이의 공간들은 사라지는, 즉 제물포의 파도가 숭례문 앞에서 부서지는 공간의 단축으로 개별 공간들의 아우라가 완벽하게 소멸되는 지각의 혼돈과 함께 서울 집중화가 더욱 더 촉진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경인철도의 등장과 함께 이제 전통적 공간으로서의 싸리재는 사라지고 축현역(杻峴驛)이란 이름으로 대치되었다. 아니, 개별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은 사라지고 편의적이고 자의적인 공간명인 상인천역과 동인천역으로 창씨개명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인천의 동쪽이 아니면서도 '동인천역'으로 호명되면서 전동·내동·용동·경동·인현동의 정체성과 역사도 자연스레 동인천의 역세권에 흡수되고 말았으니 동인천역에 오면 자꾸 인천을 생각하게 된다.
사진/김범준기자 bjk@kyeongin.com ·인천시립박물관